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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조선시대

창선면의 도세 항쟁

내용
창선면의 도세 항쟁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창선면의 도세 항쟁

 

시대적으로 볼 때 나라의 어려움이 겹칠 때마다 국가와 만족을 위하여 애국 애족심을 가진 사람들이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나라를 구학고자 나타났다. 그러나 후손과 후대 사람들은 진정 그 사람들의 큰 뜻과 진정한 의미와 업적을 알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뿐 아니라 세월이 흘러 우리의 마음속에서 차츰 사라져 버리는 안타까움이 있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병으로 조선이 일제 36년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남해의 향인들 중에도 자주정신과 자립정신을 확립하고자 다양한 방식의 항쟁에 공식 또는 비공식으로 활동하였고 각 분야별로 남해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항일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던 분들이 있었다.

 

(1) 창선면에서 민중 봉기를 한 녹계(鹿溪) 정익환(丁益煥)의 사적비

 

1940년 4월 10일에 창선면 상산리 고개에 녹계 정익환의 사적비가 전립되었다. 민중봉기를 한 민중운동가 녹계 정익환의 사적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창선은 옛 흥선현이다. 조선중엽에 현울 폐하고 진주에 이관하여 목장을 만들어 면민의 면세지로 결정하고 양마하였으니 그 원인은 원래 면민의 소유지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2백여년을 시행해 왔고 개정됨이 없이 세세로 서로 전해와서 면민은 각기 그 생업에 안착하고 있었다.

고종년간의 갑오동학혁명 때에 목장과 결정내용까지 폐하고 국유지로 오인 세금을 징수하는데 빠졌다하여 세금 징부수에 등재하고 소위 도세(賭稅) 납부를 가혹하게 독촉함에 이르자 원인이 잘못됨을 당국에 호소하여 봤으나 선처가 없어 면민은 12년간이나 그 고초를 감내(堪耐)하였다.

49동 만여 명이 장차 생업을 잃고 유랑할 지경이 되었다. 이때 정공 익환은 분개하여 희생정신에 입각 민중 구활(救活)을 스스로 맹세하고 야외에 막(幕)을 설치 축단(築檀)하면 혹 황상께서 아실까 기원하셨다.

기(旣)히 을사년 12월 23일에 민중회의를 개최하여 잘 단련되고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대표자 한 사람을 선정 소원(訴願)과 교섭 등 제반사(諸般事)를 정성껏 관장(管章)케 하고자 정공(丁公)의 종제(從弟) 무근(務根)을 선출 그 임무에 당하게 하니 본인의 사양으로 성사치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음해 병오년 정월 6일에 경성으로 올라가 산 넘고 물 건너 천리 길을 사방으로 분주(奔走)하다가 겨엉에서 피체구금(被逮狗禁)되어 투옥되기도 하고 부군(府郡)의 감독청에서 취조를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4년이 경과하는 동안 6회에 한하여 담판 끝에 언사(言辭)가 논리 정연하고 명민(明敏)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감동케 하더라 무신년 8월 4일에 창선의 토지가 비로소 민유지로 결정되어 종결을 보았으니 이는 사필귀정이라 탄(嘆)하여 말하기를 정공의 종형제분들이 마음을 잡고 자선할 의지를 확고히 하니 첫째, 자기는 희생하더라도 공익을 앞세워야 하고 둘째는 공사(公私)를 경영함에 능수능간(能手能幹)하여 적원(積寃)과 고질(痼疾)에서 창선 사람을 스스로 소생시킬 능력 있는 분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가 부활했는가? 먼저 호소하다 뒤에 웃게된 공과 덕행을 어찌 가히 민몰(泯沒)되게 할 것인가 대개 이와 같은 사실을 후인(後人)이 목격할 수 있게 돌에 새겨 전하노니 영세(永世) 불후(不朽)하기를 알려 말하노라.

 

                         소희 15년(1940)4월 10일

                         나주정씨문중청년 등 건

                         김능 김 영 두 찬(撰)

                         전주 이 기 숙 서(書)

 

사적비 내용 중 을사년은 1905년(공의 58세), 병오년은 1906년(공의 59세) 무신년은 1908년(공의 61세)인 것으로 보인다.

 

(2) 1912년에 기록된 「명악논필」 중 녹계공의 행적

 

명악논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녹계 정익환의 행적에 대한 가문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본 기록은 부당한 도세 징수에 대한 항쟁이 끝나고 공이 65세 되던 융희 6년(1912)이었다.

 

공(公)의 휘(諱)는 익환(휘명(諱名)은 대열(大烈, 40세손))이요 호는 녹계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동방정성의 시조(始祖)는 신라 문성왕때 당에서 래조한 "대양군(大陽君)" 휘는 덕성(德盛)이다.

나주파의 중시조는 "고려검교 대장군(高麗檢校 大將軍)" 휘는 윤종(允宗, 16세손)이며, 입창선(入昌善) 시조는 초암공(草菴公) 윤우(允祐, 30세손)의 7세손인 지비(志飛, 36세손), 지강(志江, 36세손)공 형제분으로 녹계공은 지강공의 현손이다.

