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문화와 역사

Home
문화와 역사
남해의 역사

근대

일제강점기 정치

내용
일제강점기 정치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29일의 한일합병우로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36년간의 식민지 통치시대를 일제강점기라 한다.

19세기 후반의 한국은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대원군(大院君)의 양이쇄국책(壤夷鎖國策)도 무너져 미, 영, 독, 노, 불, 일 등의 열강에게 문호가 개방되었고, 특히 일본은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끈질긴 침투공작을 벌인데다가 개화파라의 송병준은 일본 세력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내적으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의 갑신정변 등의 잇다른 변란으로 조정과 사회는 어지럽게만 되어가고 외세의 침투 역시 날로 더해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얻은 일본은 여세를 몰아 조선에 세력을 구축했고, 청나가에 이어 조선에 침투하던 러시아와 충돌(露日戰爭)하여 다시 승리를 함으로써 조선 병탄을 구체화해갔다.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성립시켜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제1차 한일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통감부를 두고 보호정치란 명목아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이에 고종이 그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1907년의 만국회의에 이준을 파견한 소위 헤이그말사사건(海牙密使事件)은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에 구실을 주어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 체결됨으로써 차관정치(次官政治)가 행해졌다. 잇달아 기유각서(己酉覺書)는 사법권을 빼앗아 갔고, 동년 말에는 군대마저 해산 당했다.

이 해에는 고종황제마저 일본과 친일팔의 칼에 못 이겨 양위하고 말았으니 합방의 기초작업은 이미 이 해에 다 끝난 셈이었다.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합방조약의 체결이 끝났고, 29일에 세상에 공포되어 36년간의 노예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무관출신의 총독을 파견하여 총독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들의 통치형태를 정책변화에 따라 크게 구분하면 무단정치(武斷政治)시대, 문화정치시대, 민족성 말살정치시대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무단정치(武斷政治. 1910~1918)

 

일제는 합방과 동시에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헌병 경찰망을 통하여 무단정치를 단행하였다. 총독은 일본왕에 직속되어 육·해군의 통솔권을 가지고 직원으로 총독부령의 제정(制定) 권한을 가졌다. 초대 총독으로 합방공작을 제일선에서 지휘했던 데라우치(寺內政毅)통감이 그대로 취임했다. 경무총장에 헌병사령관을, 각도의 경무부장에 헌병대장을 배치하였다.

조선의 정치적 결사와 집회는 금지되고 대한매일신문 등의 언론기관은 폐쇄되어 경성일보에 통합되었다. 그들은 의병(義兵)을 불령지도(不逞之徒), 독립운동가를 완미지도(頑迷之徒)라 하여 재판을 거치지 않고, 헌병이 투옥 형(刑)·과료(科料) 등에 임의 처벌할 수 있게 했다.
교육기관도 교원에게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착용하여 위세를 보였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자기네들의 식량고급지, 원료공급지, 상품시장으로 개편하기 시작하였고 그 선행 사업으로 철도, 항만, 도로, 통신 등의 기반시설 조성에 착수하였으며 화폐와 금융제도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대규모의 토지조사사업을 전개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워 많은 토지들을 강탈 하였으니 이러한 제반 사업의 착수는 수탈을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일본에 의한 강압적인 식민지적 사회구조의 형성 과정에서 탄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은 제1차 대전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활기를 얻어 마침내 3.1운동이란 민족적 대봉기를 결행하여다. 

 

2) 문화정치(文化政治, 1919~1930)

 

3·1운동은 10여 년 동안의 일제의 탄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의 우리 동포들까지 총 봉기한 민족의 대항쟁이었다. 3·1운동은 그 해 4월 7일에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으로 결실을 맺었고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주권회복 투쟁에 나섰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무단정책을 유화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8월에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을 파견하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민족적 차별을 제거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문관 출신인 총독을 보냈고 총독의 육·해군 통수권위임(統帥權委任)의 조항을 삭제하였다. 헌병경찰제도 또한 보통경찰제로 개정하여 그 사무집행권을 도지사에게 넘겨 형식상이나마 지방분권적 자치제도를 내세웠다. 그리고 관리·교원의 착검·제복도 폐지하고 태형은 벌금형으로 대치하였다.

