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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고려시대

고려시대 유배인물

내용
고려시대 유배인물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고려시대 유배인물

 

성 명

생물연도

유배(은둔)기간

주요 관직

유배이유

왕 진

미상

1072~남해 사망

평양공 기의 아들

문종 폐위, 평양공 옹립

최세보

?~1193

1167~1170

수태사

유시의 변

정세유

미상

1194~?

미상

부정부패, 역모

정숙첨

미상

1194~?

평장사

부친 정세유 역모 연루

주연지

?~1228

1227~남해 사망

 

희종복위사건

송군비

미상

1270~남해 사망

추밀원부사

임연모반사건

백이정

1260~1340

1339~남해 사망

상당군

심양왕 고 옹립

 

남해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등과 함께 중요한 유배지였다. 고려시대 남해로 유배온 사람은 6명이 밝혀졌으며 유배인지 은둔인지 명확하지 않은 백이정 선생을 포함하면 7명이다. 남해에 유배온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범들이지만 현령의 관리 아래 남해섬 안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백이정 선생은 난포현이 자리잡고 있던 지금의 난음리 난곡사에 배향되어 있다.

 

1) 왕진(王進 · ?~?)

처음 남해로 유배온 사람은 평양공 기(基)의 아들 왕진이다. 문종 26년(1072)왕을 폐하고 현종의 넷째 아들 평양공 기를 옹립하려 했지만 기의 죽음과 병사 장선의 고발로 역모는 무산되었다. 역모를 꾀한 신하들과 가족은 주살되고 왕진은 남해로 유배되었다.

 

고려사절요 제5권 문종 인효대왕 2(文宗仁孝大王二) 임자 26년(1072)

가을 7월에 병사 장선(張善)이 고변하기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그 도당 천여 명과 더불어 왕을 폐위시키고 왕제(王弟) 평양공(平壤公) 기(基)를 세우고 꾀하고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잡아다가 거신은 처형하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이며, 기는 이미 죽었으므로 기의 아들 진(璡)은 남해현(南海縣 경남 사천군)에, 정(珵)은 안동부(安東府 경북 경주)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뒤에 모두 죽였고, 막내 아들 영(瑛)은 어리므로 죽음을 면하였다.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선의 형제와 자손에게도 각각 벼슬 1급을 내려주었다. 윤달에 평장사 왕무숭을 안동부에,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와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는 곡주(谷州 황해 곡산)에 내쳤는데, 역시 거신의 역모에 관련된 때문이었다. 

 

2) 최세보(崔世輔 · ?~1193)

유시의 변으로 유배된 최세보는 정1품 수태사에까지 올랐으며 무신들이 국사를 의논하는 증방의 실세이기도 했다. 그는 의종 21년(1167) 유배되었으나 명종 원년(1171) 정중부의 무신 집권으로 방면되어 상장군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 했으나 아들 최비(崔斐)의 간통사건과 이의민이 실권하고 최충헌이 집권함으로써 명종 21년(1191) 두 번째 남해 유배길에 올랐다.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해 21년(1167)

연등(燃燈)하는 날, 왕이 봉은사로 갔다가 밤에 돌아와 관풍루에 이르렀을 때,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의 말(馬)이 본래 갚이 잘 들지 않는데다 징(鉦)과 북소리에 더욱 놀라 한 기사(騎士)의 시방(矢房 화살통)을 들이받아서 화살이 튀어나와 왕이 탄 가마 옆에 떨어졌는데, 돈중이 이 일을 자수하지 않았다. 왕이 깜짝 놀라 유시(流矢)가 날아온 것으로 오인하고, 빨리 달려 궁으로 돌아와서 궁성에 계엄(戒嚴)을 폈다.

