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조선시대 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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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변천사
말(馬)의 고장하면 제주도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제주도의 우마사육은 고려시대 원(元)이 직할령으로 삼아 우마(牛馬)를 방목한데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고려시대 이전에도 목축이 활발하게 행해졌던 지역이었고 국마(國馬) 수요를 상당히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가 원의 직할령으로 된 13세기 후반부터 전통적 유목민족인 몽골족이 들어와 우마를 방목하였고 몽골족 목자(牧子)와 제주 주민이 서로 사육 방식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우마를 길렀다. 이로써 우마사육의 규모와 경험은 고려시대 이후에도 계속 주민이 이어갔고 제주 조랑말도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그러나 고려사를 볼 때 사실상 고려에서도 일찍이 수도 개경과 가까운 광주(경기도), 동주(강원도 철원)등 여러 지역에 10개의 국립 목장을 운영했었다. 의종 19년(1165) 기록에 섬 지역인 도(島)는 환경이 대체적으로 산림이 무성하며 약초와 특용작물이 많이 나는 한편 목초도 풍부하게 자생하는 지역이라 하였고 섬에는 연안지방의 주민도 우마 등의 먹이용으로 목초 등을 베러 오곤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섬 지역을 우마 사육하는 특정지역으로 정했을 것이다.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전국 어디서나 소를 이용한 밭갈이 농경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편이다. 우마를 이용하여 짐 운반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말은 수렵, 승마, 농경 등의 용도에도 쓰여 졌고 매매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수용에 비해 공급이 딸릴 때는 가격이 폭등하곤 했다고 고려사절요에 기록하고 있다.
민가의 말은 국가에서 필요한 전마(戰馬)로 차출되는 경우가 잦았다. 또한 외관과 향리층이 수탈을 행할 때 주력했던 대상 중의 하나가 민간이 기르던 가축 등이었고 그 가축은 소화말인 경우가 허다했던 것으로 보아 많은 일반민가에서도 우마들의 가축을 사육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에서는 10군데의 국립목장을 마련하였고 궁궐에서는 우마, 낙타, 나귀, 노새 등의 가축도 길렀다. 병부(兵部), 전목사(典牧司), 공역서(供驛署), 사복시(司僕寺), 상승국(尙乘局)등은 이들 가축사육을 전담했는데 전투, 수렵, 승마, 통신전달, 농경, 수송 등의 용도에 따라 제공하는 임무도 맡았던 중앙관부였다.
한편 태조 때 중앙군 편제에서 마군(馬軍)부대 병력수가 4만 명이었으니 보군(步軍) 2만3천 명에 비해 훨씬 많았으며, 마군이 주력부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마군 유지에 상당한 말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때문에 고려는 태조 때부터 도(島) 즉 섬 지역에서 말을길러 조달받고 있었다.
섬에는 목초가 풍부하였기에 다른 가축들도 풀어 놓아 사육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방 관아에서는 우마뿐만 아니라 섬에서 생산되는 수산물과 소금, 목재, 약초와 특용작물, 가축 등을 세금으로 취했다. 이 가운데 우마는 용도별로 제공되었거나 국립목장 및 중앙과 지방관아에 배속된 채 계속 사육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말은 고급 관료에게 하사되기도 했다.
고려 때는 전마로도 활용되었지만 주로 승마와 역마용(役馬用) 등에 쓰여 진 소위 향마(鄕馬)라는 재래종과 거란, 여진, 몽골 등이 사는 북방에서 들어와 전마, 수렵, 승마용 등에 주로 이용한 이른바 호마(胡馬) 혹은 적마(狄馬)라고 하는 외래종으로 두 품종의 말이 있다. 섬에서 기른 말은 이들 용도에 전부 사용하였다. 즉 섬에서 향마와 호마라는 두 품종의 말이 모두 사육되고 있었던 셈이다.
2)우마 사육과 국가관리
고려는 초창기부터 한반도 연안의 섬 지역에서 우마를 길러 국가수용에 충당하고 있었다. 이들 섬 지역의 우마는 산 계곡 사이를 막아 설치한 우리에게 길러졌다. 고려사 권82 병2 마정(馬政) 문종 25년(1071)조에 말을 사육하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지시한 내용이 있다.
"판(判)하기를 '도거(島阹)에서 말을 기르는데 능히 잘 보살피지 못해 죽게 한 자는 담당한 도리(島吏)의 죄를 헤아리고 주진(州鎭)의 관마(官馬)를 쇠약케 하거나 손실이 생기게 한 자는 공수둔전(公須屯田)의 수입으로써 말을 사 보충케 하라" 하였다."
