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이순신의 순국해역 관음포
상세내용
▶ 이순신의 순국해역 관음포
관음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붙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 때 해도원수 경렬공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시킨 대첩을 "남해관음포대첩"이라고 적고 있다. 관음포라는 지명은 고려대장경 판각이 이곳에 이루어진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고려대장경의 판각 추정 지역을 당시 현(縣)의 소재지였고 지형의 조건이 적합한 남해군 고현면 관음포 일대라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불성지(佛聖地)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관음(觀音)의 포구였기에 관음포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량해협과 관음포만의 수심과 조류에 의하여 함대 이동 가능성을 볼 때, 어느 지역에서 최후로 전투가 치열하였던 곳인가는 그 당시 조류와도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 노량해엽의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현재 남해대교의 아래로 볼 수 있는데 수심이 약 44~45m 정도이며, 간만의 차이는 1.5~2m라 하였다.
음력 11월 19일의 물때와 간, 만조의 관계를 수로국 승인 제 9311호 도표에 의하면 간조가 03:30분 만조가 09:30분인 것으로 보아 약 6시간마다 간조와 만조가 이루어진다. 물때는 9물에서 11물 사이로 보이므로 10물을 기준하여 보았다. 조수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였기때문에 400여 년 전 노량해전 당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유재란 당시의 조수를 오늘에 맞추어 노량해전 상황을 추정해 보기로 하겠다.
명나라 진린 함대의 위치는 죽도 부근이었고, 이순신 함대는 관음포 외항(현, 차면항)에 위치하였다. 시간은 11월 18일 자정으로 보는 것은 조·명 연합 함대가 양협으로 분리된다 음 2시경에 이순신이 축천 기도를 올린 시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먼저 밀물 때와 썰물 때 노량 해협을 통과하여 명나라 등자룡 선발대에 의해 진로가 차단됨과 동시 이순신함대가 일본 함대 중앙을 돌파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는 썰물로 조류는 노량에서 순천 방향으로 흘러갔을 뿐 아니라 등자룡이 일본 함대에 선제공격을 받아 죽도에서 광양만 쪽으로 약간 밀려 관음포 내항 앞 중앙 해협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03:00시경은 간조로 양협 내항 쪽으로 수심이 얕았고 수심이 깊은 관음포와 광양만 사이의 중앙 지점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이며, 04:00시경부터 밀물이 시작된것으로 본다. 차츰 밀물에 의해 관음포 내항으로 해상전이 밀려들어오면서 전투가 계속되었으며, 09:00~10:00시 사이는 만조가 되어 관음포 내항은 가청곡(加靑谷, 고현면 오곡리)까지 조류가 흘러 푸른 바다를 이루었을 것이다.
노량해협은 조류가 심할 때 시속 16킬로미터의 속도를 내기 때문에 조류에 의해 이미 관음포 내항까지 일본 함대는 입항되어 퇴로만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패하여 관음포 내항에서 육지 방향으로 도주하기에 이순신은 선두에서 추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저격수에 의해 왼쪽 가슴을 맞아 전사하게 되었다.
관음포 내항 쪽은 만조가 되어도 수심이 깊지 않기 때문에 중간쯤에서 일본군 패장병 500여명은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가청곡을 거쳐 선소리에 소 요시토시 군이 버리고 간 왜성으로 도망쳤다.
정오(12:00)가 되기 전까지 일본 함대는 거의 불타 버렸고 암초에 앉았다고 한 것은 이미 11:00시부터 썰물이 시작되어 만조 때 배를 타고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간 일본 함선은 썰물에 의해 갯벌 바닥에 가라앉거나 암초에 좌초되었다.
이순신의 순국해역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해 충무공 이순신장군 해역조사단에서 조사한 「충무공 이순신장군 순국해역을 찾아서(남해군 문화관광가, 2005)」자료집 중 문헌 조사위원인 제장명 해군 충무공수련원 연구교수의 「노량해전 격전지 문헌조사 결과 」를 인용한다.