유사에 명하여 저잣거리에 방(傍)을 걸기를 "활을 쏜 적을 고하는 자가 있으며, 유무직(有無職)을 막론하고 동반(東班)의 정랑과 서반의 장군직을 소원에 따라 제수할 것이고, 공사(公私)의 천례(賤隷)도 또한 관직에 참여를 허락할 것이며, 아울러 은 2백 근을 줄 것이다. 여자일 경우는 은 3백 근을 준다."하였다. 잡지 못할까 염려하여, 황금 15근과 은병(銀甁) 2백 개를 거리에 달아 두고 적을 잡게 하였다. 이로부터 용력 있는 자를 뽑아서 내순검(內巡檢)이라 부르고, 두 번(番)으로 나누어 언제나 자색옷을 입고서 활과 검을 가지고 의장(儀仗) 밖에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비와 눈도 피하지 않고, 밤이면 새벽까지 순찰하고 경계하였다.

왕이 적을 잡지 못한다고 조서를 내려 재산과 추신을 힐책하니, 체포된 자가 연달았다. 대령후 경(暻)의 가동 나언 · 유성 · 황익 등에게 혐의를 두고 심하게 국문하니, 나언 등이 허위 자백을 하였다. 여러 왕씨와 재신·추신·백관·기로(耆老)들이 대궐로 나아가 죄인의 체포를 하례하고, 나언·유성·황익 및 유성의 처(妻)를 참수형에 처하였다. 또 임금의 호위를 신중히 하지 않았다 하여, 견룡(牽龍 임금의 시위와 궁궐의 호위를 맡았던 군대)·지유(指諭 무관직)에서 14명을 시골로 귀양보냈다.

 

3) 정셍유(鄭世裕 · ?~?)

정세유는 반역을 꾀하다 이금대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아들 숙첨과 함께 남해로 유배되었지만 풀려난 연도는 남아 있지 않다.

 

고려사절요 제13권 명종 광효대왕 2(明宗光孝大王二) 갑인 24년(1194)

11월에 전(前) 대정(隊正) 이금대(李金大)가 고하기를. "상서 정세유(鄭世裕)가 반역을 도모합니다."하므로, 세유와 그 아들 윤당(允當)·숙첨(叔瞻)을 남쪽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4)정숙첨(鄭叔瞻 · ?~?)

정숙첨은 최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역모에도 살아남았고 유배에서 풀려나 참지정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세류와 정숙첨은 남해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으로 주도하는 정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하동 정씨 일가는 남해와 같은 인연이 있었다.

 

5) 주연지(周演之 · ?~1228)

점술가였던 주연지는 전왕 희종을 복위시키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빠졌으나 최우의 문객으로 고종 14년(1227) 남해로 유배되는 감형을 받았다. 하지만 주연지의 가택수색 중 희종과 부자의 연을 맹세하는 서약서까지 발견되는 바람에 최우의 분노를 사 바다에 빠져 죽게 하는 참형을 당했다.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정해 14년(1227)

3월에 최우가 전왕을 교동(喬桐)으로 옮기었다. 예전에 삼계현(森溪縣 : 전남 영광) 사람 최산보(崔山甫)가 음양술수에 밝아서 머리를 깎고 본현(本縣)의 금강사(金剛寺) 주지가 되었다. 그의 표질(表姪 외질(外姪), 창정(倉正 향직명), 광효(光孝) 등과 더불어 겁탈과 침약을 일삼았다. 광효가 남의 소를 도둑질하여 잡아먹었으므로 현관(縣官)이 그를 잡으려 하였다. 광효는 도망가고 산보 역시 성명을 주연지(周演之)로 바꾸어 다른 고장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뒤에 서울에 올라와서 점술로 사람을 홀렸는데 최우가 불러서 함께 말을 해보고 칭찬하여 날로 더욱 가까이하고 믿어서 모든 일을 그에게 자문하였다. 그 세력이 나날이 성하여 능히 남에게 상과 벌을 내리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다투어 뇌물을 바쳐 드디어 거부가 되었다. 술승(術僧) 도일(道一)을 제자로 삼아 서로 은밀히 모의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음성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여 능히 사람의 빈부와 수명을 판단한다."하고, 아름다운 부인을 많이 끌어서는 곧 대번에 간음하니, 추한 소문이 파다하였으나, 사람들이 위세를 두려워하여 말하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연지가 은밀히 최우에게 말하기를, "금왕(今王)은 왕위를 잃은 상(相)이 있고, 공은 왕후의 상이 있으니, 운명이 있는데 피하려 한들 그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최우가 심복으로 믿는 장군 김희제에게 말하니, 희제가 연지에게 묻기를, "과연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소?" 하였다. 연지가 깜짝 놀라 최우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전날 은밀히 한 말이 새어나갔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하니, 최우는 연지가 자기를 모욕하였다고 여겼다. 마침 어떤 사람이 최우에게 참소하기를, "며칠 전 공이 병환이 들었을 때에 상장군 노지정(盧之正)과 대장군 금휘(琴輝) 및 희제가 연지의 집에 모여, 공을 해하고 전왕을 받들어 복위시키려고 모의하였습니다." 하였다. 최우가 그 말을 믿고 연지를 남해로 귀양보내고, 지정과 금휘 역시 여러 주로 귀양보내었으며, 연지의 집을 적몰하다가 전왕이 연지에게 보낸 글월을 얻었는데 거기에, "하늘에 맹세하고 땅에 맹세하여 사생을 함께 하며, 아버지로 섬기겠다."는 글이 있었다.