언론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우리말 신문 간행을 허용하고, 소수인에게 정치참여를 허용하였다. 신간회(新幹會) 등의 애국단체가 결성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또 조선인 관리 임명의 범위를 확대하여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를  완화했으며, 보통학교장에 조선인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정책은 극소수의 조선인에게 혜택을 줌으로써 우리민족을 분열시키려는 흉계였을 뿐, 일본의 기본적 대한정책은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그들은 조선 경제를 완전히 일본경제에 예속시킴으로써 식민지 경제체제를 확립시켰는데, 그 정책의 하나가 '미곡중산계획'이었다. 일본은 개항 이후부터 조선을 그들의 식량공급지로 삼아왔는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에게 소요되는 쌀을 조선에서 계획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이 '미곡중산계획'의 핵심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조선의 부족한 식량은 만주로부터 그들의 잡곡으로 보충하였다.

농업생산은 쌀을 위주로 하는 단작형(單作型)농업으로 변경시켰지만 고율의 지대, 현물지대(現物地代) 등 봉건적이고, 관습적인 소작관계와 경영형태는 그대로 존속시켰다. 그 결과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졌고 농민의 몰락을 더욱 확대시켰다. 한편 제1차대전 후 전쟁경기가 지나가자 일인 자본가들은 식량공급지로만 삼으려고 하던 조선을 투자시장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1920년에 조선총독부는 종래의 회사법을 변경하여 일본인의 회사 설립을 자유롭게 만들고, 관계법을 개정하여 일본상품의 유입에 별다른 구애을 받지 않게 하였다.

따라서 일본인 회사가 날로 늘어가고, 자본도 구애 없이 투입되었다. 1926년에 함경도 부전강의 전력개발을 위한 조선수력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그 전력을 이용하는 대규모의 함흥질소비료주식회사가 설치되었다. 조선인의 저렴한 노임과 장시간 노동은 일본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투자조건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자원 독점과 자본 진출은 임금노동자를 급속도로 증가시켰고,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자가증상을 일으켜 1929년 원산파업(元山罷業), 이듬해의 서울제네스트(Genest) 등의 대규모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이리하여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층 등이 서로 협력하며 각 운동의 주체가 된 소작쟁의(小作爭議), 노동쟁의, 학생운동 등 사회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1920년대 사회운동의 확산은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 신간회의 결성과 조직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해외에 망명한 동포들의 항일투쟁 등으로 총독부의 사상운동에 대한 탄압 역시 더욱 강화되었는데,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일본의 조선 통치는 또다시 전환해 미증유의 탄압이 우리민족에게 가해졌다.

 

3) 민족성 말살정치(民族性 抹殺正治, 1931~1945)

 

일제는 대륙침략의 야심을 품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란 괴뢰정부를 세웠고, 1937년에는 북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대륙침략을 구체화 시켰다. 나아가 1941년에는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에 도전하여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계속되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은 조선을 그들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이를 위하여 중공업, 군수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에 인적, 물적 모든 자원이 동원되었다. 특히 1936년에는 신교육령을 제정하여 국체명(國體明),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鏄練)의 3대강령을 내세워 한국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학교의 조선어 과목을 폐지시켰으며 조선의 언어와 역사를 연구하는 조선어학회, 진단진회는 해산되었다.

또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우리말 신문을 폐간시켜 민족문화를 완전히 말살시키려 하였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暑詞)라는 것을 만들어 각 기관에서 수시로 외우게 하였고, 애국일을 정하여 신사참배, 궁성요배, 일장기 계양, 정오의 묵도, 국민복과 전투모 착용 등을 강요하였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이라 하여 일본식 이름과 성으로 고치게 했고, 집집마다 일본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카미(天照大神)를 섬기게 하는 등 고유의 민족성을 박탈하는데 사력을 다하였다. 1937년에는 육군지원병제를 실시하고, 근로보국대를 조직하여 군사시설, 중공업에 강제로 인력을 동원하였으며, 1943년 5월에는 징병제를, 이듬해 11월에는 학병제를 시행하여 청장년은 모조리 침략전쟁에 총동원시켰다. 뿐만 아니라 공출이란 이름으로 식량 등을 징발해 갔고, 통제경제로 온갖 물자를 배급제로 하였기 때문에 당시 우리국민의 사정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공협회, 국민총력연맹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사를 색출하여 투옥하였고, 1931년 이후부터 국내의 사회운동에 극도의 제한과 탄압을 가했으므로 독립운동은 주로 그 무대를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두고 활약해야 했다. 이 무렵 우리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으며 광복군이 중국군을 도와 일본과 싸웠다.

전쟁 초기에는 기세가 충전하던 일본군은 1942년 6월 이후 미국의 대반격 작전으로 각 전선에서 후퇴와 옥쇄를 거듭하는 등 폐색이 짙은데다가 동맹국인 이탈리아, 독일이 계속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고립상태에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이어서 미 전폭기에 의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드디어 감격의 광복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