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근대
일제강점기의 생활
상세내용
1) 행정
조선총독부를 최고기관으로 그 장관인 총독은 일본천황의 직속 하에 육해군의 통솔권을 가지고 직권으로 총독부령의 제정 권한을 가졌으며,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관제를 제정, 공포하여 일본 관리에 의한 지배체제를 편성할 수 있었고, 또 그대로 시행되었다. 정무총감은 부무(府務)를 총괄하였으며, 그 밑에 5부 9국을 두었다.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을 비롯한 경무총감부, 취조국, 재판소, 철도국, 통신국, 전매국, 임시 토지조사국 등이 있었으며, 지방조직은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1914년의 개혁을 거쳐 1941년에는 13도 21부 218군 2도 88읍 2,253면으로 확정되었다. 여기에는 도지사, 부윤, 군수, 읍면장, 도사(島司) 등이 배치되어 사무를 집행하였다. 뒤에는 지사관방(知事官房), 내무부, 산업부, 경찰부를 두고 각 부장은 도사무관으로서 임명되었다.
1926년에는 세제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세제도의 강화를 단행 소득세, 지세, 영업세 등25 종의 세금을 규정하였으며, 사법제도는 사급삼심제(四級三審制)를 실시 고등법원(서울), 복심법원(覆審法院 : 서울, 평양, 대구)를 두었으며, 특히 독립운동자와 사상운동가를 단속할 목적으로 전국 7개처에 사상보호관찰소를 두었었다.
그들의 조선통치는 중앙의 경무국(警務局), 242개처의 경찰서 23,332개소의 주재소(駐在所), 242개처의 파출소를 두고 사무관 13, 경시(輕視) 71, 경보부 895, 순사 20,326명을 배치(1941년)하여 총독정치 수행에 앞장서게 하였다.
2) 경제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일본에 의한 경제적인 변혁 중에서 사회적인 파급이 가장 컸던 것은 토지조사 사업이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조선인 토지를 강점하게 한 이 사업은 이미 통감부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1910년 토지조사국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1912년에 반포된 토지조사령에 의하면, 토지의 소윤주는 일정한 기간 안에 그의 주소, 성명, 소유지의 지목, 지적 등을 신고하여 그 사유권을 인정받게 되어 있었으나, 이 신고에 누락된 많은 토지는 그대로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고 과거에 왕실, 궁원(宮院), 관청 등 공공기관에 속해 있던 궁장전(宮莊田)이나 둔전(屯田) 같은 토지도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1936년 통계에 의하면 총독부가 소유한 전답과 임야는 888만 정보나 되었다. 그리고 총독부가 소유한 토지 일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나 불이흥(不二興)등 일본인이 경영하는 토지회사나 이민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었다. 1910년의 통계에 의하면 전 농가호수 약 264만중에서 지주가 2.5%, 자작농 20.1%, 자작 겸 소작농 40.6%, 순 소작농 36.8%의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인들은 토지 뿐 아니라 자원도 독점하였다. 어업도 많은 일본인이 이주하여 우리 어민보다 우수한 선박과 기구로 많은 어획량을 올렸고, 산림보호도 구호만 내세우고 식목한 것, 이상으로 벌채하였다. 광산은 일본인 재벌들에게 넘겨주어 금, 은, 철, 납, 중석, 석탄, 같은 것은 수천배의 생산량을 보였다.
총독부는 철도, 항만, 통신, 항공 등의 시설을 운영하고, 인삼, 소금, 아편 등을 전매하여 거액의 수입을 보았다. 조선은행이나 농공은행(식산은행), 금융조합 등의 금융기관도 조선인에게는 제한된 융자만 하고 있었다. 수출입에 있어서 1921년에는 수입액의 75.6%가 전제품(全製品)이었다.