고려는 섬 지역 안에서 목초가 풍부하게 자생하는 곳을 방목지로 택하고 거기에 울타리를쳐 우마를 풀어 놓았을 것이다. 이곳 우마가 관리 소홀로 죽었을 때는 도리(島吏)가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이들 섬 지역에 방목한 우마의 관리 책임은 도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들 도리는 토착세력으로서 별도로 행정단위로도 가능하던 도(島)의 향리층이었다. 만약 방목 우마의 손실이 생기면 섬 지역 주민이 기르던 우마로써 보충해야 했다. 이들 한반도 연안의 섬 지역 주민도 울타리가 쳐진 그 방목지에서 우마를 길렀을 것이다.
말(馬)과 관련되는 기록은 고려세가 및 열전 그리고 고려사절요 등 각종문헌 등에 상세하게 적혀 있는데 그 안에는 말의 중요성이 나타나고 있다. 말은 전쟁과 운송 및 농경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고려 중기 이후에는 원나라에 조공으로 말을 바쳤고 생산품의 가격 형성의 주요 요인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고려 초기 성종 1년(982) 정광(正匡) 행선관어사(行選官御事) 상주국(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상서한 시무 28조의 장계 중 15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조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가 궁내에서 공역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교외에 나가 살면서 밭을 갈아 세를 바치게 하고 내구(內廐 :고려시대 상승국(尙乘國)이나 봉거서(奉車署)에서 관장하는 궁궐안의 마굿간)의 말은 현재 타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구(外廐 : 임금이나 제후가 외국산 말을 치는 곳)에 나누어 보내 기르도록 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했습니다. 그런데 광종 때에 와서는 불사를 많이 베풀어 역사가 날로 번다해져 이내 밖에 있는 노비를 불러들여 역사에 충당하니 내궁의 용도로는 이를 지급하는데 부족하여 창고 쌀까지 모두 소비하였습니다. 지금은 내구에서 많은 말을 길러 소비하는 비용이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그 해를 입으니 만약 변방의 난리라도 난다면 군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일체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중의 노비와 내구마의 수효를 참작하여 정하고 그 나머지는 다 밖으로나누어 보내소서"
즉, 말을 기르는 데는 많은 노력과 소비가 되기 마련이다. 궁중에서 많은 말을 사육하는 것은 백성들의 세금으로 길러지기 때문에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궁외에 있는 임금이나 제후가 사육하는 목장에서 말을 길러야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명나라에 공물로 보내기 위해서는 부득이 말을 사육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공민왕 이후 명나라에 공물로 보낸 내용을 살펴보면, 공민왕 21년(1372)에 명나라에 탐라마(耽羅馬) 50필을 바쳤고, 공민왕 22년(1373)에 명경(明京)에 말 19필과 당나귀 2필을 바쳤다. 그리고 중서성(中書省)에 말 2천 필을 보내기 위해 문화평리 한방언(韓邦彦)을 탐라로 보냈고, 공민왕 23년(1374)에 말 3백 필을 보냈다. 또 공민왕 23년(1374) 말 3백 필을 명경(明京)에 보내고, 우왕 1년(1375)에 명나라에 공마(貢馬)로 1백 필을 바쳤다. 세공(歲貢)는 계속되었다. 우왕 6년(1380)에 금 3백 냥, 은 1천냥, 말 450필, 우왕 8년(1382) 금 1백 근, 은 1만 냥, 포 1만 필, 말 1천 필, 우왕 10년(1384)에 세공마(歲貢馬) 1천필, 또 세공마 1천필, 그리고 세공마 5천 필을 보내라 하니 4천필은 보내고 이후 1천 필을 더 보낸다.
우왕 11년(1385) 세공마 1천 필, 우왕 12년(1386) 세공마 1천 필, 우왕 13년(1387)에 초운마(初運馬) 1천 필을 요동으로 압송하니 늙고, 병들고, 왜소한 것은 퇴환(退還)시켰고, 또한 매년 말 1천필을 바치게 했다. 공양왕 2년(1390)에는 종마(種馬) 50필을 바쳤고, 공양왕 3년(1391)에 말 1천 5백 필, 공양왕 4년(1392)에 말 1천 필, 또 말 1천 필을 바쳤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민왕, 우왕, 공양왕 대에만 하여도 세공으로 바친 말이 수만 마리인데 이렇게 많은 말을 사육하는데 탐라도 한 곳으로는 충당하기에 어려웠을 것이다. 전국에 목장을 설치하여 양육하였을 것이고 창선면도 그 중에 한군데였을 것이다.