(1) 노량해전 직후의 기록들에 대한 검토 결과
먼저 해전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딘인가에 관한 검토이다. 이를 각 사료별로 검토해보면, 「행록」에는 노량으로, 『은봉전서』에는 관음포, 『선조실록』에는 노량도, 노량, 묘도 등지로, 『징비록』에는 남해지경, 『백사집』에는 노량, 『난중잡록』에는 관음포 앞, 관음포 안 등으로, 『상촌집』에는 관음포 등으로 표현하였다.
위의 해전 장소는 넓게 보아 모두 남해와 순천왜교성 사이의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해전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사료는 『은봉전서』와 『난중잡록』그리고 『상촌집』이므로 이들 사료에서 표현한 관음포가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처음에는 노량수로 왼쪽 부분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투가 관음포 지역에 집중된 면이 있다. 다만 여기서 관음포 입구 해상인지 아니면 내부인지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두 번째 사안으로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된 것이다. 먼저 당시 이순신이 전사한 시각을 살펴보자. 「행록」에는 11월 19일 새벽, 『은봉전서』에는 구체적인 시간이 없고 날이 밝지 않은 때라고 하였다. 『선조실록』에는 11월 19일 날이 밝기 전, 『징비록』에는 구체적인 시각 표현이 없다. 『백사집』에는 동틀 무렵, 『난중잡록』에는 날이 이미 밝았을 때, 『상촌집』에는 11월 25일 4경 이후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볼 때 이순신의 전사날짜는 11월 19일 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상촌집』의 이순신 전사 날짜는 11월 25일로 기록되어 있어 믿을 수가 없으므로 제외한다.
아마도 날짜에 대해서는 착각했던 것 같다. 다른 기록의 경우 11월 19일의 새벽, 동틀 무렵, 날이 이미 밝았을 때로 압축된다. 결국 전사 시간은 동틀 무렵부터 오전 중의 시간대로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인 시간은 다른 기록들로 보완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순신 사후의 상황처리를 누가 담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행록」에는 회와 완, 종금이 세 사람이 있었고, 회와 완 중의 일인이 기를 휘둘렀다고 하였다. 『은봉전서』에는 장좌 몇 사람과 가족, 그리고 송희립이 알았고, 송희립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는 사관이 논한 부분에는 이문욱, 권율의 장계에는 손문욱, 형조정랑 윤양의 보고에는 송희립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손문욱은 마침 그 때 함께 있다가 자신이 처리한 것으로 잘못 전달되었다는 수군들의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 『징비록』에는 이순신의 조카 완, 『난중잡록』에는 아들 화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들을 볼 때 당시 이순신의 죽음을 송희립 등의 군관과 손문욱 등의 일부 장좌, 그리고 아들 회와 조카 완 등이 함께 알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여기서 전투 경험이 많고 전략가이기도 한 송희립이 대신 독전을 했을 것이고, 제반 사후처리를 주도적으로 수행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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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해전지역 |
순국시각 |
사후처리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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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록 |
노량 |
11월 19일 새벽 |
회,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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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봉전서 |
관음포 |
날이 밝기 전 |
송희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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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
노량도, 노량, 묘도 등지 |
날이 밝기 전 |
송희립, 손문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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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남해지경 |
언급 무 |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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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지 |
노량 |
동틀 무렵 |
언급 무 |
|
난중잡록 |
관음포 앞, 관음포 안 |
날이 이미 밝았을 때 |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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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집 |
관음포 |
11월 25일 4경이후 |
취하 군사들 |
(2) 후대 기록들에 대한 검토 결과
후대의 기록들은 대다수 노량해전 직후의 사료들 중에서 취사선택하면서 일부 내용을 보충한 면이 많다. 따라ㅏ서 여기서는 노량해전 당대의 자료 중 어떤 것을 가장 많이 인용했는가를 검토한다. 그리고 후대 자료들 중 이순신 순국 관련 다른 내용들의 검토를 통해 가장 신뢰성 있는 자료가 무엇인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가장 신뢰성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후대의 자료들에 나타난 해전장소, 순국장소, 순국 후 사후 처리 등에 대하여 종합하면 다음 표 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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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해전지역 |
순국시각 |
사후처리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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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번방지 |
관음포 |
25일 4경이후 |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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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
남해경계 |
언급 무 |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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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
관음포(안) |
날이 이미 밝았을때 |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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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
남해경계 |
언급 무 |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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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중흥지 |
노량, 관음포항구안 |
언급 무 |
부하장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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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
노량 |
아침 |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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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파일월룩 |
관음포 |
아침 |
부하장수,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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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년고 |
관음포 |
언급 무 |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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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모비 |
노량 |
언급 무 |
완 |
위 표에서 보듯이 9종의 사료 중 해전 지역을 관음포로 언급한 사료가 5종이나 된다. 나머지 4종도 내용 자체가 소략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후대의 자료들은 대다수 관음포가 최대 격전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순국시간은 '아침'과 '날이 이미 밝았을 때'로 압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후처리 담당은 9종 중 6종의 사료가 완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장자 회도 2종이나 된다. 노량해전 직후의 기록들이 송희립을 주로 언급한 것과는 매우 대조 되는 부분이다.
