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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조선시대

노량해전 전야

내용
노량해전 전야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노량해전 전야

순천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위급함을 전달 받고 시마즈 야스히로는 군사들중 노약자와 포로들은 배로 실어 퇴각하는 집결지인 부산포로 보냈다. 사천성 시마즈 야스히로, 고성의 차티마나 무네토라, 부산의 테라자와 마사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 군사 중 정병 함대 5백 척을 재편성하여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사천 앞바다에서 순천을 향하여 닻을 올리고 출전하였다. 이때 상황을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는데 기록에는 약간의 차이들이 있다.

이충무공전서 행록에는 '공은 도독과 약속하고 그날 밤 열시쯤에 같이 떠나 새벽 두시쯤에 노량에 이르러 적선 오백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라 하였고, 선조실록 권 106, 31년 11월 27일에는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 하였다. 금월 19일 사천, 남해, 고성에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에 도착하자···'라 하였으며,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사천의 적 괴수 의홍과 남해의 부괴수 소 시라노부(평조신) 등이 행장과 의지의 부름에 따라 군사의 노약과 포로 된 남녀를 배에 싣고 먼저 떠나게 하고 자신이 백 척을 거느리고 밤 조수를 이용하여 나와 응원했다'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후대의 기록인 이긍익(李肯翊, 영·정조시 저술가 1736~1806)은 난중잡록과 내용은 같으나 왜선을 수백 척이라 하였고 이성령(李星齡, 인조 때 문신 1632~?)도 사천의 적장 의홍과 남해의 적장 소 시라노부등이 행장의 청에 의하여 쇠약한 군사와 우리나라 사람들을 배에 실어 앞에 내 보내고 자기는 수백 척의 배를 거느리고 밤 조수를 타고 구원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량해전에 대한 일본기록은 1924년에 참모본부(參謨本部)에서 발행한 일본전사 조선역본편(日本戰史 朝鮮役 本編)에 의하면 '이로써 무술년(1598) 11월 18일과 19일 이틀동안 펼쳐진 조·명연합 함대와 일본 함대간의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한 일본함대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그리고 부산에 주둔했던 데라자와 마사나리(寺澤正成)와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增)등이 함께 거느린 5백여 척의 대규모 세력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잇다.

기록에는 보아 오백 척, 삼백 척, 백 척, 수백 척 등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당시 전황으로 보아 일본은 여러 진열을 합하였고 조명연합전선이 400여 척임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승전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전함을 동원했을 것으로 볼 때 일본 수군을 오백 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려고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진린에게 말하길 "장도에 그대로 주둔한다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정면 공격을 받을 것이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원군에게 후미를 공격 받을 것이니 적을 기다리지 말고 넓은 바다로 나가서 싸워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진린은 허락하지 않다가 뒤에 허락했다는 것이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28일조에 의하면 "어느 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린에게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린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허락하였다'라 기록하고 있고 선조실록 1599년 2월 2일조에 의하면 "이순신은 이를 듣지 않고 먼저 나가 싸울 것을 결심하고 나팔을 불고 배를 출항하였다. 진린도 할 수 없이 이순신의 뒤를 따라왔으나 명나라 선체는 적은데다가 후미에 있었기 때문에 기세만 돋울 뿐 이었다"라 기록하고 있다.

진린의 입장이 난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왜군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청탁받은 것이 마음에 흠이 잡혔지만 대의나 훗날을 볼 때 자기의 위치가 상당히 어려움에 겹칠 것이라는 생각과 이순신의 강경한 의지와 결단력에 본인은 명분을 세울 이유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을 것이다.

조·명 연합 전선도 일본 지원 전선과 싸우기 위해 광양만에서 노량해협을 향하여 출동을 시작하였다. 조·명 연합 전선 380여척의 전선은 직격의 북소리를 울리면서 출동하였다. 연합함대는 밤늦게 노량 앞 바다에 도착하여 일본군 지원 전선이 통과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명나라 진란군은 죽도(하동군 금남면) 부근에서 좌협을 지키고 이순신 전선은 맞은편 남해 관음포에서 우협을 지키며 각각 양협에 진을 치고 일본 전선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의 전황을 선조실록 32년 2월 2일에 기록하고 있다.

 

···이덕형(李德馨, 임진왜란시 좌의정 1561~1613)이 아뢰기를, "18일에 이순신이 진린에게 말하기를 '적의 구원병이 수일 내에 당도할 것이니 나는 먼저 가서 요격 하겠다.' 하니 진린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듣지 않고 요격하기로 결정하고서 나팔을 불며 배를 몰아가자 진린이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는데, 중국 배는 선체가 작은데다 뒤쪽에 있으므로 그저 성세만 보였을 뿐이고 등자룡과 진린 두 사람이 판옥선을 타고 가서 싸웠다고 합니다." 하였다.

