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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문화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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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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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와 고문헌으로 읽는 남해 역사 이야기

고지도와 고문헌 그리고 남해, 공간과 기록으로 만나는 남해 역사 이야기  - 저자의 말 - 남해(南海)는 한반도의 남쪽 끝에서 예로부터 해상 교통과 군사 방비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해 온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해의 역사와 생활상은 단순한 연 대기적 서술이나 행정 기록만으로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부 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다양한 고지도와 고문헌 그리고 다양한 자료를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남해의 역사적 위상과 변천 과정이 더욱 생생하게 재 구성됩니다. 남해 관련 고지도는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광여도, 여지도, 조선지도, 지승, 해동지도」 등 전국 지리서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이며, 다른 하나는 「평산진지도, 미조항진지도, 적량진도, 창선도목장지 도」처럼 특정 진영이나 목장을 상세히 담은 지도입니다. 전자는 국가적 차원 에서 남해의 행정·군사적 위치를 명확히 나타내며, 후자는 남해 지역의 군사 거점, 해양 생업, 목장 운영 등 지역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생생히 전달합니 다. 이를 통해 남해가 단순한 해안 지역이 아니라 국가 방비와 해양 경제의 핵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읍지도(邑誌圖)는 남해의 사회·경제·문화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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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섬,유배의섬,문학의섬 노도

노도는 남해군에 속한 79개 섬 가운데 하나이지만, 단지 많은 섬 중 하나만은 아니다. 우선 노도는 남해에 셋 밖에 없는 유인도 중 하나이고, 1689년 남해로 유배를 와 한글소설 <구운몽> 과 <사씨남정기> ,비평집 <서포만필> 등을 쓴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김만중이 노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노도에는 오래 전부터 '노자묵고할배' 등 관련 설화와 허묘. 초옥 등으로 전하는 유적도 남아 전해 신빙성을 떠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도에는 김만중이 유배를 오기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문중이 이전에 노도에 정착했다는 전언도 있고, 노로 만들기 적합한 나무가 많아 이름이 '노도'가 되었다는 지명 전설을 보더라도 설득력을 지닌다. 사람이 살고 난 이후부터 노도는 작은 섬이지만, 앵강만의 길목을 지키면서 밭을 갈고 고기를 잡으면서 주민들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  한때 노도에는 상주한 주민이 150여 명을 넘었고, 지금은 폐교한 노도분교에도 4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 배움의 터전을 일구었다. 그러나 이번 세기에 들어 남해군 전체가 그런 것처럼 인구는 급속도로 줄었고, 주민 역시 20명을 넘기기가 버거워졌다. 젊은 사람은 떠나면 돌아오지 않아 주민 대부분이 초고령층을 차지..

2024남해문화원25.09.2490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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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방언사전(보도자료)

◈ 남해방언사전 ◈ 이 세상에서 흔하고도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기와 물, 그리고 햇볕일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든 생물이 목숨을 이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이 세 가지 외에도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공기와 물 등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말은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인류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그 말로 문화를 만들고 가꾸며 살고 있다. 그러니 특정 지역의 사람들은 특정 지역의 말로 문화를 만들고 가꾸며 살게 된다. 이런 관계를 고려하면 남해 사람들은 남해 방언으로 남해 문화를 만들고 가꾸어 온 셈이다. 남해는 경남의 특정 지역이다. 지난날에는 유배지라는 특성도 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섬이라는 특성에다가 행정구역이 전남과 인접한 지역이라는 특성도 있어 남해 방언은 서부 경남 다른 지역의 말과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현장 조사를 하면서 알 게 된 것은 남해라는 한정된 지역 안에서도 서면이나 남면에서는 호남지역의 방언이, 창선에서는 진주지역 방언이 발견되기도 했고, 동일지역에서도 나이나 성별, 학력..

2023남해문화원25.07.01185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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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사연구(지역N문화)

◈ 화전사연구 ◈ 1. 김구는 어떤 인물인가 조선조 성종 19년(서기 1488년)에 나서 중종 29년(서기 1534년)까지 46세를 일기로 살다간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이름난 서예가, 현감 계문의 아들로 자는 대유, 호는 자암, 시호는 문의공이다. 본관은 광산. 서기 1507년(중종2년)에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1511년(중종6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를 거쳐 1515년(중종10년) 부수찬에 올랐다. 1519년(중종14년) 부제학에 오르면서 선정을 시도했지만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과 같이 투옥되어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우리고장 남해에 안치되었다. 지금의 노량에 죽림서원을 짓고 인근 각자의 후학들을 모아 가르쳤다고 전하나 서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그 위치조차 알 길이 없다. 서기 1531년(중종26년)에 임피로 양이(죄를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것) 되었다가 서기 1533년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인 예산에 올라갔으나 이듬해인 서기 1534년(중종29년) 46세로 병사했다. 글씨에 뛰어나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한석봉)와 더불어 조선조 초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으며 서울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한다. 선조때 이조참판에 추종되고 충남 예산의 덕잠서원과 임피의 봉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자암집, 작품에 이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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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항일독립운동(보도자료)

◈ 남해항일독립운동 ◈ 남해군이 일제강점기 때 군내는 물론 국내외에서 남해 사람들이 벌인 독립운동 전반을 조사, 연구해 올바른 지역사를 정립하라며 남해문화원에 용역을 의뢰한 결과물이다. 이에 따라, 남해문화원 산하 남해향토사 연구소는 박성석 연구소장을 위원장으로 김정일 위원(정임춘 지사 유족), 추호석 위원(향토사학자, 진주문화원 연구실장), 남해역사교사모임(대표교사 권성계, 남해고 역사교사), 한관호 위원(문화체육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집필진을 꾸리고 김제정 경상국립대 교수가 감수를 맡아 조사, 연구를 진행했다. 집필위원회는 이번 조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첫째, 국가 차원에서 공인한 자로를 최우선 근거로 하며 둘째, 어느 것에든 치우침이 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하며 셋째, 자료조사라 할지라도 이는 남해 근현대사의 역사적 근거가 되는 일이므로 엄중한 역사인식과 막중한 책임감으로 조사, 연구에 임했다. 또한, 집필위원회는 지난 2003년 남해군과 향토사 바로알기 모임(회장 김우영)에서 퍼낸 '남해군의 항일 운동'을 참조했다. 이번 사업을 통해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중요한 향토사를 발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구체적으로는 - 독립운동에 힘쓴 미 포상자 56명 발굴 - 남해 국채보상운동 발굴 - 남해 의병사 발굴 - 교원 ..

2021남해문화원25.05.01116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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