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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판각성지

내용
팔만대장경 판각성지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개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당시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던 대장경이 불타 소실됨에 따라 고종 때 무신정권을 중심으로 판각된 것이다. 이 경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된 국보 제32호를 말한다. 이 경판은 학자들의 연구결과마다 명칭이 달라서 문화재청에도 여러 형태의 명칭으로 불리어질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팔만대장경이라고 정리 한다.

팔만대장경이라 함은 불교에서 말하는 세 형태를 포함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경(經)이라 하고 부처님을 따르는 불자들이 지켜야할 계율을 율(律)이라 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고승들이 번역한 것을 론(論)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합하여 삼장이라고 하며 삼장에 능통한 스님을 삼장법사라고 한다. 원래의 원음은 트리피타가(Tripitaka)이다. 팔만대장경은 경·율·론을 포함한 것으로 불경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팔만대장경판은 불경을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는 불경 인쇄판이다. 고려는 전 세계적으로 방대하고 오자를 찾기 어려운 불경 인쇄기술의 첨단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판각한 후 772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벌레의 피해나 판자의 뒤틀림, 갈라짐이 없이 온전히 보관되고 있고 오탈자를 교정하여 완전한 상태를 전 세계가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과 관련하여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국보 제52호인 해인사 대장경 판전은 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자연)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2007년 6월 해인사에 보관중인 국보 제32호와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대장경판을 통합하여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이란 이름으로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록되었다.

 

▶ 팔만대장경 판각의 목적

 

(1) 무신정권 유지차원의 전략적 목적

1231년 몽골의 침략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대장경판(초조대장경, 교장경)이 소실되었다. 몽골과의 강화는 이루어졌으나 이는 고려국에서 진행된 전쟁인 만큼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신 저고여(著古與)를 살해하여 몽골의 문책이 있었고 1232년 철례탑(撤禮塔)을 포함한 72명이 주둔하고 돌아갔다.

몽골의 침략으로 무신정권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를 맞자 대몽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다. 고려정부를 강화도로 이전하였다는 것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전을 의미한다.

무신정권은 수습차원에서 대몽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했다는 명분은 설득력을 잃어 민중의 봉기를 초래했다. 무신정권의 붕괴를 꾀하는 세력의 등장과 불교 종파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무신정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인 수습대책이 필요했다.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 권력자였던 최이(崔怡)와 그의 처남 정안(鄭晏)이 묘책을 수립하였다. 『고려사』권 100, 열전 권 제13 정세유(鄭世裕) 숙첨, 정안(鄭妟)조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숙청의 아들은 안이다. 안의 초명은 분이다. 분은 총명하여 어려서 과거에 급제했다. 음양, 산술, 의약, 음률을 훤히 꿰뚫었다. 진양의 원으로 나갔으나 어머니가 늙어 사임하고 돌아와 하동에서 봉양했다. 그후 최이가 그 재주를 인정하여 왕에게 아뢰어 국자제주를 제수하였다. 정안은 최이를 만나 오로지 권력을 시기하는 자들에 의한 피해를 멀리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을 논의했다. 남해에 거처하면서 부처를 좋아하여 명산승찰을 두루 돌아보면서 사사로움을 버리고 여론을 수렴했다. 국가에 약속한 대장경을 간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불사는 대단히 번거로우며 괴롭고 힘겨운 일이었다.

 

정안과 최이의 독대를 통해서 무신정권의 난국을 극복할 수있는 계책을 논의한 결과, 정안(鄭晏)이 국자재주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대의 내용은 무신정권을 원망하는 세력을 극복하고 욕하고 해하려는 것에 대한 퇴치방법을 논의한 것이며 그 결과 국가가 믿고 대장경판각의 책임을 정안에게 맡기게 되었다. 이러한 판각 결정의 과정으로 미루어볼 때, 판각의 장소는 사사로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남해군을 선정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1236)에 정안에 의해 필사된 것이 묘법연화경이다. 묘법연화경은 정안이 최이와 독대를 하기 위해 직접 필사한 것이다. 당시 무신정권은 선종을 기반으로 세력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종 경판을 필사한 것은 대구 부인사에서 소실된 경판이 교종 경판이기 때문이었다. 