(3) 이순신 장군 순국해역
노량해전은 관음포 의해 어서리끝 앞바다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생각되고 이 해역에서 이순신은 적탄을 맞고 순국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그 지역 중에서 어느 정도의 범위를 산정할 것인가는 다각적인 고려를 통해 검토가 이뤄져야 할 사안이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전토이다. 이 해전은 조명연합군의 사로병진 작전 중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전투이기도 하다. 부연하면 1598년 11월 18일에서 19일 양일간 조명연합 함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당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小四行長)군을 구출하려고 왔던 일본의 구원군을 연합군이 요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수군과 진린이 이끈 명수군은 효과적인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의 대미를 승리로 장식했다는 의미에서 해전사적인 의의가 크다. 나아가 철군하는 일본군에게 일격을 가하여 침략자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아울러 7년 전쟁으로 고통 받은 우리 민족의 한을 어느 정도 풀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안타깝게도 민족의 영웅 이순신과 많은 조선 수군들이 순국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한 후 당시 명 원군의 총 사령관이었던 군문 형개(軍門 邢玠)는 "바다 위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표창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즉 400여 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자존심 강한 중국인에 의해서 바다 위에 이순신의 사당을 짓자는 논의가 있을 정도로 이순신은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영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다 위에 사당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조그마한 표시라고 하여 이순신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오늘날에도 선양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표시는 이순신 개인뿐만 아니라 함께 순국한 많은 우리 수군들의 넋을 기리는데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순신의 순국해역에 대한 위치 추정은 어느 정도 가능함을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4) 충무공 이순신장군 순국해역이 관음포였다는 조사단의 종합의견
① 경과보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순국지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순국해역을 선정하는데 그동안 무관심하였다.
이에 정확한 순국해역을 지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뒤 따르나 우선 문헌을 토대로 전투해역을 좁혀서 분석 연구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당시 전투상황과 조수, 지형지물, 충무공의 전략 ·전술, 문헌 등을 조사 연구하고 분석한 후 순국해역을 추정하여 부표를 설치하기 위해서 2005년 10월 6일 남해군에서는 충무공과 관련되는 각계각층 기관단체의 추천을 받아 전문가 또는 연구가 15명이 남해군수로 부터 위촉되었으며, 조사단이 구성되어 노량해전과 충무공 순국해역 조사를 시작하였다.
