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고려시대
경렬공 정지장군과 관음포대첩
상세내용
▶ 경렬공 정지장군과 관음포대첩
고려의 영웅 경렬공 정지장군과 조선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같은 곳에서 같은 방법으로 대승첩을 이루었다. 정지장군은 1383년 5월에 관음포에서 승첩하였고 이순신장군도 1598년 11월에 노량해전에서 승펍하였다.
정지장군은 전쟁을 시작힉 전에 지리산신사에 빌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 일거에 있으니 바라옵건대 나를 도와 신(神)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였고, 이순신장군도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승첩 후 정지장군은 "내가 일찍이 말을 몰아 적을 많이 파하였으나 오늘과 같이 쾌한 적은 없었다"라고 하였고 이순신장군은 순국하면서 유언하기를 "전쟁이 바야흐로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정지와 이순신장군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걱정뿐이었고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심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호국정신을 선양하는 것이 후세들의 의무이다.
▶ 정지장군의 생애
정지장군의 조부인 금성군 정성(鄭盛)은 1285년에 하동에서 출생하여 30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화성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시작으로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대까지 관직에서 물러난 정성은 풍수지리에 능했다. 국가와 후손을 위해서 정성은 명당을 찾기로 마음을 작정하고 주류천하 하다가 명당인 나주시 죽곡마을을 찾게 되었고 다음해인 1346년에 가솔을 데리고 하동에서 나주 죽곡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 정성은 터를 마련하고 가솔과 같이 살면서 63세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녕과 대를 이을 손자가 태어나길 손꼽아 기다리면서 백일동안 빌었다. 백일째 되던 날 며느리 강씨에게 태기가 있었고 충목왕 3년(1347) 8월에 정지 장군이 탄생하였다. 조부인 정성은 장군이 6세 때인 공민왕 1년(1352) 68세로 사망하였다.
정지장군의 처음 이른은 준제(准提)였다. 준제는 공민왕 8년(1359) 13세때 황소를 맨손으로 때려 눕혔다. 18세 때는 밀양 박씨 박춘(만호, 종4품)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해 사마시(司馬試) 합격하였다.
19세 때인 공민왕 14년(1369)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교지를 받고 금오위 소속 속고치가 되었다. 공민왕 22년(1373) 속고치 근무 7년째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지로 이름을 바꾼 28세 때인 공민왕 23년(1374)에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전라도 안무사로 발탁되어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 정4품)를 겸하면서 양광도(충청도와 경기도 일부를 포함) 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차례 왜구를 물리칠 수 있는 방왜책(防倭策)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정지장군은 "내륙에 있는 백성은 배에 익숙하지 못하니 섬에서 자란 자 또는 수전을 자청하는 자들을 모아 자신에게 거느리게 하면 5년 이내로 바다의 적을 모조리 다 없애겠다"라고 하였다. 그는 지략이 뛰어나 왜구 토벌에 관하여 일찍부터 방략을 연구하여 왔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전략의 효율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정지는 소년시절부터 영산강 주변에서 살았기 때문에 물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소년시절 물에 빠진 친구들을 구하기도 하였고 조부의 가르침도 있었다. 그리고 관직 수행도 대부분 해군과 관련되었기에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왜구 방비책을 자신있게 왕에게 건의하였다. 장군이 실전에 강한 것은 이와 같은 기초가 튼튼하였기 때문이다.
우왕 3년(1377)에 예의판서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검단산성(여수반도와 순천 연결지역)에서 왜구 물리쳤으며, 이듬해 영광, 광주, 동복 등지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말 1백필을 획득하였고, 담양현 전투에서 왜구를 무찔러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우왕 5년(1379) 순천, 조양, 진원 등에 침범한 왜구에게 처음으로 패배했지만 이듬해 광주, 능성, 화순에서 연합군과 함께 승리하였다. 진포대첩에서는 최무선이 화포, 화통 등 화약무기를 재조하여 처음으로 사용하여 정박된 왜선을 격침시켰다. 그러나 정지장군은 배극렴(裵克廉)과 함께 사근내역(沙斤乃驛 : 현 함양군 수동)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 해 이성계의 황산대첩에 참가하여 승리하는 데 공헌하였다.
