문화와 역사
지형과 지세
영남읍지(嶺南邑誌) 속 남해현
상세내용
영남읍지(嶺南邑誌)
분류 : 형식분류(고서 – 지리서), 내용분류(정치/행정 – 조직/운영)
간행주체 : 단체/기관
역할 : 편찬_경상도
간행지역 : 경상도 / 경상북도, 경상남도
간행시기 : 연도 1871년
크기 : 세로(31.2) 가로(20.8)
판본 : 필사본
장정 : 오침선장(五針線裝)
수량 : 17책 2195장(제1책 172장, 제2책 140장, 제3책 150장, 제4책 115장, 제5책 138장, 제6책 173장, 제7책 117장, 제8책 142장, 제9책 103장, 제10책 100장, 제11책 109장, 제12책 95장, 제13책 137장, 제14책 114장, 제15책 115장, 제16책 193장, 제17책 82장)
재질 : 표지_능화문황지(菱花紋黃紙), 본문_저지(楮紙)
표기문자 : 한자
도설 : 지도(채색) 65장 114면
인장정보 : 朝鮮總督府圖書之印 / 서울大學校圖書
내용 : 1871년(고종 3) 전국적인 읍지편찬 사업에 의해 편찬·상송된 경상도의 각 읍지(邑誌)를 합철한 경상도도지(慶尙道道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이다. 뒤에 신라가 영유하였고, 고려 태조가 통합한 뒤에는 동남도도부서사(東南道都部署使)를 두어 경주(慶州)에 사(司)를 두었다. 성종(成宗) 14년에 경내(境內)를 10도(道)로 나눌 때, 상주(尙州)의 관할로 영남도(嶺南道)를, 경주(慶州)ㆍ금주(金州)의 관할로 영동도(嶺東道)를, 진주(晉州)의 관할로 산남도(山南道)를 만들었다. 예종(睿宗) 원년에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고 일컫고, 명종(明宗) 원년에는 경상주도(慶尙州道)ㆍ진합주도(晉陜州道)로 나누었으며, 명종 16년에는 경상주도로 하였다. 신종(神宗) 7년에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고쳤다가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로 고쳤다. 고종(高宗) 46년에 명주도(溟州道)의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의 4주가 몽고(蒙古)에 함락되자, 본도의 평해(平海)ㆍ영덕(盈德)ㆍ덕원(德原)ㆍ송생(松生)을 떼내어 명주도에 예속시켰다. 충렬왕(忠烈王) 16년에 또 덕원ㆍ영덕ㆍ송생을 동계(東界)에 옮겨 예속시켰다가 본도에 복귀시켰다.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비로소 경상도(慶尙道)로 정하였다.
조선시대에 경상도는 부(府)가 1,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 목(牧)이 3, 도호부(都護府)가 7, 군(郡)이 14, 현(縣)이 40 등 총 66개 군현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전기에 진주로부터 남해현(南海縣)이, 김해로부터 웅천현(熊川縣)이, 인조 15년(1637) 경주로부터 자인현 (慈仁縣)이, 인조 18년(1640년) 성주의 속현 팔거현(八莒縣)이 칠곡(漆谷)도호부로, 숙종 9년(1683년) 영해로부터 영양현(英陽縣)이 독립하였다. 조선후기 경상도는 총 71개 군현을 관할하여 8도 중 군현의 수와 인구 등이 가장 컸을 뿐 아니라, 일본과 접촉하는 창구로서 외교 및 군사상 주요한 위치에 있었다.
태종 7년(1407) 이후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쪽을 좌도(左道), 서쪽을 우도(右道)로 나누기 시작하였다. 좌도에는 경주·안동·대구·풍기·용궁·인동 등 40개 군현이, 우도에는 상주·진주·성주·선산·문경·함창 등 31개 군현이 포함되었다. 좌도와 우도는 분리와 통합을 거듭하였으나 실제 관습적으로는 계속 사용되었다. 또한 좌도는 대체로 과거 진한(辰韓) 지역으로 신라의 전통이, 우도는 대체로 변한(弁韓) 지역으로 가야의 전통이 내려와 지역특성도 구분된다. 좌도에서는 북부의 안동, 남부의 경주가, 우도에서는 북부의 상주, 남부의 진주가 중심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전략적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도의 중심에 위치한 대구에 주목하였으며, 선조 34년(1601년) 감영이 옮겨오면서 새로운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고종 32년(1895) 23부제(府制)가 실시되었으며, 다음해(1896년)에 13도제(道制)가 실시되어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행정구역이 나타났다.
고종대 『영남읍지』는 1871년 제1차 총17책, 1895년 제2차 총34책 등 2차례에 걸쳐서 편찬되었다. 이 자료는 두 판본 중 가장 앞선 시기에 편찬된 읍지이다. 조선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영조년간 『여지도서(輿地圖書)』, 순조년간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이후 처음으로 도(道)단위로 제작한 읍지에 해당한다. 주된 내용은 18~19세기 『여지도서』의 보완작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이후의 증보된 읍지들과 지역전통을 수록한 사찬읍지의 성과 등 고종 당대에 수집가능한 거의 모든 자료를 집대성하였다. 이는 제2차 『영남읍지』가 읍사례를 중심으로 부세정보에 초점을 맞추어 재편집된 것과 대비된다.
