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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노량해전

내용
임진왜란과 노량해전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 66주(州)를 통합한 후 1586년에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조선에 보내 " 우리 사신은 늘 조선에 가는데도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는 곧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我使每往朝鮮 而朝鮮使不至 是鄙我也)"라고 하면서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

다치바나는 예조판서가 베푸는 연회석에서 "너희 나라는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하겠는가?(汝國亡矣 紀綱巳毁 不亡何待)"라는 말들로 시비를 걸었고 서슴없이 조선을 무시하는 망언을 했지만 조선에서는 예사롭게 듣고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그 후 1590년 일본국사(日本國使)로 온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대마도주로서 주병대장(主兵大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이었는데 소 시라노부(宗調信)와 승려 겐소(玄蘇)와 같이 왔다. 소 요시토시가 사신으로 온 이유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가 물길이 어둡다고 하니까 바닷길에 익숙한 소 요시토시를 보내니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신으로 첨지 황윤길(黃允吉)과 사성 김성일(金誠一)을 상사와 부사로 삼고 전적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1590년 3월에 소 요시토시 등과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5개월 정도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황윤길은 부산에서 장계를 올려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김성일은 "신이 그 곳에서 그러한 징조가 있는 것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선 정부는 당파에 따라 사신들의 보고가 달라 적극적인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으나, 이순신. 김시민과 같은 장수들을 남쪽지역에 배치하였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성을 개축하는 등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였다.

일본의 소 시라노부와 겐소 등이 부산 동평관(東平館)에 묵고 있을 때, 황윤길과 김성일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사신들을 끊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마음 속에 품어 분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전쟁을 일으키려 합니다. 조선이 먼저 이 사정을 중국에 알려서 조공하는 길이 트이게 주선한다면 반드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며 일본 66주(州)의 백성들도 역시 전쟁의 수고로움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소 시라노부과 겐소는 스스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1591년 여름에 소 요시토시가 부산포에 와서 변장에게 "일본은 명나라와 국교를 통하고자 하는데 만약 조선이 이를 위하여 그 뜻을 알려 주면 아주 다행스러우나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는 장차 화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큰일인 까닭에 와서 알려 드립니다"라고 말하고 10일 동안 부산포에서 답변을 기다리기 위해 배에서 머물다가 앙심을 품고 돌아가 버렸다. 이 뒤로 다시 오지 않고 부산포 왜관에 머물던 수십 명의 왜인도 차츰 돌아가 버리니 왜관 전부가 비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1586년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7년 동안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품고 있는 야심을 꿰뚫었다면 임진왜란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을 볼 때 단순하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만 보기에는 힘들다. 임진왜란은 당시 동북아시아 세 나라인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가 참전한 국제 전쟁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궁극적 이유도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일본이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조선을 침략했고 파죽지세로 치달은 일본군 선봉은 전쟁 발발후 20여 일만인 1592년 5월 3일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였고 6월 중순에는 평양까지 함락시켰다.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뭉진을 떠난 국왕 선조는 명나라로 내부(內附, 망명)하겠다는 뜻을 밝힐 정도로 전황은 조선에 극도로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조선 조성은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명군의 선발대는 7월 중순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국나의 위기를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고 의병으로 항쟁을 계속하였고 수군이 재해권을 장악하였다. 조선수군과 의병들은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일본군을 불안하게 하였기에 큰 전략적 의의가 있었다.

1596년 가을 무렵 강화협상의 결렬로 일본군은 재침을 준비하였다. 1597년 일본군의 재침 직후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폐배를 당하였다. 이 해전으로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경기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명량과 노량해전에서 승전함으로써 한 번 더 일본군의 침략의도를 좌절시켰다. 이순신은 진실 되고 거짓됨이 없는 완성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물론 의병, 승병,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여 그를 따랐으며 명나라 도독 진린과 병사들까지 이순신을 흠모하였다.

 

▶ 노량해전의 발단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였고 수군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충무공 이순신이 남해 관음포 앞 바다에서 전사한 유서 깊은 전투이다.

1597년 1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장수로 하여 14,500명의 군사를 선봉대로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 그 후 3월 중순까지 총 병력 141,500명을 남해안에 상륙시켰다. 10월에 한반도에 분산되어 있던 일본군은 겨울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8백리에 왜성을 축성하고 주둔시켰다. 남해에는 선소리 윤산 천남대에 와키사카 야스하루(脇板安治)와 소 요시토시(宗義智)군이 성을 쌓고 1천여 명의 군졸을 주둔시켰다.