정지장군은 우왕 8년(1382)에 해도원수가 되어 수군을 지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왜구를 소탕하는 전공을 세웠다. 동년 10월에는 왜선 50척이 진포에 들어오므로 정지장군은 그것을 격파시키고 군산도(群山島)까지 추격하여 4척을 포획하였다.
이듬해인 우왕 9년(1383) 진도에서 왜선 70여 척을 불태웠으며, 5월에 47척의 전함으로 나주, 목포를 경비하고 있다가 합포(현, 마산)원수 유만수(柳蔓殊)가 정지에게 위급함을 고하므로 출동하여 남해 관음포에서 왜적의 대함선 120척 중 17척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최무선의 화포, 화통을 움직이는 해상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왜구 소탕에 많은 전공을 세우고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해도도원수,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가 되었다.
우왕 10년(1384)에 전라도원수 겸 도순문사에 임명되어 전주목 변산 전함 건조지역에 가서 감도하고 지시를 내리고, 문하평리(종2품)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써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와 일파도(壹坡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우왕 12년(1386)에는 사도도지휘처치사로 임명되어 일본 정벌 계획을 위해 경상도로 갔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정벌을 자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원은 창왕 1년(1389)에 경상도 도원수 박위(朴葳)장군에 의하여 이루어져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하여 적선 300여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창왕 원년에 김저(金佇) 옥사가 있었는데 김저는 최영장군의 생질로 폐왕인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암살하고 고려조의 재건을 계획하였다. 장군은 이 사건에 연류되어 계림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횡천으로 이배되었으나 곧 무혐의로 풀려나 위화도화군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다.
또 공양왕 2년(1390)에는 이초(彛初)의 옥사에도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또 석방되었다. 이 두 사건은 고려 말 이성계파의 정권획득 과정에서 권신제거운동의 하나였다. 이듬해인 공양왕 3년(1391)에 정지장군은 판개성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0월 15일 병사하였다. 향년 45세의 젊고 위대한 장군으로 정권의 다툼 속에서 옥중의 여독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
▶ 남해 관음포대첩
우왕 9년(1383) 5월에 정지는 해도원수로 나주, 목포를 경비하고 있었다. 그 때 경상도 지여거에 왜적의 대함선 120척이 쳐들어오자 합포원수 유만수(柳曼殊)가 정지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정지장군은 47척의 전함을 끌고 밤새 달려와 섬진강 입구에 이르러 합포의 사졸을 징집할 때 왜적은 이미 남해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다. 마침 비가 내리자 화포를 사용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사람을 보내어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에 빌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 일거에 있으니 바라건대 나를 도와 신(神)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니 비가 멈추었다.
관음포에서 적의 선봉 함대에 맹공격을 하여 무찌르니 물에 뜬 적의 시체는 바다를 덮었다. 또 남은 적을 활로 쏘아 거꾸러뜨리고 다시 쳐부수며 화포를 발하여 적선 17척을 불살라버렸다. 정지장군의 전승으로 왜구들은 이때부터 고려에 감히 쳐들어 올 생각을 하지 못하였고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와 화약을 이곳 관음포만에서 두 번째로 사용하였기에 의미가 깊다. 왜구들의 약탈과 우리나라를 엿볼 수 없도록 고려 말의 수난기를 끝맺음한 곳이 바로 정지장군의 남해 관음포대첩이다.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관음포대첩에 관한 기록은 권 32신우 9년 5월조에 있다.
해도 원수 정지가 남해현(南海縣)에서 왜적을 쳐서 크게 파하였다. 이때에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이었는데, 나주와 목포에 머물러 있었다. 적선 1백 20척이 크게 이르자, 경상도 바닷가의 고을들이 매우 동요하였다. 합포 원수 유만수(柳曼殊)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정지가 밤낮으로 배 몰기를 독려하여 손수 노를 젓기도 하니, 노 젓는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애 도착하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대단히 성하여 사면으로 둘러싸고 진진하였다. 정지가 군사를 독려하여 니가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20척마다 강한군사 1백 40명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크게 깨뜨려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병마사 윤송(尹松)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