고려국 백성에게 정신세계의 중심이었던 대장경을 잃자 소실된 경판을 토대로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주요내용이 교종 경판이었다는 것은 상황 극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신정권의 정권 유지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독대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대장도감을 설치했으며 최이와 그의 아들 항이 대를 이어가며 대장경 판각 재원을 출원한 사실이 『고려사』권129, 열전 권제42 반역3(叛逆三) 최충헌, 최이, 최항조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최이가 정안에게 국자제주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1241년에는 국자제주인 그에게 동지공거의 벼슬을 겸임하게 한 것은 고려민의 단결을 가져온 대장경판 사업의 결과에 기인한 것이다. 『고려사』권28, 고종 28년(1241)에 기록된 것이나 최항의 정권을 잡음으로 최이의 세력은 숙청 대상임에도 정안에게 참지정사의 벼슬을 하사한 것이 고려사절요에 잘 나타나 있다. 무신정권은 내우외환에 직면하여 정권 유지 차원에서 대장경 판각조성사업을 진행하였다.

 

(2) 고려민의 응집을 위한 목적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목적은 고종 24년(1237)에 때 이규보(李奎報)에 의해 작성된 「대장경판군신기고문(大藏經板君臣祈告文)」이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은 고종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학설의 주요 근거자료이지만 대장경판의 간기에서 왕명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은 앞서 팔만대장경 판각의 조성경위의 연결선상에서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1236년에 대장도감이 설치되고 난 이후에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에서 판각 책임자, 판각 진행할 장소, 제원 조달, 도감 설치 등을 이미 진행한 상태에서 대외 공표용으로 행사가 진행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 핵심은 팔만대장경판각이 왕이 아닌 무신정권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이미 현종 때 대장경을 판각함으로써 거란이 스스로 물러갔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기존 학자들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내용 중 국왕휘(國王諱)를 '국왕 모는' '국왕 휘는' 또는 '국왕 ○○는' '국왕은'으로 번역하거나 훈목재계(熏沐齋戒)를 목욕재계로 번역함으로써 문헌의 요지를 벗어났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장경판 간기 내용의 예로 '고려국(○○왕 ○년, 정유년) 봉칙조'로 기록되어야 하나 실제로 그렇지 못한 것은 왕명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원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국왕휘'는 바로 뒤에 점을 찍어둠으로써 문어체 하나의 문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왕휘를 주어처럼 번역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어와 술어를 포함한 하나의 문장으로써 "왕은 반대하였다." 또는 "왕은 꺼려하였다."라는 뜻으로 반대 입장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기고문에 수록된 '훈목재계(熏沐齋戒)'를 목욕재계(沐浴齋戒)'로 번역하여 왔는데 이는 '국왕휘'를 주어의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빚어지는 문제이다. 왕이 반대하였다는 차원에서 번역하면 훈목재계는 "불기운을 잠재우고 피할 수 있는 방법" 즉 몽골과의 "전란을 막을수 있는 방법"이란 뜻이다.

그 대책이 현종 조에 사찰을 짓고 대장경 판각의 발원을 시작하자 거란이 물러갔기 때문에 몽골이 침입하여 대장경이 소실되었으니 판각을 진행하면 몽골인들이 물러갈 것이란 뜻에서 기원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이번에도 판각을 시도하면 몽골이 물러갈 것이라는 목적에서 팔만대장경의 판각이 시작된 것이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판각이 진행되었음을 알려준다. 대장경 판각은 내우외환으로 어려운 고려의 상황을 최씨 무인정권을 중심으로 고려민을 응집시켜 극복하기 위한 정권의 발원이다.

