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대표유적
상세내용
▶ 도요지
남해와 창선은 가마터의 입지가 바다를 끼고 있어 자기를 생산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2004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남해 전 지역을 지표조사하여 『남해군문화유적분포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토기와 와(瓦), 자기 등을 생산하던 10기의 가마터를 확인하였고 그 가운데 도요지 6기를 발견하였다.
도요지는 도자기 제작기술에 관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생산과 수요에 따른 결제활동 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당시의 사회, 경제, 문화를 해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남해군에 자기 유적이 많았을 것으로 판단한 남해군에서는 2005년에 경남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고현면과 창선면에 위치하고 있는 자기 도요지를 집중적으로 정밀조사하였다.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문헌조사, 현지 정밀조사, 탐문조사를 병행한 결과, 확인된 남해군 도요지의 현황은 아래와 같다.
○ 남해군의 도요지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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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 |
조사지역 |
유적명 |
추정시기 |
수습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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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고현면 |
대곡리 자기요지1 |
조선(16세기) |
분청자, 백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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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고현면 |
대곡리 자기요지2 |
조선(16~17세기) |
분청자, 백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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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서 면 |
현촌리 자기요지 |
조선(16~17세기) |
분청자, 백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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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고현면 |
이어리 청자요지 |
고려(11~12세기) |
청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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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서 면 |
불부골 자기요지 |
조선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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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고현면 |
달실 옹기요지 |
조선(18~19세기) |
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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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창선면 |
물뫼 도기요지 |
근대(20세기) |
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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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창선면 |
큰독개골 도기요지 |
고려(추정) |
(시유)도기, 가마벽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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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창선면 |
서대 자기산포지 |
고련·조선 |
청자, 백자, 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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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창선면 |
신흥리 자기산포지 |
조선 |
분청자, 백자, 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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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창선면 |
독망골 청자요지 |
고려(11~12세기) |
청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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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창선면 |
부윤2리 자기산포지 |
고려 |
청자, (시유)도기, 백자, 가마벽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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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창선면 |
해창 자기산포지 |
조선(19세기) |
백자, 옹기 |
남해군의 도요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형성되었다. 고려시대 도요지는 주로 팔만대장경 판각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11~12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이 시기에 도요지들이 만들어진 이유는 팔만대장경 조판 이전부터 고려의 대장경 조판이 남해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귀족문화의 유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거나 고려의 도자기 산업의 발달에 따라 도자기의 운송에 편리한 남해에 도요지들을 건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창선 도요지 현황
① 물뫼 도기요지(陶器窯地)
물뫼 도기요지는 부윤리 369번지에 위치한다. 창선은 동대만을 사이에 끼고 양분되어 섬이 나누어지는데 창선 동쪽의 아래쪽에 위치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수산리와 상죽리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얕은 구릉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침식평야가 발달하고 있는데 창선의 동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서 가인리나 오룡리에서 동대리나 당항리를 거쳐 사천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유적 주변 일대는 대부분 논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도로를 중심으로 일부 민가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이 위치하는 곳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구릉 일대가 5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고분군과 옹기요가 분포하고 있음이 이미 확인된 지역이다.
고분군이 형성된 구릉의 남동쪽 사면은 과수원으로 개간되었는데 과수원 주변 일대와 과수원 조성시 단을 지워놓은 단애면에서 적갈색 계통의 도기편과 가마벽체 등이 다수 수습되었다. 유적은 과수원으로 개간되면서 이미 상당히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지형적으로 가마는 구릉을 의지하여 조성된 등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근대(20세기) 도기류로 항아리 도기가 대부분이며, 유약이 제대로 녹지 않은 파편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유사한 종류가 집중되어 있지만 형태나 장식 등에 뚜렷한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 형태나 색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은 적갈색계로 구연 외측이 대상으로 돌출되어 있는 구연부 파편과 내면에 회전흔이 강하게 남아있는 평저 파편이 대부분이다. 저부는 중앙에 원공(圓孔)이 뚫려 있는 것이 있어 어업용구의 일종인 문어단지로 추정되는 기종이다. 기존 문어단지의 사례로 보아 높이는 대게 20cm내외이고 입구에 내경은 10cm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되는 유물은 근대 남해 일대의 문어잡이에 사용되었던 기종으로 문어단지만을 단독 번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뫼 도기요지는 가마의 잔존상태를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다량의 유물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가마가 있었다고 추정되며 문어단지가 근대에 들어 사용된 점을 미루어 근대에 들어 조업하였던 가마로 판단된다.