그 품목은 일용품이 대부분이었고, 조선의 일본 수출은 쌀을 그 중요 내용으로 하는 식료품이 대부분이었고, 그 다음이 원료와 원료제품이었다. 식민지 경제의 면모는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20년 대 조선은 일본의 투자시장으로 변모하여 갔다. 조선은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할 수 있었고, 부전강(赴戰江)은 풍부한 전력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에 대화학공장이 건설되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대표적 대기업으로는 미쓰이(三井), 미쓰비스 등을 들 수 있다. 1925년 공산액은 총생산액의 17.7%, 1931년에는 22.7%, 1936년에는 31.3%로 증가하였고, 그 반면에 농산액은 감소되었다. 광업은 민주사변 당시보다 증일전쟁 시에는 4배로 증가하였는데, 그 중 금광이 더 활발하였다.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용 물자를 미국 등 해외에서 수입하는 데는 금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전쟁 시에는 금보다 철, 석탄, 중석, 흑연, 마그네사이트, 수연 등으로 옮겨졌다. 한편 우리국민들 중에는 일본 자본에 억압, 위축된 민족자본을 육성하기 위한 민족적운동을 전개하였다. 물산장려회는 그 방법으로 국산장려를 위시하여 소비절약, 금주, 금연 등을 홍보하였다. 민족자본가들 중에는 경성방직(京城紡織)의 김성수(金性洙)처럼 중앙중학, 보성전문, 동아일보 등과 같은 학교와 언론기관을 운영하면서 민족계몽에 이바지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미곡중산계획은 농업인구에 변화를 가져왔다. 자작농은 줄어들었고 영세농민을 증가시킨 이 정책들은 농촌의 몰락을 가져왔고그 결과로 임금노동자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임금노동자는 1921년의 약 1만명 내외에서 민주사변이 일어났던 1931년에는 14만명을 돌파하였고, 중일전쟁이 일어났던 1937년에는 27만, 태평양전쟁 때에는 73만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는 아주 가혹했다. 1937년 일본인공장 노동자의 임금은 7원 88전이었으나 조선인은 95전, 여공은 48전이었다.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노동쟁의가 증가되어 1912년에 6건, 1921년에는 36건, 1926년에는 81건, 1931년에는 205건에 달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공출제도라는 특수한 강제수매의 방법을 취해 농산물을 비롯한 기타 물자에 이르기까지 40종에 달하는 농산물을 바치게 했고, 농산물은 생산량의 70% 이상을 할당하였다.
3) 문화
(1) 국학 연구의 발달
주권 부재시기였던 이때의 문화는 저항기의 민족문화이며, 모든 것이 주권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무력으로 일제에 항거하기보다 붓으로 대항한다는 것을 표방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워 겉으로나마 탄압이 줄어들었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이윤재(李允宰), 한징(韓澄), 이극로(李克魯), 정인승(鄭寅承), 김윤경(金允經),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장지영(張志暎) 등이 조선어학회를 조직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창, 『표준어사전』『큰사전』등의 편찬, 기관지 『한글』의 발행 등으로 우리말과 글의 정리와 보급에 이바지하였으나,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30여 만명의 회원들을 검거 투옥하여 활동을 제지시켰다.
국사연구에 있어서 신채호(申采浩)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한민족의 독립정신과 전통을 밝히는데 노력하여 민조사관의 기반을 다졌으며 최남선(崔南善)은 많은 고전을 간행하는 한편 고대사 연구에 힘썼다.
박은식(朴殷植)은 『한국통사(韓國痛史)』『이순신전(李舜臣傳)』『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등을 편찬하여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에는 이병도, 고유섭(高裕燮), 김윤경(金允經), 김두헌(金斗憲), 이윤재(李允宰), 손진태(孫晋泰), 신석호(申奭鎬) 등 24명의 국학연구가들이 진단학회를 조직하여 『진단학보』를 14집까지 계간으로 발간하였다.
한편 일본인에 의한 우리나라 문화 연구도 활발하여 중추원에서는 구관조사(舊慣調査)와 법전 수입을 착수하고,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 일인 학자들이 주로 고대의 유물·유적의 발굴조사를 실시, 고고학에 기여한 바 있으며, 총독부 안에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사료 수집을 하는 등 우리역사연구에 기여한 바 있으나, 『조선사』는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일제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만 선택하여 서술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왜곡은 더욱 심해졌다.
(2) 현대문학운동
신문학운동은 최남선(崔南善)의 신시운동과 이광수(李光洙)의 현대소설 개척으로 우리의 현대문학에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하였다. 1919년대부터는 퇴폐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등의 문예사조가 형성되었다.
특히 김동인(金東仁), 주요한, 전영택을 중심으로 하는 창조파(創造派), 염상섭(廉想涉)을 중심으로 하는 폐허파(廢虛派), 이상화(李相和)등을 중심으로 하는 백조파(白鳥派), 최서해(崔曙海), 박영희(朴英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경향파의 유파를 중심으로 문학사조를 같이하는 문인들끼리 결속되었다.