1598년 8월 18일 7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다섯 원로를 불러놓고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조선에 침략한 군사들을 철군하라고 유언한 후 죽었다. 이에 원로들은 조선을 침략한 군사에게는 알리지 말고 철군하기로 결정하면서 귀국 시기를 11월 중순으로 잡았다.

9월 17일 조명연합군으로 편성된 중로군이 합천을 떠나 삼가를 거쳐 19일에 진주에 입성했고, 22일에 곤양을 점령하고 28일에 사천 구성(舊城)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1일에 일본군 주력부대가 지키고 있는 사천 신성(新城)을 공격하다가 대패하여 다시 합천을 지나 성주까지 퇴각했다.

한편, 9월 21일 동로군은 경주에 집결하여 명군은 울산성으로 진격하고 조선군은 동래성을 향하였다. 조선군은 분투하여 동래성을 탈환했으나 명군은 또 다시 울산성 공략에 실패하여 10월 6일에는 영천까지 물러났다.

8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에 도착한 서로군의 주장 유정은 군사를 다시 좌협, 우협, 중협의 3로로 나누어 좌협군은 남원·구례·광양, 우협군은 남원·순창·낙안, 중협군은 남원·곡성·순천으로 진격하여 9월 19일에 예교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수군도 서로군과 수륙합동작전을 위해 9월 15일에 고금도 본영을 출발하여 나로도·방답·여수·하개도를 거쳐 20일에는 예교성 앞 10리 지점의 유도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조명연합함대의 전력은 조선 수군 전함 80여 척, 명나라 수군 전함은 25척, 기타 협선 등 총 187척이었다.

예교성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서 크고 무거운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 판옥선이 마음대로 돌격할 수 없는 곳인데다 일본군은 5백여 척의 전선을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신성포에 숨기고 있었고 신성포까지 이르는 수로에는 말뚝을 박아 전선들이 마음대로 활동하고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였기에 해상전을 벌이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또 밀물을 타고 가까스로 진입하면 적병들이 양쪽 고지에서 조총을 마구 쏘아댔다.

10월 2일에 조명연합군은 수륙협공 작전을 폈다. 육지에서 일본군이 맹렬한 기습 공격을 가하니 명군 8백여 명이 전사하였고 수군도 가까스로 밀물을 타고 총공격을 해서 적을 많이 죽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컸다. 이 전투가 노량해전의 전초전이라 볼 수 있는데 격전 중에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 등이 전사하고 제포만한 주의수(朱義壽), 사량만호 김성옥(金聲玉), 해남현령 유형(柳珩), 진도군수 선의경(宣義卿), 강진혐감 송상보(宋尙甫) 등이 조총에 맞아 부상당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고립되었으나 최후의 저항을 생각하며 조명연합군을 대하니 아군의 피해는 갈수록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튿날 지형지물과 물때를 잘 모르는 명군은 오직 전승을 위해 야습을 가해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적과 싸웠는데 썰물에 걸려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명나라 전선 39척의 역습을 당해 수백 명이 전사하고 진린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어려운 전투를 하던 중 10월 6일 사천성을 공격하던 중로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로군 제독 유정은 전의를 잃고 군사를 순천으로 철수시켰다. 이때 수륙합동작전에 참여하던 수군도 전투를 끝내지 못하고 9일 고금도로 회군하였다.

잠시 휴전기간에 일본 본국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일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순천 고니시 유키나가 군과 남해 소 요시토시 군, 사천 시마즈 야스히로 군은 11월 10일에 철수하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 철군의 움직임을 눈치 챈 조선군과 명군은 왜적에게 접전해 더욱 심하게 압박을 시작하였다. 이때 선조는 남하해서 군사와 백성의 사기를 진작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7일 기록이다.

 

"지금 유제독이 다시 진군을 도모하니 관계된 바가 막중하다. 반드시 내가 몸소 남쪽으로 내려가 그뒤에서 책응해야 군량 수송과 군사 모집에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장수가 듣고 마음 쓰기를 반드시 달리 할 것이다. 목숨이 끊이지 않았는데 어찌 물러나 있겠는가? 이 뜻을 군문에게 고하고 모든 일을 미리 준비하여 빠른 시일에 내려가게 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여 속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그렇지만 선조는 남하하지 않았다. 만약 선조가 남하해서 조 ·명연합군을 격려하였다면 연합군의 사기는 물론 전투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일본군은 철군하는데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명연합군이 평성되어 있지만 유정 제독의 생각은 이순신이 생각하고 있는 의중과는 달리 싸우지 않고 성을 차지하는데 목적이 있는 듯했고 강화협상으로 종전시키면서 명군이 목숨을 잃지 않고 본국으로 귀국하고 일본군 역시 명나라 침략을 포기하는 데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린 도독은 유정제독과의 견해가 달랐다. 어떻게 하던 이번 기회를 계기로 유정보다 공적을 높이 올리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밤에 급히 일본군이 철수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순신과 의견을 교환하기에 이른다. 난중일기 11월 초8일 기록이다.