○ 충무공 이순신장군 순국해역 조사단 명단(직함은 조사 당시 기준)
조사단장 김우영(남해향토유적 등 보호위원, 화전사바로알기모임회장), 사로조사우원장 정의연(남해향토역사관장,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문헌조사위원 제장명(충무공수련원 연구원), 문헌조사위원 이영준(남해군청 문화관광과장), 문헌조사위원 김성철(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조사위원 정병웅(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조사위원 정진술(해군사관학교박물관 기획실장), 조사위원 장학근(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사부장), 조사위원 이호균(남해문화원장), 조사위원 정승효(남해충렬사 모충회장), 조사위원 류명규(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전회장), 조사위원 정문석(남해신문 대표), 조사위원 이 홍(고현면발전협의회장) 조사위원 문부경(남해향토유적등 보호위원), 조사위원 박문호(남해향토유적등 보호위원)
충무공이순신장군순국해역조사단(단장 김우영)에서는 사료조사소위원회(위원장 정의연)를 구성하여 관련 사료를 종합 정리하도록 하였으며 소위원회는 10월 21일에 조사된 자료를 종합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노량해전의 전투장소와 충무공 순국해역이 나타나지만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자료를 보완하기 위해 사료조사 제출자(해군 충무공 수련원 제장명 조사위원)에게 추가로 자료를 정리하도록 위임하였다.
2005년 11월 4일에 조사단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제장명 사료조사위원이 제출한 「문헌에 기록된 노량해전」과 정의연 사료조사위원장이 제출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순국과 노량해전」자료를 검토하였다. 자료 검토결과 전 위원이 노량해전과 충무공의 순국해역을 설정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자료집 이름을 『충무공 이순신장군 순국해역을 찾아서』로 확정함과 동시 관음포 현장을 답사하여 조사위원들의 종합 의견으로 관음포 해상에 2005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기하여 이내기끝과 어서리끝 사이에 부표를 설치하였다.
② 문헌 요약 내용
노량해전에 관한 문헌 중 신빙성과 고증자료의 가치가 높은 문헌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노량해전 직후 기록인 이분의 「행록」(이충무공전서 권9), 안방준의 『은봉전서』 권 7 노량기사, 『선조실록』, 류성룡의 『징비록』 권 2, 이항복의 『백사집』 권4 '통제사이공노량비명', 조경남의 『난중잡록』, 신흠의 『상촌집』 권 56의 자료와 후대의 기록인 신경의 『재조번방지』 5, 『선조수정실록』(권32 무술 11월 임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권 17, 『선조조교사본말』, 『국조보감』(선조10 31년 무술), 『선조중흥지』 권6, 이식(시장), 이성령의 『춘파일월록』, 『소대년고』, 송시열의 '이충무공묘비문' 그리고 막하인물과 중국·일본의 기록이 있다. 막하로는 유형, 나대용, 송희림, 최희량, 오득린, 이원, 이언량 과 명나라 서희진의 『해동역사』권 64 본조비어고 동정기, 일본 도진의홍의 『도진가기』 『정한록』등의 문헌을 참고하였다.
전체 내용을 검토한 결과 노량해엽인 노량과 순천 왜교성 앞 전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다는 것은 사실이나 『난중잡록』, 『은봉전서』,『상촌집』등 더욱 구체화된 기록을 볼 때 시간이 흐를수록 넓은 해역에 압축되어 관음포가 가장 치열한 정투 해역이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순국해역도 노량해전이 마무리될 무렵으로 보기 때문에 관음포 입구내외로 추청할 수 있는 것은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 전선은 퇴로를 찾았고 충무공 조전선은 원거리 사격으로 관음포구를 봉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가 때문이다. 정확한 위치를 확정지시기에는 너무나 어려움이 따르지만 부표를 설치한 지점을 중심으로 인근일 것으로 확신하다.
▶ 노량해전 이후
노량해전이 끝난 직후에 도독 진린은 먼저 이순신에게 도와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려 하다가 이순신이 죽은 것을 알고 갑판 마루위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니 비로소 아군과 명나라 군사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일시에 모두 통곡하였다.
명나라 군사들마저 모두 육식을 금하였으며 선비들이 통제사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사도께서 우리를 버리시고 어디로 가셨단 말이오"하면서 곡(哭)을 하였고 영구를 발인하여 고금도에서 아산으로 향하는 도중에는 남여노유(男女老幼)들 모두가 호곡하면서 그 뒤를 따랐으며 선비들은 주전을 차리고 제문으로 애도하기를 친상과 같이 하였다.