3) 14세기 이전 창선목장
창선도는 예부터 목장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국마(國馬)를 사육하기 시작했는지 문헌 자료가 없어 알 수는 없다. 14세기 고려 말기에 고려국내에 소요되는 말을 말할 것도 없지만, 명나라에 공물로 바친 말만하여도 수만 마리에 달하는데 그렇게 많은 말을 사육하기 위해서는 말 사육에 적합한 장소로 알려진 창선에서도 이미 목장이 존재하여 말사육에 전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는 1477년에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 진주목 목장지에 말이 737필이고 목장 주변의 길이가 61리, 민가가 17호라는 대체적으로 상세한 기록이 있고 경상도 지리지(1425년)에도 창선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언제 목장이 개설 되었다는 창설 시기는 없다.
그러나 창선은 삼국시대에서 설명했듯이 유질부곡으로 특수구역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곡의 역할 또는 상세한 내용은 없으나 군사적 요충지로써 군사상의 시설과 군사와 관련되는 일들이 수행하지 않았나 추정한다. 특히, 국마를 사육했다고 관련되는 것은 지명이 말(馬)과 연관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지명을 살펴보면, 질마산(疾馬山)을 비롯하여 목초골(牧草谷, 옥천), 마제당지(馬祭當址, 옥천), 감목관지(監牧官址, 상죽), 목장지(牧場址, 상죽), 점마장(點馬場, 상죽), 말덤벙(광천), 목마장(牧馬場, 신흥), 마안산(馬鞍山, 연곡), 질마재(疾馬嶺, 연곡)등을 보더라도 창선 전역이 말과 관련되는 지명이다.
말을 사육하기 위해 풀, 물, 점검, 관리를 위한 곳이 구분되어 있고 국마를 사육하기 때문에 제(祭)까지 지내는 사당이 있었던 것이다. 창선도는 여러 가지 입지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고 고려시대부터가 아니라 그 이전에도 사유 목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 15세기 남해현 금산목장과 흥선도 목장
창선(흥선)은 일찍부터 진주목에 속한 목마장이 있었다. 국가적으로 말의 충당을 위해 남해현에도 점마별감을 두고 말을 사육하자는 의정부의 건의가 있었고 단종은 그대로 따랐다. 남해현의 금산 목장은 단종 즉위년(1452)에 설치되었다. 건의 내용은 오히려 창선목장보다 지역이 넓고 말 3천 필을 사육할 곳이라고 했다. 『경상도지리지(1425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천은 현의 동쪽 25리에 있으며 금산에서 흐르는 물이 동쪽 바다로 흐르는 곳이다. 정유년 그 곳 태복소의 목마가 주민에게 피해를 준다고 하며 현인 정주장과 고대명이 상소하여 허락을 받아 을미년 창선목장으로 돌려 보내고 원전은 용동에 이속시켜 태복시에 세금을 바쳤다.
『단종실록』 단종 원년(1452년 7월 21일) 남해현(南海縣) 금산곶이(錦山串) 목장에 관한 것이다.
의정부에서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중략···남해현의 금산 곶이는 둘레가 90리이고 땅이 기름지고 물이 흡족하여 겨울이 되어도 풀이 마르지 아니하니 말 3천필을 놓아 기를 만합니다. 청컨대 점마별감(點馬別監)으로 하여금 여러 포구의 당번 선군(當番船軍)을 발(發)하여 목장을 만들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상도속찬지리지』 진주목(晋州牧) 목장조(牧場條)와 해도조(海島條)에 의하면,
목장조 "주 남쪽 흥선도 목장 주변은 61리이고 방마는 737필이며 물과 풀이 넓다" 해도조 "주 남쪽 흥선도 주변의 길이는 61리이고 수로로 11리인데 육지로부터 관문까지 38리이다. 논은 67결86부7속이며 민가는 17호이다"
이렇듯 남해현에는 금산곳이 목장이 존재하였고 진주목 흥선현에는 흥선목장이 있었는데 금산목장은 말을 사육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으나 현인(縣人)들이 상소를 하여 흥선목장으로 옮기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흥선목장의 방마(放馬)의 숫자가 737필이라면 큰 규모의 목장이었다.