차시 한일합병시 초세하 국운이 위태하고 관기가 퇴폐하여 백성들을 침탈하는 시기라 창선목토를 국유와 사유의 분별없이 지세와 도세, 지량세를 징수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극심하고 생활이 극난하였다.

오직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종제대두포와 같이 상고 상백하고 하급수재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신산을 구하려고 자갑진춘으로 지기유추까지 6년간에 범백잡비를 불대중의하고 제비를 자변하니 가산이 탕진하였다.

그래도 공은 전심전력으로 면민의 생활고와 관원의 횡포에 항의하고 독촉 관청에 척진도세로 항거하였다. 공과 면민들의 항의가 너무 거세지자 부득이 수십회 회거하였는데 "정익환이 결막산정" 하고 호취 중당하여 불수관령한다. 여차 한자를 불가침 상치라 하였도다.

최후에는 하동에 있던 일본헌병대를 동원하여 야음을 틈타 공을 체포 연행하자 면민들이 이를 알고 배로 가는 헌병들을 추격하니 헌병들이 총격을 발포하여 2인(김씨, 장씨)이 사망하고 공은 진주로 압송되었다.

기후 면민들과 면내 부녀자들이 관청에 수차 진정하였더니 일본 관원들도 민심을 감안하여 원래 도세의 부당성을 고려한 후, 진주재무서 통첩으로 창선도세를 면제하였다. 그래도 공은 일제에 항거하고 관명을 불수한다는 죄명으로 진주감옥에서 3년 징역으로 고생하였다.

창선면민들이 그 은덕을 기리고 공로를 칭송하기 위해 매호(每戶)에 놋숟가락 한 개씩을 거출하여 공의 송덕비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이를 반대하였다. 공의 사후(死後)에 "창선면장 박장린"이 상신고개에 송덕비를 세웠다. 공은 보국안민하려고 18년간이나 일제에 항거하며 반평생을 보내신 분이다.

"세칭 정대장(丁代將)"이라 하였도다

"진실은 생명이 길고 허실은 생명이 짧다"

 

(3) 출생과 성품

 

녹계 정익환은 창선면 가인리 식포마을에서 조선 헌종 14년(1848) 5월 11일에 부친 정진교(丁眞敎)의 3남으로 태어났다. 나주 정씨 덕성공 40세손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남달리 담이 크고 통솔력이 뛰어나서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여 사천군 선진진에 파견대장 격으로 근무하였기에 그로부터 정대장(丁代將, 대장의 대리근무 또는 보좌 역할을 하였다고 대(代)로 호칭하였음)이라 불렀다. 

정대장은 혼란한 사회의 역경을 이겨 나가면서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품으로 창선면민에게 치명적인 불법 과세를 면세코자 민중봉기를 일으켜 활동하다가 감옥살이를 4년여간 하였고 출옥 후,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을 때 자주독립의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메아리 치고 있었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11일에 항년 72세로 세상과 하직하였다.

 

(4) 창선목장의 유래

 

우선 사건의 발달이 된 창선목장의 유래를 살펴보자. 조선왕조 중종실록에 의하면

 

중종 38년(1553) 진주 흥선과 창선도는 서로 연접한 곳이고 목마(牧馬)가 왕래하여 살고 있으므로 토지를 마음대로 경작할 수 없는 곳이다. 야지에서 논밭을 일구어 농사짓는 것을 민유지라 하여 두초대(豆草代)라는 명목으로 조세를 징수하였고 산간벽지는 목민들에게 양마나 잘하고 먹고 살도록 관유지로 정하여 면세지로 한 것이 절수(折授)라 하였다.

토지가 목장으로 지정되면 절수가 되므로 주민들은 절수하기 위하여 자기 소유 땅을 민유지가 아닌 관유지라고 하면서 토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속이니 조정에서는 주모자를 조사하여 죄를 주라고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목장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나 조선 초기에 더욱 성하였고 특히 도서지방에 두고 양마하였다.

진주목읍지에 의하면 창선목장에는 목자가 489명이고 양마가 882필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번성한 때는 임진왜란 전후로서 말의 수가 수천필이 넘어 용마가 나왔다고 하며 김덕령(1567~1596, 조선 중기 의병장, 임진왜란 때 익호장군) 장군이 진주 주병(駐兵)시 창선목장에서 사나운 말(용마)을 스스로 잡아탔다고 전할뿐 아니라 김덕령이 무고로 구속될 때 말이 며칠을 먹지 않았고, 무죄로 다시 구속될 때는 10여일을 먹지 않아 금부도사가 오지 않아도 미리 알았다는 고사(古史)가 있다. 김덕령 장군이 구속되어 풀려나지 못하자 용마도 굶어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창선목장의 규모는 아주 큰 것으로 보이며, 소속은 진주목 산하에 있었고 창선도민을 목관이 다스렸다. 창선목장은 갑오농민전쟁 때 없어 졌다.