 

李恒福(임진왜란 시 병조판서 1556~1618) 白沙集 卷4, 碑銘 '統制使李公露梁碑銘"

···그해 겨울에는 적들이 합세하여 대거 진격해 와서 노량에 이르자, 공이 스스로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적의 예봉을 시험하니 천병이 협격해 와서 공익 군대와 긱가의 형세를 취하였다. 그런데 이날 첫닭이 올 무렵에 바다 귀신은 길을 인도하고 바람 귀신은 위엄을 그쳤으며 사방에는 운무가 환히 걷히었다. 그러자 새벽 중반에 이르러 양쪽 군대가 일제히 일어나서 일천 돛이 날아 춤추는 가운데 공이 맨 먼저 뛰어 들어가 예기를 타서 적진을 무너뜨리니···

 

왜군은 5백여 척의 전선에 일만 이천 여명의 수군으로 급히 편성하여 밤에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급히 전선에 올라 바닷길을 재촉하면서 시마즈 야스히로의 지휘 아래 광양만을 향해 출동하였다.

3경인 자정 무렵에 이순신은 원수기 밑에서 청수로 손을 씻고 백단향을 피운 다음 축천기도(祝天祈禱) 하기를 "이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 있다 하오면 죽어도 또한 한이 없겠나이다(若殲斯讐 死亦無憾)" 하였다. 이때에 큰 별 하나가 하늘에서 바다 위에 떨어지거늘 도열하고 잇던 군사와 시립하고 있던 장수들이 모두 이상한 감회에 젖게 되었다. 이순신은 관음포구 앞섬에 복병을 숨겨 두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일본 전선은 계속 서쪽으로 항진하며 조수를 따라 노량해협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의 전황 기록을 보자.

 

李芬(이순신 조카, 1565~1628) 行錄, 李忠武公全書 卷9.

저녁 여섯시쯤 적선이 남해로부터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해 있고 또 노량으로 와 대는 것도 얼만지 몰랐다. 공은 도독과 약속하고 그날 밤 열시쯤에 같이 떠나 새벽 두시쯤에 노량에 이르러 적선 오백여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 그날 밤 자정에 공이 배위로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끓고 하늘에 빌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그러자 문득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는데 보는 이들이 이상히 여기었다.

 

이때 조·명 연합 함대는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일본군의 함대가 노량해협을 통과하여 대도(하동군 금남면)쪽으로 항진 중에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어서 복병장으로 나가 있었던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또한 척후선을 몰아 적이 서항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급보를 통제사 이순신에게 전한다.

이때 하늘은 아직 밝지 않았고 동쪽 하늘과 바다를 멀리 바라보니, 일본군 지원함대의 불빛이 점점이 열을 지어 오는데 마치 별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전투 전양의 상황은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다. 남중잡록과 은봉전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趙慶男(의병장, 1569~1641) 亂中雜錄3.

···사천의 적의 괴수 義弘과 남해의 부괴수 平調信 등이 행장과 의지의 부름에 따라 군사의 노약과 포로 된 남녀를 배에 싣고 먼저 떠나게 하고 자신이 백 척을 거르니록 밤 조수를 이용하여 나와 응원했다. 수군 복병장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거룻배로 달려와 보고하였다. 진린과 이순신(李舜臣)이 여러 전선을 거느리고 좌우협이 되어 아군은 남해의 관음포에 주둔하고 명군은 곤양의 죽도에 주둔하여 닻을 거두고 대기하였는데, 한밤중에 적선이 光州 山濤(사천 남해로 오는 수로의 이름)로부터 구름이 합치듯 안개가 모이듯이 모여들고 곧장 노량을 지나 마침 왜교로 향하려는데,···

 

安邦俊(의병장, 1573~1654) 隱鋒全書 卷7 露梁記事.

···그때 동쪽의 왜적은 이미 한산 앞바다의 관음포에 와 있었다. 왜적들은 조총을 가지런히 해놓고 아군을 기다려 쏠 준비를 하였따. 이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때라서 멀리 보이는 화승의 번쩍번쩍하는 것이 마치 밤하늘을 가득히 수놓은 별들과 같았다. 여러 배들이 다투어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어두컴컴한 때라서 배 위의 군인들이 모두 방심하고 곁눈질을 하였다.

 

조선 전선과 수군은 선조실록이나 징비록에 기록된 바와 같이 전선 80척에 8천명의 군사가 있었꼬 명 수군 전선은 3백여 척에 1만 3천여 명이 노량해전에 참전했다고 보이는데 조명연합 함대는 380여 척이고 군사는 2만 1천여 명이다. 일본 수군 함대는 5백 척에 1만2천여명이 노량해전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11월 18일 조명연합 함대는 관음포 앞바다에 앞을 내리지 않고 숨을 죽이며 일본 지원군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