본 읍지는 19세기 고종초기 정국운영상을 반영하고 있는 자료이다. 고종년간에는 탕평군주(蕩平君主)를 모범으로 삼아서 다양한 문물제도가 재정비함으로써, 세도정치기(勢道政治期)에 단절되었던 통치제도의 연결고리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 자료는 바로 18세기의 전통을 재결집하여 국가의 지방통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편찬되었다.
관련자료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奎 666〉, 『영남읍지(嶺南邑誌)』〈奎 12174〉, 『경상북도조사재료(慶尙北道調査材料)』〈奎 21291〉, 『호남읍지(湖南邑誌)』〈奎 12175〉‚ 『호남읍지(湖南邑誌)』〈奎 12181〉 집필자 : 김백철
상세내용 : 1871년 편찬된『영남읍지』2책에 수록된 경상도 남해현 읍지이다. 맨 앞에 채색지도 1장이 수록되어 있다.
남해현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창선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해읍 서변리,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남해는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서 신라 신문왕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현종대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에 하동(河東)과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칭하다가, 후에 하동현을 복설한 뒤 진주 김양부곡(金陽部曲)을 이속시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후 김양부곡을 진주로 환속시키고 다시 남해라 칭하였다. 세종대에는 곤명현(昆明縣)과 합하였다가 다시 나누었다. 남해현은 1895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남해군이 되었으며,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리되면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5년 진주의 창선도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읍성과 각 진보를 그리고 읍치와 진보를 연결하는 도로를 표시하였다. 진보는 미조항진(彌助項鎭), 평산포진(平山浦鎭), 곡포(曲浦), 상주포(尙州浦)의 성곽을 그리고 이름을 기재하였다, 곡포(曲浦)와 상주포(尙州浦)에는 “혁파”라고 부기하였다. 읍치 남쪽의 선소(船所)와 미조항진(彌助項鎭), 평산포진(平山浦鎭)에는 각각 배를 그려놓아 전선(戰船)을 보유하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본 읍지의 방리 항목에 따르면 남해현은 현내면(縣內面), 이동면(二東面),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天面)의 7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읍지에는 각 면별로 소속 이(里)의 이름과 관문(官門)으로부터의 거리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호구수는 호는 3,909호, 인구는 17,335구이며, 전결은 원장부(元帳簿) 전결이 2,469결여이다. 호구와 전결 수치로 미루어 볼 때 남해현은 조선시대 작은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남해현은 수군첨절제사가 임명되는 미조항진, 만호가 임명되는 평산포진이 소재하여 해방(海防)의 주요 거점의 하나였다.
본 읍지의 항목 구성은 지도(地圖),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관직(官職), 성씨(姓氏), 산천(山川), 풍속(風俗), 방명(坊名), 호구(戶口), 전부(田賦), 군액(軍額), 성지(城池), 임수(林藪), 창고(倉庫), 군기(軍器), 관애(關阨), 진보(鎭堡), 봉수(烽燧), 학교(學校), 단묘(壇廟), 능묘(陵墓), 불우(佛宇), 궁실(宮室), 공해(公廨), 누정(樓亭), 도로(道路), 교량(橋梁), 도서(島嶼), 제언(堤堰), 장시(場市), 역원(驛院), 목장(牧場), 형승(形勝), 고적(古蹟), 토산(土産), 진공(進貢), 봉름(俸廩), 관적(官蹟), 과거(科擧), 인물(人物), 제영(題詠), 비판(碑板), 책판(冊板)으로 되어 있다.
본 읍지는 통치기초정보와 지역의 문화·역사·인물 관련 항목이 고르게 배치되었다. 본 읍지는 1832년경 편찬된『경상도읍지』<奎 666> 에 수록된「남해현읍지」를 토대로 편찬하여, 항목 구성과 기술 내용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호구(戶口), 전부(田賦), 창고(倉庫)의 곡수(穀數), 군기(軍器) 등 항목은 당대 사실에 근거하여 기술하였다. 전부 항목은 균세전에서 “무오총(戊午摠)”이라고 하여 무오년이 기준임을 밝혔다. 창고 항목은 대원군 집권기에 들어 설치된 사환미(社還米)를 기록하였으며, 군기 항목은 육군기질(陸軍器秩)에서 “경오(1870년)조 월과(月課) 연환(鉛丸)”을 기록하였다. 관적(官跡) 항목은 마지막 기사가 “조희춘 신미 8월 도임(趙羲春辛未八月到任)”로서, 1871년 8월까지 기록하였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본 읍지 외에도 몇 종의 남해읍지가 더 소장되어 있다. 1786년경 편찬된『남해현읍지』, 1832년경 편찬된『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수록본, 1899년경 편찬된『남해읍지』, 1907년경 편찬된『남해군읍지』등이다. 이들 읍지를 비교 검토하면 남해의 통치기초정보와 지역의 문화·역사·인물에 대한 인식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집필자 :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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