최우가 곧 장군 조시저(曺時著) 등을 시켜서 전왕을 강화현으로 옮겼다가 또 교동으로 옮기고, 연지를 바다에 넣어 죽이며 그 족속을 멸하고, 도일을 잡아 다시 국문하였더니 모두 자복하였다. 또 지정·금휘·희제와 중랑장 아윤위(牙允偉), 별장 신작정(申作禎)을 잡아 아울러 바다에 던져서 죽이고, 처자와 형제를 먼 곳으로 나누어 귀양보냈다. 또 희제의 아들 견룡(牽龍 직명) 홍기(弘己) 등 3명도 바다에 던져서 죽였다. 때마침 희제가 전라주도 순문사(巡問使)가 되어 나주(羅州) 지방에 있었는데, 포자(捕者)가 이르러도 전혀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스스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 희제는 용의가 아름답고 지혜와 용기가 있어서 최우의 신임을 받았다. 최우가 병이 나자 낫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지정 등과 더불어 연지에게 점을 친 일까지 있었으나, 세도를 시기하는 자의 참소를 받아 죽었다.

 

6) 송군비(宋君悲 · ?~?)

송군비는 추밀원부사로 무신정권의 마지막 권력자 임유무의 가신으로 활약했지만 임유무가 제거된 후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다 실패했던 일로 남해에 유배되었다.

송군비는 항몽주의자로 고종 43년(1253) 입안산성(전남 장성 북하면)애서 몽골군을 대파한 적도 있었다. 그가 유배된 후 남해는 곧 삼별초의 근거지가 되었다. 송군비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끊어지지만 유존혁 장군과 함께 항몽운동을 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고려사절요 제18권 원종 순효대왕 1(元宗順孝大王一) 경오 11년(1270)