도독이하 명나라 장령들은 모두 만가를 지어서 애조하였으며 진린은 선조에게 글을 올려 찬양하기를 "이순신은 천하를 종횡하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큰 재주가 있고 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낸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위대한 공이 있습니다." 하였다.
『징비록 』권 2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말하길,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내가 죽은 것을 말하지 말라'하는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李莞)은 평소에 담력과 도량이 있는 사람이라 그의 죽음을 숨기고는 이순신의 명령으로써 싸움을 독려함이 더욱 급하니 군중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럴 때 진린이 탄 배가 왜적에게 포위를 당하니 이완은 이를 바라보고는 그 군사를 지휘하여 그를 구원하였다. 왜적들이 흩어져 달아난 뒤에 진린은 사람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자기를 구원하여 준 것을 사례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그가 전사한 것을 알고 앉아 있던 의자 위로부터 펄썩 땅 바닥에 주저 앉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노야(老爺 李舜臣)가 와서 나를 구하여 준 줄로 여겼는데 어쩌다가 돌아 가셨단 말입니까?' 하고는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진 군사들이 다 통곡하여 그 울슴소리가 바다 가운데 진동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연달아 모든 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자신의 어버이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슬퍼하였고 그의 영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사를 베풀고는 영구수레를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공(公)께서는 실로 우리를 살려 놓으시더니 지금 우리를 버려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며 길을 막아서 영구수레가 지나갈 수가 없었고 길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을 추증하였다. 이때 형군문(邢軍門:邢玠)은 '마땅히 그 사당을 바다 위에 세워서 그 충혼(忠魂)을 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일은 마침내 실행되지 않았다'
앞 문헌에 나타나듯이 명나라 도독 진린이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통곡하였고 명나라 최고 지휘관이었던 군문 형개도 슬퍼하면서 해상에 사당을 짓는 것을 제안했는데 만약 그때 순국해역에 표시물을 세웠더라면 이순신이 자살했다는 설과 은둔했다는 설 등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순천 왜교성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군사들은 송도 부근에 연합 함대가 없는 것을 알고 20일 새벽에 대소함정 약 6백 척이 남쪽으로 내려가 여수해협 동쪽을 지나 남해도 남쪽 앞바다를 거쳐서 거제도에 퇴거한 다음, 패전병인 시마즈 야스히로군과 합세하였다. 남해도로 도망간 500여 명의 일본군은 시마즈 야스히로가 20일 밤에 수명의 군사를 보내 정찰한 결과 남해 선소리에서 만나 조그만 배로 창선도에 옮겨 놓은 뒤에 2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배 10척을 빌려 보내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한 예교성에 들어간 좌의정 이덕형의 보고 내용이 선조실록 1598년 11월 23일에 기록되어 있다.
"이달 19일 사시에 예교의 왜적이 모두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 갔습니다. 유제독이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성에는 다만 우리나라 사람 세 명과 우마 네 필만 있었습니다."
순천 왜교성에는 왜군들이 모두 퇴각하고 없었다. 이덕형의 노량해전 전과 보고서에는 일본함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사망자가 수천 명이라 기록되어 있고 명의 군무에서 조선 조정에 통보한 저노가는 적선 1백 척 포획에 2백여 척 분멸이라 했다. 그리고 1598년 11월 25일 선조실록에는 왜적의 배 1백 척을 포획하고 2백여 척을 불살랐으며 5백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7년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최대 전공을 세웠꼬 최대 혈전을 벌인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노량해협 관음포 바다는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일본 수군의 피가 서로 엉킨 바다였고 이순신의 피도 더해져 있다.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은 24일 가토오, 구로다, 나베시마 군, 25일 모리, 이토오 군, 26일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야스히로, 고바야가와 군 순으로 철군하였다.
이들은 쓰시마와 이키를 거쳐 12월 중에 하카다에 도착하여 전쟁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은 임진년에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던 야망과 정유년에 한강 이남의 하삼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던 망상에 의하여 도요토미 히데오시가 일으켰던 조선 침략 전쟁은 전후 7년 만에 끝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