 

이순신은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었다. 하루 내내 술을 마시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보자고 청하였다. 바로 나갔더니 도독이 "순천 왜교의 적들이 초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습니다.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읍시다"하였다

 

이때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사와 함대는 11월 10일에 철수하기로 약속하고 순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과 남해 소 요시토시 군, 사천 시마즈 야스히로 군은 창선도에 집결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철수하는 길목인 순천 나로도를 명나라 유정 군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철수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 군에게 종전을 협의하기 위해 휴전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싸우지 않고 40명의 인질을 서로 교환하자는 조건을 걸면서 많은 뇌물을 유정에게 바치니 명나라 유정 제독은 피 흘리지 않고 일본군이 물러간다는 것에 응하였다.

다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 왜교성에 있는 모든 물자와 장비를 유정 군에게 인계하고 부산까지 철수하는데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렇게 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군과 명나라 유정군은 협정을 마쳤던 것이다. 이 사실을 명나라 도독 진린이 알게 되어 급히 이순신에게 연락을 취하였고 뜻을 같이 하여 명나라 전선 300여 척과 이순신 전선 80여 척이 편성된 것이 380여 척의 연합 함대이다.

1598년 11월 9일 조·명연합 함대는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철수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나로도에서 백서량과 여수를 거쳐 광양만으로 대함대를 이동하여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두한 예교성에서 바다로 4.5km 떨어진 유도에 11월 11일에 도착하였다.

1598년 11월 10일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유정과 휴전 협정이 있었기 때문에 유정제독을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철수 준비를 완료하였다. 한편 사천의 시마즈 야스히로 군과 남해의 소 요시토시 군은 자기가 지키던 왜성을 버리고 약속된 창선도로 집결하였고 고성에 있던 다치바나 군도 거제도로 이동하여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할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모두 순천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 군만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1598년 11월 11일 도원수 권율이 선조에게 유정이 일본군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강화하려는 계책을 세유는 것을 통탄하는 보고를 하였다.

 

"도원수 권율이 '유제독이 이달 1일 다시 공격하기 위한 일로 예교로 출발하였고 진유격의 군대는 다음날 떠났습니다. 마병도 다시 공격하려 한다고 하니 아직 기일을 정하지 않고 있는데 현재 왕 참정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행장(고니시 유키나가)과 강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비록 신에게는 저들을 속여 소굴에서 나오게 해서 바다 건너는 것을 기다려 협공하려고 합니다'고 하지만 사실을 구차하게 수습하려는 계책인 바 매우 통한 스럽습니다"

 

1598년 11월 12일 순천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유정제독과 이미 협상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우선 선발대로 함선 10척을 내 보냈다. 그러나 묘도 부근을 통과하면서 조선 전선에 적발되어 진로가 차단되었고 철통같은 경비에 격퇴되었다. 순천으로 돌아온 척후선은 이러한 해상 상황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고하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펄쩍 뛰면서 명나라 유정제독과 휴전 협정으로 교환한 인질 40명 중 2명의 팔을 베어 유정에게 보내고 크게 항의하였다. 무술년 11월 12일 난중잡록(권3)이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미 유정에게 뇌물을 주어 왜교 탈출을 보장 받은 소서행장이 그 선발대로 10여척의 선박을 왜교성 앞바다에 띄우게 되자 이를 조명연합 수군이 묘도 가까운 해역에서 격퇴하였다. 이에 분개한 소서행장이 앞서 부총병 오광이 인솔해 온 명군 40명을 구속하고 그 중 두 명의 팔을 잘라서 유정에게 보내면서 크게 항의하였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에게 말하길 "제독은 또 다시 나를 속이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돌아갈 것이 아니라 제독의 군사와 일전으로 승패를 결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당황한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말하길 "바라건데 화를 도독 진린에게 구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무사할 것이외다"라고 전달하였다.