 

▶ 팔만대장경 판각설

팔만대장경은 을사늑약 이후 1907년부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문화재로서의 다양한 명칭을 부여한 것도 그들이었다.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는 1917년부터 진행되었다.

팔만대장경의 판각지를 명확히 하려면 대장경 판각기관의 문제를 정리해야만 한다.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의 관계와 분사대장도감의 위치는 판각지 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대장경 판각기관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의 이원화 체계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즉, 본사에는 대장도감, 분사에는 분사도감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이 주장은 지난 100년동안 연구가 진행되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이 전제를 토대로 대장경 판각장소 문제가 학술적으로 전개되었지만 판각지가 어디인지 현재까지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대장도감을 설치한 국가기관, 대장경판각의 책임자, 대장경 판각의 기간 산정, 대장경판 숙성과 가공 등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

팔만대장경 판각 성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은 1976년부터 강화도 선원사를 중심으로 2001년까지 진행되었다. 2001년 학술심포지엄이 진행되면서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라는 책자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1245년에 창건된 선원사에서는 판각이 이루어진 장소로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근거를 찾아내지 못함으로 인해 '강화도 판각설'은 그 설득력이 약해졌다.

대장경 연구가 100년 동안 진행되는 과정에서 팔만대장경의 판각 장소가 남해군이라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지만 '강화 판각설'에 밀려, 남해는 대장경 판각의 보조적인 역할로 격하되어 왔다.

박상국(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판각을 담당한 각수를 근거로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해군에서 판각된 것임을 주장하였다. 박상진(경북대 교수)은 경판의 운반 흔적이 없고 경판제작에 사용된 자생하는 나무를 근거로 제시하며 '해인사 판각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경판을 확인한 결과 이운 흔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검증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포장방법과 이운 경로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박상국은 실험의 양면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둘째, 팔만대장경의 판각에 있어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의 관계를 둘로 나누고 이 관계를 상하관계로 설명하면서 대장도감은 분사대장도감보다 크고 상위기관이란 점을 인정하고 있다.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의 관계를 정리한 것은 1917년 김운고가 추정하여 주장한 내용인데, 박상진은 이 주장을 사실처럼 받아들였으나 그 주장에서도 대장도감을 고려의 어느 기관에서 설치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셋째, 대장경판이 판각된 기간의 산정문제이다. 대장경판을 확인한 결과 실제 판각은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 만에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1236년은 준비기간을 포함하고 1251년에 낙성식을 한 것을 포함하여 16년이라 주장하였다. 이것은 대장목록대장경만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지 팔만대장경 전체를 판각한 기간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각수를 근거로 주장하다보니 각수가 너무 강조됨에 따라 불경을 필사한 필사자의 역할이 빠져 버렸다. 대장경판의 간기에 수록된 연도는 불경을 필사하여 대장경 판각을 위해 각수에게 인계된 연도이다. 즉, 그의 주장에 나오는 연도는 필사를 마친 연도이지 판각을 완료한 연도가 아니라, 따라서 각수와 불경 필사자 관계를 명확히 정리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의 주장처럼 대장목록 대장경판만을 근거로 살펴보면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 동안 불경의 필사작업이 끝난 것이지 판각이 완료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간기에 수록된 연도만으로 팔만대장경 판각 기간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 팔만대장경 판각의 성지 남해군

 

(1) 판각기관과 장소의 문제

 1917년 김운고(金雲皐)는 『해인사와 대장경』이란 저술을 통해서 판각기관 문제를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의 이원화체계를 추정하고 전자는 본사, 후자는 분사로 표현하면서 본사의 위치를 강화도, 분사의 위치를 진주와 남해로 추정하였다.

그 주장의 핵심은 판각기관의 이원화와 판각장소의 다원화 체계였으나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측을 주장한 것 뿐이었다.