고전문학에서는 양주동(梁柱東), 이병기(李秉岐), 이은상(李殷相) 등에 의해 고전 해석과 현대시조가 시도되었고, 이광수, 박종화에 의해 역사소설이 많이 쓰여졌다.
아동문학에 있어서는 방정환(方定煥)을 중심으로 새싹회를 조직하여 1922년에는 잡지 『어린이』를 발간하였다. 잡지는 1920년대를 기점으로 『소년』『청춘』『계명(啓明)』『창조(創造)』『폐허(廢墟)』『백조(白鳥)』『개벽(開闢)』『조선문단(朝鮮文壇)』『서울』『장미촌(薔薇村)』『금성(金星)』등 많은 잡지가 발간되었다. 한편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일반, 민간신문이 간행되어 우리의 주장과 문화 보급에 기여하였다.
(3) 예술활동
1922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어 우수한 화가를 많이 배출하였고, 연극에 있어서는 원각사(圓覺社)를 중심으로 1910년경부터 신극(新劇)이 일어났고, 1920년대에는 박승희(朴勝喜), 김기진(金基鎭), 이서구(李瑞求)등의 토월회(土月會), 1931년에는 서향석(徐恒錫), 김진섭(金晋燮)등의 극예술연구회의 활동으로 현대극의 발전을 보았다.
영화는 1921년부터 이필우(李弼雨), 윤백남(尹白南), 안종화(安種和), 나운규(羅雲奎)등의 활동으로 제작되고 유지되었으며, 음악은 홍난파(洪蘭坡)등이 선구적 활동을 하였다.
(4) 교육사업
일본의 교육목표는 완전한 식민지국민 양성에 있었다. 합방과 동시에 각급 학교장은 일본인으로 교체되었고, 교원은 제복 착검하고, 차별교육을 실시하면서 교육기관은 일어 해독을 할 정도의 보통교육과 단순 업무를 담당할 기술자 양성을 위한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으나, 조선인의 입학은 극히 제한되어 그 혜택은 별로 받지 못하였다. 대학교육은 문화정치 이후 사립학교 설치가 다소 완화된 것을 기회로 민족 지도자 및 외국 선교회에서 설립하여 운영하는 사립학교들인 연희전문(현, 연세대), 보성전문(현, 고려대), 불교전문(현, 동국대) 등에서 이루어졌다.
일제는 오히려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 유학을 음성적으로 유도하여, 1931년 일본의 유학생 수는 3천 여 명에 달했는데, 이시기의 미국 유학생은 490여 명이었다.
서구의 근대사상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번역문화를 통해서 섭취하게 마련이었다. 학제는 보통 6년, 중학교 5년, 대학교 4년으로 제정되었으며, 그밖에 실업학교, 사범학교를 두었다. 한편 교과과정은 초기에 국사와 우리말 강의를 허용하다가 중일전쟁 무렵부터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국사와 우리말 강의를 철폐하고, 학교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쳤고 심지어 일부 남학교를 여학교로 전환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보통학교 아동들에게까지 국어사용이란 표어를 내걸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등 황국신민화 운동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5) 종교운동
일제는 1911년에 사찰령을 내려 국내 사찰을 총독 관할 밑에 두고, 사찰이 허가없이 불사이외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사찰재산은 총독의 허가 없이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게 했다. 사찰은 본·말사로 구별되어 36개의 처의 사찰을 본산으로 삼아 서울에 연합사무소를 두게 했다. 합방 당시 전지 200만 두락, 임야 40만 정보 1,399여의 사찰, 7,000여의 승니가 이에 소속되었다.
불교연합총회에서는 초등, 중등 교육사업에 착수하고, 단체활동으로 불교청년회, 불교진흥회, 불교부인자선회 등이 설립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 유교는 시대적 추세와 일제의 통제와 감시 하에서 그 세력이 위축되는 반면, 천도교와 기독교는 날로 팽창하여 종교적인 집회나 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유교적 기반이 약한 평안도, 황해도 지방이 더 활발하였다. 천도교는 교단조직을 정비하여 신도 100호 이상의 지방을 1교구로 정하여 총교구가 185교구에 이르렀고, 북간도까지 뻗쳤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갖은 방법으로 탄압을 가해 기독교의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에 대체하여 신사참배, 궁성요배로 우상숭배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환기시키려고 전력을 다하였다. 1941년 당시만 해도 전국에 62개소의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