 

(5) 혼란에 빠진 창선도

 

구한말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나라 안은 부정부패로 조정뿐 아니라 민심이 흉흉하였다. 조정에서는 제조부(국가기관이 아님)를 설치하여 해안도서 12개 목장을 삼정승(三政丞)의 식읍지로 만들었다.

이때 창선에서는 조세를 매년 백미 1,000석을 거두어 서울 제조부에 납부하는데 창선면 당저2리 해창에서 조운선이 출발하였다. 그러던 중 갑오농민전쟁으로 제조부는 풍비박산이 되고 목장도 폐쇄되었는데 창선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백미 1,000석을 싣고 호방(戶房)인 김화선(金化善)이 상경하였다.

조정에 도착하여 보니 제조부가 폐지되고 없으므로 김화선은 욕심이 발동하여 백미를 싣고 다시 내려와 마산, 통영에서 잠적해 버렸다.

그후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토지가 민유화되고 조세도 면하게 되었는데 4년 뒤인 1898년에 창선면에 부임한 모간리(某姦吏)가 조세의 착복과 민유지의 감면 등 모든 사실을 알고 고변하였다. 그러자 민유, 관유 관계없이 본래의 세금에다 과태료까지 부과하여 한꺼번에 징수하려고 하니 창선면 전체가 혼란한 지경이었다.

이것을 알게 된 정익환도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목숨을 바쳐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6)  정익환의 활동

 

정익환은 김이후화(金而厚化)와 동지를 규합하고 창선도와 연결되는 모든 선박의 왕래를 끊어 관리들의 내왕을 막고 창선면민이 총궐기하기 시작하였다. 정익환은 전답을 팔아 거사자금을 만들고 「척진도세초환가(斥盡賭稅草還歌)」를 지어 부르게 하는 한편, 산중에 초막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면서 총지휘를 하였다.

장정 수백 명은 정익환을 호위하고 새끼줄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정익환을 체포하려고 하면 새끼줄을 서로 연결하여 인의 장막을 치니 정익환을 감히 체포 하지 못하였다.

이러던 중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군에 의해 조정이 움직이게 될 때인 1906년에 일본군이 창선에 투입되어 무자비한 총격으로 보좌하던 장봉석 왜 1명은 사망하고 정익환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3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럿으나 옥중에서 확고한 신념으로 논리를 펼쳤던바, 창선면민은 세금을 면제받게 되었고 정익환은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7) 진주감옥 생활 중 창선면민 부녀자들의 무죄석방 연좌

 

정익환이 진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룰 때 창선면민 50대 이상의 중년 부녀자들은 매일 10여명씩 감영의 뜰에 연좌하여 정익환의 무죄 방면을 호소하였다. 이것이 누가 시키거나 지휘를 한 것은 아니다. 부인네들이 마을과 마을에서 의논하여 순번을 정하고 교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몇 해를 계속하였다.

이때 창선에서 진주까지 100리 길을 부녀자들은 바다와 육지를 통하여 도보로 앞소리를 주고받으며, 왕복하였는데 생긴 노랫말이 「등장간다」라고 하였다. 내용은 "등장 가세 등장 가세 나랏님께 등장 가세"라 운운하였고 참가하는 부녀자들은 용모 단정하였을 뿐 아니라, 품위 있는 사람들을 서로 선정하여 여비도 각자가 마련하였다.

이러한 창선 면민들의 노력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면세의 특전이 부여되었고 정익환은 석방되었다.

도세항쟁은 부당한 세금으로 인하여 섬사람들의 생계가 위협받았고 망국한의 슬픔으로 인하여 더욱 단결심은 결집된데다 정익환의 체계적인 조직 관리와 우수한 영도력으로 이루어낸 창선 면민의 민중운동이었다.

 

(8) 녹계 정익환의 민중운동에 대한 평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살기를 각오하면 죽을 것이다."

성웅 이순신 충무공께서 남긴 유명한 명언이다. 무슨 일이던 옳다고 판단하였을 때 실천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반 여건이 융합되어야 성사할 수 있다. 결정적인 판단은 신중과 현재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어야 하고 사언행일치(思言行一致)로서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이다.

녹계 정익환은 남해군 창선면민을 위해 부당한 세금 징수에 대항하여 자신이 희생하며 항쟁하였고 옥고까지 치뤘다. 비록 좁은 지역의 항쟁이었으나 사건의 모든 발단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지휘한 녹계는 어려웠던 시대에 조정과 일본에 저항한 민중 운동가였다.

묵묵히 서 있는 사적비가 일제강점기에 세워졌기 때문에 비문 내용이 일본의 감시 때문에 더욱 상세하게 기록되지 못하였고 그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들이 소멸되어 역사를 기록하는데 문제점으로 돌출되었다. 녹계 묘소는 가인리 공동묘지에 쓸쓸하게 안장되어 있지만, 그의 업적은 남해군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