계축일에 임유무를 베었다. 유무는 어린아이로 아비의 권세를 이어잡아서 매사를 그의 장인 이응렬과 추밀원부사로 치사한 송군비 등에게 물어 결단하였다. 자부 어사중승 홍문계, 직문하 송송례는 외면으로는 따르는 체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항상 울분하였다. 유무가 장차 왕의 명을 거역하려 하니 중외(中外)가 물끓듯하였다. 이날 밤에 왕이 이분성을 보내어 은밀히 문계에게 이르기를, "경은 여러 대를 벼슬한 후손이니, 마땅히 의리를 따지고 사세를 헤아려 사직을 이롭게 하여 선조를 더럽히지 말라." 하였다. 문계가 두 번 절하고 분성에게 말하기를, "내일 부문(府門) 밖에서 나를 기다리라."하였고, 곧 송례에게 의논하였다. 송례의 두 아들 담·분은 모두 위사장으로 있었다. 송례·문계가 삼별초를 모아놓고 사직을 호위하는 대의를 말하고 유무를 잡기를 꾀하였다. 유무는 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군사를 집결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삼별초가 그 집 동쪽문을 부수고 돌입하여 난사(亂射)하니 군중이 무너졌다. 유무와 그 자부(姉夫) 대장군 최종소를 사로잡아 모두 거리에서 베고, 응렬과 군비, 그의 족부(族父) 송방예와 이성로, 외사촌 아우 이황수 등은 귀양보냈다. 유인은 스스로 목 찔렀으나 죽지 않았으므로 죽였다. 서방삼번과 성조색(成造色)을 혁파하니, 조야가 크게 기뻐하였다. 연의 아내 이씨는 성품이 질투하고 음험하여서 유무가 왕명을 거역하고 살육을 한 것 중에 그 아내가 시킨 것이 많았다. 패한 때에 이씨가 좋은 옷을 입고 보화를 품고 나가려 하니, 조오의 자매가 문에 이르러 엿보고 있다가 머리털을 끌어잡고 뺨을 때렸다. 마을에서 원혐을 품었던 자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그 옷을 찢어 벗겼는데, 구경꾼이 담같이 둘러싸니 도망하여 숨을 곳이 없어서 드디어 미나리 밭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조약돌을 던졌다. 뒤에 그 아들 유간·유서·유겨·유제 등과 함께 잡아 몽골로 보냈다.

 

7)백이정(白頤正 · 1260~1340)

난곡사는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체계를 세운 고려시대의 유학자 백이정을 주벽으로 제자인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이희급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으로 삼동면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유산이다.

그리고 백이정이 활을 쏘았고 홍살문이 섰던 자리라 '시문'이라 하는 마을도 난곡사 주변 삼동면 초입에 있다. 이 시문마을에는 백이정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백이정이 삼을 심어 기르던 곳이라는 삼밭골, 활을 쏘던 곳이라는 활재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백이정이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난곡사의 바로 옆에 있다. 

백이정은 삼양왕 고를 추종했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남해로 은둔 또는 유배되어 난음리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곡사 상량문에는 그의 후예가 8대에 이르기까지 남해에서 살아 왔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으니 난음 일대가 그의 본거지가 아닌가 싶다.

이제 백이정은 충렬와 24년(1298) 후일 충선왕이 되는 세자와 함께 중국 연경에 가서 10여 년간 체류하며 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이제현, 박충좌 등 제자를 가르침으로써 한국에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백이정 이후 주자학이 고려에 뿌리 내렸고 그 영향으로 고려 말기에 정몽주, 이숭인, 정도진, 권근, 길재, 이색 등과 같은 많은 학자들이 나오게 된다.

백이정은 도감사에 이어 상당군에 봉해지는 등 충선왕 때에는 최고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아버지 백문절의 전(傳)에 추가되어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조정과의 갈등 또는 반대판에 의해 희생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정과 충돌이 남해로 내려오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이정을 알 수 있는 사료는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나 백이정이 충렬, 충선, 충혜왕의 왕위 쟁탈전의 혼탁한 시기에 원나라를 통해 주자학을 고려에 가져와 후진을 양성하고 국가의 동량으로 키웠으며 고려시대 주자학의 기틀을 놓은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갑인 원년(1314) 

홍규(洪奎)를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김지겸(金之謙)을 낙안군(樂安君)으로 봉하고, 이호(李瑚)를 판삼사사(判三司事), 오잠(吳潛)을 삼사사(三司事), 백이정(白頤正)을 첨의평리로 임명하였다.

 

남면 평산리 우지막골에는 산청에 있는 가락국 10대 왕의 무덤인 구형왕릉과 축조방식이 유사한 전 백이정의 묘가 있다. 여기에 전(傳) 자를 붙인 것은 전 구형왕릉과 마찬가지로 예전부터 구전으로 불려왔기 때문이다. 백이정의 묘는 다른 묘들과는 달리 아주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봉분 주위 사방에는 평평한 긴 바위 등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석축 담장 안에도 주위를 쌓고 위는 타원형의 봉분을 만들었다.

남해사람들은 물론 학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백이정의 묘로 불려온 까닭에 남해 백씨 문중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