김운고의 주장 이후, 대장경 판각지에 대한 여러 학설들이 파생되었으나 1917년 김운고가 주장한 판각기관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대장경의 판각은 강화도와 남해군의 이원화체계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1976년부터 강화도 선원사에서 판각했을 것이라는 대세론으로 동국대학을 중심으로 발굴 작업이 25년 동안 진행되었지만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강화도 판각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남해군 판각설'이 위축되어 왔으나 박상국(朴相國)은 판각기관의 이원화체계와 판각장소의 일원화 체계를 토대로 판각을 담당한 각수를 중심으로 남해군이 판각의 성지임을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이와 같은 '남해군 판각설'은 100년 전부터 주장되어 왔으나 보편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과의 문제에 있어 이원화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각수를 중심으로 주장하다보니 장소문제를 제외한 다른 주장 즉 판각의 기간문제는 불경 필사자를 등한시함으로 다소의 문제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정상운(鄭翔云)은 『남해와 팔만대장경』이란 저술을 통해서 판각기관의 이원 체계에 대한 문제점을 발견함으로써 대장도감을 설치한 국가의 기관문제를 정리하여 판각기관의 일원화체계와 판각장소의 일원화체계를 주장하여 남해군이 팔만대장경 판각의 성지임을 문헌적 근거와 유물적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팔만대장경의 구성이 교종경판과 선종경판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감수를 한 책임자도 수기대사와 일연선사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판각기관의 이원화체계는 대장도감은 본사, 분사대장도감은 분사로 대장도감은 분사대장도감보다 큰 기관이며 분사대장도감은 대장도감의 보조 역할정도로 치부한 전제 때문이다. 

판각기관을 정리함에 있어 추정된 이원화 체계가 100년 동안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보편화된 것이 원인이다. 비록 판각기관의 이원화 체계의 틀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판각을 담당한 각수를 남해군임을 밝히는데 사용된 증거는 대장경판 중에서 종경록 제27권 말미의 간기에 판각된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改版)'을 근거로 각수를 등장시켜 새롭게 정리된 것이다.

기존의 학계에서는 이 경판이 남해군이 일부의 경판을 판각한 유일한 증거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판각기관의 문제를 대장도감으로 일원화된 체계를 통해 기존에 인용된 문헌을 살펴보면 남해군이 팔만대장경의 판각성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문헌적 근거

남해군이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성지임을 증명하는 내용이 대장경판에 판각되어 있다. 종경록 제27권 말미의 간기에 판각된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改版)'은 대장도감을 설치한 장소를 포함하여 판각한 것으로 8만장이 넘는 경판 중에 지명이 표기된 유일한 것이다. 간기의 뜻은 고려국 분사정부에서 대장도감을 남해군에 설치하고 판각했다는 것으로 이 경판은 대장도감을 남해군에 설치했다는 명확한 증거자료이다.

또 다른 증거는 고려사 권 100 열전 권 제13 정세유(鄭世裕) 숙첨 정안(鄭晏)조에 기록된 '거남해호불유편명산승찰사사자여(居南海好佛遊遍名山勝捨私資與)'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판각을 담당한 책임자를 정안(鄭晏)으로 선정하고 명산 승찰을 두루 살펴 불사에 심취할 장소를 남해로 선정한 것이 무신정권의 최이(崔怡)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판각지로 남해군이 선택된 것은 무신정권의 수장인 최이(崔怡)나 그 처남 정안(鄭晏)의 식읍지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측면에 무게를 두어 주장해 왔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해서 그 장소를 선택한 것은 명산승찰을 두루 살펴 사심 없이 여론을 수렴하여 선택된 곳이 남해군임을 고려사 권 100의 정안부분에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남해군이 불교의 성지였음을 고려시대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동국이상국집』의 발문 또한 남해군에서 대장경을 판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자료이다.

상기의 내용 중에 '금자분사도감조해장고필지가봉칙루판여달수비군()'이란 것은 지금 분사정부에서 도감을 남해군에 설치하여 대장경 조판 사업이 거의 끝나가고 한가한 시점에 칙명으로 판각하게 되었다. 인근의 군(하동군)에서 작은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다.