그러나 가마벽체나 요도구 등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마가 이미 훼손되었기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지 아니면 일부 회원부가 파손되면서 도기편만이 보이고 가마는 지하에 온전히 남아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인지 현재 상황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 큰 독개골 도기요지(陶器窯址)
큰 독개골 요지는 창선면 가인리 522번지에 위치한다. 동대만을 사이에 끼고 양분되는 오른쪽 지역의 북쪽 큰독개골이라는 소만의 북동쪽에 접한 구릉에 입지하고 있다.
현재 가마가 확인되는 지역 주변으로 해식애가 발달하여 배가 접안하기 어려운 지역이지만 큰 독개골이 위치하는 소형만은 서쪽으로 여러 배의 접안이 비교적 용이할 것으로 판단되어 이 지역에 가마를 조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큰 독개골이라는 명칭은 대형의 독을 만드는 바다에 접한 골짜기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어 이곳에서는 대형의 독만을 적문적으로 생산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으로 연결되는 구릉은 경사도가 급한 편이라 만에 연한 완만한 구릉의 말단 일부에서 요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요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다량의 가마벽체가 발견되어 이 일대에 가마가 조성되었던 것을 확신할 수 있고 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다면 정확한 가마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간조시 드러난 해안바닥에서 벽체와 도기편이 다량 수습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업 당시 보다 현재의 해수면이 높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수 있고 바다와 인접한 구릉 사면에 위치한 가마가 훼손되면서 지상으로 드러난 도기편과 가마벽체가 경사면을 따라 내려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수습유물로는 (사유)도기와 가마벽체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모두가 도기인데 이중에는 표면에 유약을 얇게 씌운 것도 소수 포함되어 있다. 기종은 호가 대부분으로 무유도기와 시유도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모두 소편들이라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구연과 도박의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소수의 백자편과 조선시대 옹기편도 일부 확인된다. 또한 가마벽체도 수습되어 이곳에서 도기가마가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서대 자기산포지(磁器散布地)
서대 자기산포지는 창선면 서대리에 위치하며 대방산의 북쪽에 해당되며 지족리, 광천리를 지나 사천방향으로 북상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기도 하고 지족으로 열린 포구인 점을 감안하면 이 일대에서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서대마을은 북쪽의 조금산과 남쪽의 대방산 사이에 이루어진 소형의 침식계곡 사이에 형성된 침식평야를 배후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해 있는데 밭과 분묘가 들어서 있어 이미 가마의 상당부분은 훼손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004년 남해군 문화유적분포지도 조사시 수습된 유물 중 분청자는 신흥리 앞바다에서 인양된 자기류와 동종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2005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조사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주변으로 여러 시기의 도편이 섞여 수습된느데 가마벽체나 요도구 등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유물산포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수습유물로는 청자, 백자, 옹기 등으로 고려중기와 조선중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옹기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유물의 수량이 적고 특징이 뚜렷하지 않아 단정할 수 없다. 가마벽체나 요도구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 신흥리 자기산포지(磁器散布地)