5) 16세기 흥선목장
창선에 흥선과 창선도가 분리되어 목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선은 본섬을 말하고, 흥선은 적량성이 있는 섬을 이르는 것 같다. 그런데 흥선 쪽에 있는 목장의 목자에게 전토 2결을 주어 목장 내에 들어가 살면서 지키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게첩을 조정 대신, 사복시 제조, 병조가 임금에게 올렸는데 아뢴대로 시행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문헌을 보면 아래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진주목 산천(山川) 흥선도에
주 남쪽 남해 가운데 목장이 있다
「중종실록」 중종 38년(1543) 10월조에 의하면,
진주의 창선 흥선 두 섬은 서로 붙어 있어 목마가 서로 내왕하여 생식하고 있다하니 관문을 굳게 막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고 목장은 함부로 농사짓지 못하게 되어 있는 대도 일꾼들은 면세지로 받고자 버리는 빈 땅이라고 떼 지어 속이니 추고하여 모가비를 벌주자는 청이라서 그렇게 하였다는 사간원의 장계가 있었다.
「명종실록」 명종 13년(1558) 5월 3일조에 의하면,
대신, 사복시 제조, 병조가 같이 의논하여 이뢰기를 '무릇 목장 안에 목자(牧子)를 살게 하고 각각 전토(田土) 2결(結)을 주어 목장의 말을 지키게 하는 것이 법례(法例)입니다. 진주 흥선도의 목자는 그 섬에 살지 않고 또 경작하여 먹을 농토도 없다고 하니 이것은 겸감목(兼監牧)등이 마정(馬政)에 마음 쓰지 않아서 목자들이 사는 대로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이제 법례를 더욱 밝혀서 목장 안에 살면서 지키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서방의 일과 목자의 일은 모두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592년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다음해인 1593년은 조명 협상기이지만, 조선은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때였다. 그래서 흥선도 목장은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으니 갈 데가 없는 김해, 거제 백성들을 흥선도로 들어가서 살게 하면서 농사짓게 하여 군량도 충족시키고 백성도 살아가게 하자는 비변사의 의견에 선조는 따랐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조실록」 성종 26년(1593) 12월 30일조에 의하면,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늘의 형세는 곳곳에서 군량이 고갈되었는데 병란은 풀리지 않아 백방으로 생각해도 대책이 없는데 지난번 전라수사 이순신이 해도의 둔전을 청하여 멀리서 관리의 어려움과 가사 소득도 좋지 못하나 오히려 내지에서 운송하는 폐단을 들게 함이라 듣자하니 경상도 진주 흥선도 목장은 토지도 비옥하여 곡식이 잘 된다하니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현재 한산도 있는데 길이 막히기 전 금년 내에 조치하도록 영을 내려 김해 거제 등 처의 목자와 유민들을 데리고 와서 남김없이 그곳에 넣어 남해 곤양 진주 등 처의 금년 관곡을 종자로 내어 주어 힘써 경작한다면 수확 후 군량도 충족하고 갈 곳 없는 백성들도 살리는 이치이라 지금 원균 군관과 감찰 박치공이 내려가니 이런 뜻을 하유하여 원균과 관찰사 한효순을 그 곳에 보내어 시급히 시행하다 또 목장 내에 마필이 다소 있는 것으로 듣고 있는데 그 중에 큰 숫말은 있는 대로 끌이다 전사용으로 쓰고 나머지 암컷이나 망아지는 번식용으로 무방하니 이 뜻도 헤아려 시행하자"하니 왕이 그에 따랐다.
6) 17세기 흥선목장과 금산목장
임진왜란으로 전국 각지에 있는 목장에는 말이 거의 없었다. 흥선도 목장 땅을 주민들이 사유지라 하고 세금을 호조에 바치니 목장 관리는 사복시에서 관할하는 것으로 환속해야 된다는 사복시의 게첩이다.
「인조실록」 인조 8년(1630) 월조
사복시에서 아뢰길, 임진왜란 이후 각도(各道) 목장에 말이 없는 곳이 많았다····그 중 진주 흥선도 등지의 주민이 전지(田地)를 사전(私田)이라 칭하고 세금을 호조(戶曹)에 바친다고 하니 이는 절대로 안 될 것이며 후일을 위하여 이를 사복시(司僕寺)에 환속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왜란 이후 금산목장에 말이 없었는데 다시 흥선도에 있는 말을 금산목장으로 백여필을 옮겨 목장을 하였다. 그곳 백성들이 피해를 입어 백성들이 진정을 하니 도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말을 흥선도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의 축마비가 순치 12년(1655)에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에 세워졌다.