1598년 11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의 말을 따라 다시 배 두 척에 홍기와 환도등 선물을 가득 싣고 명나라 도독 진린을 찾아갔다. 진린은 통역사를 보내 이를 영접케 하였다. 오후 8시경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시 장령으로 하여금 돼지 두 마리와 술 두통을 진린에게 보냈다. 유정과는 생각이 달랐던 진린도 일본군의 노물 공세에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왜선 두척이 강화하기 위해서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일본의 통역관으로 하여금 왜선을 맞아 오게하고 조용히 붉은 기와 환도 등의 물건을 받아 들었다. 저녁 8시경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순천 왜성에서 빠져나가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해결책은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명군을 설득시키고 뇌물로써 해결하자는 속셈이었다. 이에 진린은 한술 더 떠 본인에게 전쟁의 성과물인 수급 2천을 주면 철군을 허용하겠다고 하였다. 역시 명나라 측에서는 서로 피를 흘리는 접전이 없으면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수급을 받아 전공을 세우자는 것인데 그 수급은 인질로 잡혀있는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더욱 결심을 하게 되면서 한 명의 적이라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한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 몰래 고니시 유키나가 군사 4명을 태운 소선(척후선) 한 척을 몰래 나가도록 허용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598년 11월 15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또다시 말과 창, 칼 등을 진린에게 바치면서 청하기를 "군사는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오매 원하옵건대 나에게 길을 빌려서 고국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오" 하면서 간청하였다. 이에 진린은 많은 선물을 받았고 명나라 군사를 남의 나라 싸움에 죽이기 싫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먼저 이순신에게 허락을 받도록 하였다.

그래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도 진린과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하고 부장과 장수를 시켜 조총과 장검 등을 이순신에게 바치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 측에서 많은 뇌물을 배에 가득 싣고 이순신에게 가서 진린에게 하던 방법대로 같은 뜻으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유정이나 진린과는 달리 화를 내며 호통을 칠뿐 아니라 모든 선물을 물리치면서 "이것만으로도 쓰고 남을 지경이니 이런 것은 그냥 갖고 돌아가라! 화해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 사람이 관여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면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무안을 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직접적인 뇌물 공세는 불가하다는 것을 느낀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진린을 통하여 은과 주육을 이순신에게 보내오므로, 이순신은 더욱 정색을 하고 명나라 진린도독에게 말하길 "장수는 화해를 말하여서는 아니 되오며 원수는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소이다. 이 적은 귀국에 있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죄가 많은 군사들이옵는데 이제 대인께서는 도리어 그 죄를 용서하시고 화해하시려는 것이오리까" 하므로 진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1598년 11월 16일 조명 연합 함대의 복병장으로 나가 있던 소계남과 조효열은 일본 함대가 남해에서 군량을 배에 가득 신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발견하자 추격한 끝에 모두 포획하여 배와 군량을 연합 함대 쪽으로 가져오는데 중간에서 진린 함대의 군사에게 모두 빼앗기고 돌아와서 보고하니 이순신은 웃기만 하였다.

그리고 즉시 군관 송희립을 불러 작정 명령을 시달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우선 선발대로 10여 척의 배를 내보내 보았으나 이순신의 명령 하에 순식간에 공격을 받아 모두 죽으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시 이순신에게 선물을 바치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크게 노하여 "원수의 적 무리가 어찌 감히 이같이 외람한고"하고 크게 꾸짖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교성의 위급함을 여러 곳에 있는 일본 함대 측에 알려 도망갈 것을 궁리하던 끝에 또다시 진린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진린은 "내가 이미 통제공에게 무안을 당하였거든 어찌 또다시 이러한 말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수없이 왕래하면서 배3척에 말, 창, 칼 등을 가득 싣고 진린에게 바치면서 간곡히 부탁하므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애원을 들어주기로 작정하고 조그만 배를 성 밖으로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일본군 연락선은 이미 11월 10일에 창선도에 집결하고 있는 사천 시마즈 야스히로군과 남해 소 요시토시 군에게 순천 왜교성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 군의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니 다시 거제의 다치바나 군과 부산의 다카하시 군에게도 연락하여 지원을 받아 노약한 군사와 잡혀가 있는 백성들을 먼저 창선도에서 부산으로 보낸 다음, 건장하고 힘센 정규 병사들만으로 일본군은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매우 놀라 근심하는 것을 본 군관 송희립은 "일이 이쯤 되고 보면 이제 별 도리가 없습니다. 적이 연락하는 배를 띄우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반드시 영남 여러 진성에 급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한 것이오며, 전투를 미리 약정한 것이오니 불원간에 많은 적선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 온즉 만일에 여기 그대로 있으면 양면에서 적탄을 받게 되므로 우리의 불리함은 확실합니다. 소인 생각으로는 차라리 진열을 큰 바다 가운데로 옮기고 일전을 결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연하자 옆에 있던 해남현감 유형도 옳다 하므로 이순신은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자기 소견과 같다 하여 작전 계획을 세운 뒤 이 사실을 진린에게 알렸다. 진린은 깜짝 놀라 자기의 실수로 이러한 상황까지 도달하였음을 자책하였지만 어쩔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