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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고려시대

고려말 수난기

내용
고려말 수난기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고려말 수난기

고려말엽 남해의 수난은 왜구에 의한 것이었다. 왜구는 신라시대부터 출몰하였지만 고려말에 극성하였다. 왜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절요』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년(高宗安孝大王二) 계미 10년(1223) 조에 "왜(倭)가 금주(金州 : 경남 김해)에 침입하였다는 내용이다.

경상도 지방부터 노략질하기 시작한 왜구는 고려말에 이르러 공민왕 때에는 강화도까지 약탈하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왜구로 인해 해상의 조운이 끊기자 정부의 재정이 빈약해졌고 연해의 농어민들은 약탈로 인해 살아가기 힘들게 되었다.

남해가 왜구의 침탈을 당한 것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충정왕 3년(1351) 11월이다. 1350년 2월 고성과 거제에 들어온 왜구는 다음해 8월 삼목도를 거쳐 11월 남해를 침입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진주진관지』에 의하면 경인년(1350)에 왜구의 침탈을 받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 된 정확한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극식한 왜구의 침탈로 공민왕 6년(1357)에는 행정관서를 진주 임내 대야천부곡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1383년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적량 등지에서 왜구를 소탕하여 궤멸시킴으로써 남해는 왜구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 남해현 건치연혁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에는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현령을 두었던 곳이나, 공민왕 때에 왜적에게 땅을 빼앗기고,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우접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하동과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라 일컫다가 뒤에 다시 하동현을 설치하고, 진주의 금양부곡을 내속시켜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안되어 금양을 진주에 환속하고 다시 남해라 하였으며, 세종조에는 곤명헌과 합쳤다가 다시 쪼개고 그대로 현령을 두었다. 전하 4년에 현 사람이 구례(求禮) 백성 배목인(裵目仁)과 서로 연결해서 모반했으므로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신증독국여지승람』 경상도 남해현 성곽

읍성 석축인데, 둘레는 2천 8백 76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 안에 우물 하나, 샘 하나가 있는데 사시로 마르지 않는다. 정이오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거제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서, 경인년부터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여, 붙들려 가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하여 군의 속헌인 평산·난포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정유년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 선천(鐥川)의 들판에 거처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도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부세도 바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판도에 기재된 재물과 부세가 나오는 곳이, 모두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로 되어버렸고, 왜구들의 소굴이 된 지가 46년이었다. 그러나 계모가 있는 신하와 지략이 있는 장수의 빈틈없는 책략으로 선함을 수리하여 수전에 대비하고, 성과 해자를 설치하여서 수비를 엄하게 하니, 왜적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쇠하여졌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우수 임덕수(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 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후가 와서는 계획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어서,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민폐를 없애니, 군무가 정비되고 민사 또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역이 좁고 험하여서 백성들이 옛날에 살던 곳을 생각하였다. 후가 이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최유경(崔有慶)공에게 사유를 갖추어서 조정에 알리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웃 고을, 하동·사천·명주·고성·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 섬 복판에 성을 쌓았는데, 돌로 포개어 견고하게 하고 해자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2월에 일을 시작해서 3월에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죄다 돌아와서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기고 화락하였다. 물고기·소금·벼·따위 이익이 장차 지난날의 부유함을 회복하리니, 이에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처하였다. 내 생각하니, 왕(王)이나 공(公)이 요해지를 방비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은 <주역>의 가르침이요,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죽기를 기약하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북방에 성을 쌓으니, 험윤(玁玧)의 난(難)이 없어지고, 정(鄭) 나라에서 호뇌에 성을 쌓으니 초인으로 인한 걱정이 없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바닷가 고을에 성을 쌓으니 왜구의 침해가 그치게 되었다. 대개 성보로 지키면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며, 편한 것으로써 수고하는 것을 대적할 수 있게 된다. 하물며 이 고을은 남방의 훌륭한 지역으로써, 해산물의 풍족함과 토산물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꼭 필요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바다에는 쓸만한 수군이 있고, 성곽에는 지킬 수 있는 누(樓)와 순(楯)이 있으며, 주야로 조심하는 봉수가 있으나, 흉악한 적을 방어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딴 섬, 외로운 성에 외방의 구원이 없다 하여,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눕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나는 장차 돛대를 두드리며 남해 터를 죄다 찾아다니고, 성루의 난간 위에서 술을 들며 국가에서 인재를 얻었음을 경하 하리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