이듬해 흥선에 있는 말 백여 필을 이 산(금산)으로 옮겨서 목장(牧場)하고 그 산의 적송재를 불지르니 백성들이 말떼의 피해를 입어 그 생업을 잃고 1년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근심하고 떠돌면 서로 흩어지는 자가 태반이고 이고 지고 길을 떠나가니 고을이 장차 비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갑오년(1654) 가을에 고을 사람 전 찰방 고대명(高大鳴), 유학 정주장(鄭周章), 윤귀승(尹貴承) 등의 진정과 도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을미년(1655) 봄에 말떼를 다시 흥선 옛 땅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념비이다.
이 비는 세운지 178년이 지나자 풍우에 씻기고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세우게 되는데 이동면 무림리 현 시장 내에 축마비를 다시 세웠다. 역문한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해현은 벽지(僻地) 바다 속에 있는 섬으로 금산이 그 가운데 있고 그때(고려 말)는 독립한 현(縣)이 아니고 일보(一堡)였으며 금산에는 군마(群馬)를 놓아 막았다. 산은 험하고 송재(松材)가 많았으며 민전(民田)이 그 사이에 끼어 있고 목초(牧草)가 무성했다.
조선초에 하남현(河南縣)이라 칭하고 현령을 배치했는데 말떼가 전야(田野)를 침범하여 농작물에 큰 피해가 있어 목마(牧馬)를 흥선도(興善島)로 옮겨 보내고 황전(荒田)을 개척하고 송재를 길러서 병선용재(兵船用材)에 대비했으며 백성이 즐거이 농업에 종사해 왔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조정의 국방계획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근 이백년을 내려왔는데 순치 9년(1652년)에 흥선도 목자(牧子), 목관(牧官) 등이 국방의 중요성을 모르고 모략을 꾸며 타도(他島)에 목마를 쫓기 위해 점마신(点馬臣)에게 호소하여 그 다음해(1653)에 말 백 여필이 다시 우리 고을로 옮아온 때문에 전토(田土)에 피해가 막심하여 농민들은 그 업을 잃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타읍(他邑)으로 이산(離散)해 가는 자가 속출해서 1년동안에 태반이 줄었고 읍(邑 : 난음리)은 폐허되었다.
갑오면(1654년) 가을에 읍의 전찰방(前察訪) 고대명(高大明), 정주장(鄭周章), 윤기승(尹基承) 등이 규합(叫閤) 진정해서 조정에 건의하여 을미(乙未, 1655년) 봄에 그 목마(牧馬)를 다시 흥선도로 되쫓았다.
우리 현령이 다방면으로 홍보활동을 하고 주장한 공은 후세민이 길이 잊지 않고 칭송해야할 것이다. 그때의 현령은 이후홍규(李候弘奎)인데 정의를 숭상하고 절개가 굳세며 직무에 충실한 이로 난곡사(蘭谷祠) 옆비명에 "첨피금산(瞻彼錦山) 능극우천(堎極于天) 아후지덕(我候之德) 여지제언(與之齊焉)"이라 찬양하였다.
감찰방(監察訪) 고대균(高大鈞), 향소(鄕所) 박이직(朴而直) 등이 순치 12년(1655) 을미 12월에 난곡사 옆 비를 건립했는데 박인걸(朴仁傑)은 짓고 유학(幼學) 고문환(高文煥)이 썼다.
이 비가 오래되어 각자(刻字)가 불명(不明)해진 고로 고우명(高友明)이 영세불망(永世不忘)의 비명이 소멸됨을 안타까이 여겨 분연히 뜻을 결(決)하고 비를 다시 건립키 위하여 현령의 허락을 얻도 향당(鄕黨)과 의논해서 새로 세웠는데 그 뜻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하랴!
이 고우명(高友明)은 전 고찰방(高察訪)의 육세손이고 당시의 태수는 유후상표(柳候相杓)라는 이었다.
7) 19세기 창선목장
창선목장은 19세기까지 계속 운영되었고 전반기에는 말이 882필이었으니 상당히 큰 규모였으나 후반기에 470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목장의 기능이 차츰 쇠퇴 된 것 같다. 『진주목읍지』(1871년) 목장지에 창선목장의 전반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원문과 번역문을 같이 싣는다.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순조 32년경(1832))』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 목장조
창선목장은 진주로부터 90리에 있고 창선면 목자는 489명이며 외양마는 882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