지족리 신흥마을 앞 바닷가로 현재 선착장이 있는 곳 주변으로 많은 자기편들이 수습되고 있다. 어로행위 혹은 파도에 의해서 밀려온 유물로 생각되며 근처에는 굴강유적이 확인된다. 이곳은 해안에 암반이 돌출하여 포구가 들어서기 어려운 지역이므로 대개 가마가 교통의 요지에 들어선다는 점을 참고하면 이 일대의 지표조사에서 가마벽체나 요도구의 파편이 전혀 확인되지 않아 가마가 조성되었던 지역으로 보기가 어렵고 신흥리 앞바다가 주요한 연안 항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비교적 부피가 큰 자기나 옹기 등은 반드시 선박을 이용하여 운송하였으므로 불의의 사고로 배가 침몰하면서 선적되어 있던 자기도 바다
아래로 가라 앉아 있다가 어로활동이나 태풍 등으로 발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해역에서 자기가 인양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경상남도와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해저면 탐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덧붙여 둘 것은 앞서 주변유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천 송전리 분청자요지에서 수습된 분청자와 유사한 부분이 있으므로 유무로가의 상관관계와 이동경로 등도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수습유물로는 분청자, 백자, 옹기 등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하며, 분청자는 대접과 접시, 합 등으로 그 중 대접이 주종을 이룬다. 문양은 상감 혹은 인화 장식의 중원문, 삼각원문, 구갑문, 국화문, 초화문 등이 다양하게 확인된다, 기형은 기벽이 사선을 이루며 내저면에 원각이 있는 것과 곡면형 기벽에 원각이 없는 것으로 대벽되며 번조시 포개구이를 위해 3개의 태토비짐을 사용하였다.
유색, 태토, 소성상태 등이 비교적 양호하다. 백자는 조선중기와 후기의 것이 뒤섞여 나타나며 옹기도 확인된다, 특이하게도 파편의 크기가 매우 큰 것들이 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으로 가마터의 지표에서 잘게 부수어진 작은 파편이 발견되는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유물은 대부분이 인화장식으로 15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오룡리 독망골 청자요지(靑磁窯址)
독방골 청자요지는 물뫼 옹기요지를 지나 창선목장 김목관 선정비군 앞에서 보현사(寶玄寺)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00M가량 진입한 곳에 위치한다. 나지막한 언덕 구릉부에 위치하며 현재는 민묘(民墓)가 들어서 있고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룡리와 경계한 곳으로 주변에는 침식평야가 발달하고 있는데 창선의 동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 가인리나 오룡리에서 동대리나 당항리를 거쳐 사천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도편(陶片)은 남사면 일대에 고루 분포하고 있으며 도지미와 가마벽체도 확인된다. 요지의 위치는 골짜기 사이로 추정되지만 현재 진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편의 양이 매우 많고 넓게 분포하고 있는 점이나 요도구인 도지미가 확인되는 점, 구릉의 남사면에 위치한 점 등으로 이 지역 일대에 요지가 위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습유물로는 청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등으로 고려시대(11~12세기) 청자요지 유적이다. 청자의 기종은 발, 대접, 접시, 완, 잔 등 대접과 완의 경우 내저면 중앙에 원각이 있는 것이 많은데 대부분 굽의 직경보다 작으며 일부는 변화되어 크기가 매우 작은 원가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11~12세기의 고려청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접시 중에는 구연부 안쪽에 한 줄의 음각횡선(陰刻橫線)이 있는 예와 구연부가 급격하게 꺽여 외반하는 예는 동일시기의 고려청자에 나타나는 특징이며 굽을 안 밖으로 예리하게 깎은 수법도 동일 시기의 굽 형태로 볼 수 있다.
태토에 작은 모래 알갱이가 섞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대적으로 잡물이 적고 세부의 형태를 정성껏 만든 양질의 것도 일부 나타난다.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편들이 다량으로 수습되는 점과 도지미와 가마벽체 등을 통해 독망골에 가마가 운영되었으며 그 운영 시기는 고려중기 (11~12세기)였음을 알 수 있다.
▶ 부윤2리 자기산포지(磁器散布地)
유적은 창선면사무소에서 물뫼 도기요지 방향으로 진행하다 죽산마을(대산골마을)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00m가량 진입하면 방파제가 나오는데 방파제를 따라 가면 좌측 계곡부에 위치한다. 계곡부는 이미 밭과 논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남쪽 사면은 도로개설공사로 인해 깍여 나간 상태였다.