여기서 금자분사도감이라() 이라 판각된 것은 실제로 분사도감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분사대장도감의 생략기법으로 기록하고 판각한 것이며 조해장고필지가()에 기록된 해(海)는 남해군을 나타내는 지명의 생략기법으로써 남해군이 팔만대장경의 판각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팔만대장경 중에서 선종경판에 해당되는 보유목록 대장경과 연관된 것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선사이다. 일연선사의 보각국사 비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에 있으며 보물 재428호로 지정되어있는데 2006년 전해지고 있던 비첩을 토대로 복원되었다.

비문의 내용에 '기유정상국안사남해사제위사왈정림청사주지()'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 번역하면 "기유년(1249)에 정안이 남해에 사제로 지은 정림사로 선사를 초청하여 임무를 맡겼다."라는 뜻이다. 교종대장경을 감수한 대장목록 대장경을 감수한 수기대사가 1248년에 임무를 종결하고 난 이후로 일연선사는 선종대장경판을 판각하기 위해서 정안이 남해군으로 초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 남해군의 판각 추정지

1993년 박상국은 논문에서 판각기관의 이원화 체제를 축으로 남해군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을 위해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였던 장소가 밝혀지기를 희망하였고, 당시 남해문화원 정의연 사무국장은 남해판각설의 추정위치를 지명과 연관지어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1994년 불교방송학술조사단의 활동은 문화원의 향토사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하여 「분사남해도감관련 기초조사보고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몇문이 새겨진 기와 등을 찾아내고 고려시대의 흔적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남해고현(대국)산성 지표조사 보고서」가 작성되었고, 1997년에는 남해군과 남해문화원 공동으로 「고려대장경판 판각의 진실」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진행되었다.

2000년 10월에는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해군 고현면 정밀지표조사보고(분사남해대장도감 유지확인 기초조사)」에 보고된 유물 중에서 팔만대장경 판각과 연관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숫돌이다.

이 작은 숫돌은 조각할 때 U자형 조각칼의 날을 세울 때 사용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야는 학술적으로 입증할 수 없고 경험으로 얻어지는 결과로 대장경 판각과 연관된 중요한 자료이며 팔만대장경 판각성지 부각의 단초임은 틀림없다.

같은 해 12월 남해문화원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남해사람들의 모임"에서 「팔만대장경의 흔적을 찾아」라는 토론의 장에서 정상운은 「남해분사도감의 대장경 판각장소에 이해」라는 주제 발표가 있었다. 2001년에는 남해군의 지원으로 정상운의 저서 「지명연구로 찾아낸 고려대장경 판각의 흔적」이 발행되었다.

2006년에는 2000년 진행된 지표조사에서 찾아낸 굿돌의 발견 지점을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진행한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남해 관당성지 발굴보고서」가 만들어졌다.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의 유허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되었으나 경지정리로 훼손상태가 심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관(官)자의 명문 기와가 발견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흔적을 찾지 못해 이 발굴지가 팔만대장경 판각의 성지로 결론 내리기는 미흡했다.

고려시대의 남해군 고현면 관음포만은 현재의 농공단지일대까지 바다였다. 몽골과의 전쟁중에 진행되는 국가적 사업인 만큼 관음포만으로 약 1.5km 배를 타고 들어와도 판각지를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고 왜구가 강진만을 넘어와도 관측이 불가능한 요새화된 지형이었다.

요새화된 지형을 토대로 지명을 찾아보면 목재를 숙성한 장소, 판각 진행 상태를 확인하는 기관의 위치, 판각이 진행되는 동안 보호를 위한 군사시설의 위치 등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판각지를 보호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의 사진이 발견되기도 했다.

팔만대장경은 2007년 6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그 판각의 성지는 학술적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남해군이 판각의 성지였다는 문헌적, 향토사적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어 단계별로 구분되는 지명을 바탕으로 고고학적 작업의 진행이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남해군에서는 불교의 순례성지로 문화적 가치 창출을 위한 노력을 학계,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