유적은 구도성(龜島城)과 마주보는 해안가로 창선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주변에 해식애가 발달하여 배를 접안하기 어려운 지형이지만 자기 산포지가 위치한 곳은 약간 만입하는 지형이며 외해의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여 주기 때문에 포구가 들억서기에 최적의 지형적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요지가 산림과 태도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산된 자기를 운송로를 확보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므로 그런 점에서 남해는 가마를 조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계곡면에서는 소량의 청자, 도기, 백자편들이 확인되었고 가마벽체도 소량 수습되었다. 요지 추정지는 해안가와 바로 접하고 있는데 물이 빠진 해안가에서 분청자편과 백자편도 일부 수습되었다. 도편의 양이 적어서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낮은 구릉의 사면과 해안가와 바로 접하는 위치적 특성으로 요지가 위치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지만 도로개설과 경작지 조성으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습유물로는 청자, (시유)도기, 백자, 가마벽체 등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지만 수량은 적다. 이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청자이다. 청자는 무문(無文)청자편들과 상감(象嵌)청자편들이 확인된다. 대부분 태토가 정선되어 있으며 무문청자의 경우 음각횡선이 있는 접시편이 있고 나머지 편들은 기형을 추정하기 불가능하다. 상감청자는 내저면에 이중권문(二重圈文)을 상감한 저부편과 내저에 원각이 있고 내벽에 이중권문을 상감한 편도 확인된다. 백자는 저부편 몇 점과 도기의 동체 일부가 확인된다.
(사유)도기도 소수 발견되었는데 구연부 파편 등에서 고려도기의 특징이 보이기도 하지만 수량이 적어 구체적인 특징을 밝히기 어렵다. 가마벽체는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수습된 슬래 그들은 유약이 뭉쳐져 검은색을 띤다. 또한 도지미로 추정되는 것도 수습되어 일대에 요지가 위치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요지 추정지 앞에 맞닿은 해안가에서는 분청자, 도기, 백자편들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최근에 사용하여 폐기한 자기, 옹기편들도 함께 분포하여 요지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방파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요지 추정지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을 것이므로 바닷가에 산재한 도편들과 요지의 상관관계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 해창 자기산포지(磁器散布地)
창선도의 남쪽 해안 당저2리 해창골에 위치하고 있다. 내피산과 이어진 작은 구릉 사면에 위치하나 현재는 대부분이 밭으로 경작되어 원지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해창이란 명칭은 고려시대 창선도의 각종 조세와 특산품을 모아 서울까지 해로로 운송하였는데 이때 거둔 각종 조세와 특산품을 보관하던 창고를 해창이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낮은 구릉 사면과 해안가와 바로 접하는 위치적 특성으로 요지가 위치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지만 경작지 조성으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습유물은 백자, 옹기 등인데 조선시대(19세기) 것으로 보이며, 백자는 양질의 흙으로 사용하였고 대체로 두께가 두껍다. 굽 안 바닥이 깊게 깎여 있는데 이것은 19세기 백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외에도 소수의 옹기가 수습되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백토덩어리들이 수습되고 있고 동일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편이 집중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가마벽체나 요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 도토(陶土)채굴지
지족 해안에 인접한 이소영(李小永)씨 집 옆에 "백토구덕"이라는 곳이 있따. 이곳은 도로에 연접하여 높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교통사고 다발지역으로 골몰하다가 국도 3호선 확포장으로 매몰되어 원형은 없어졌다. 지족리 장재두(張在斗)의 증언에 의하면, 그 곳 토지의 지주가 일본인 황철(黃鐵)의 소유로 등록 되어 있었고 백토를 일본으로(일제강점기) 실어간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 백토구덕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모르나 부근 지형이나 채굴 흔적을 보아 몇 백 년은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