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문화와 역사

Home
문화와 역사
남해의 역사

근대

일본군의 남해주둔

내용
일본군의 남해주둔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일본군의 남해주둔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고, 국민징용법을 만들어 전쟁에 필요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징용·징발하고, 노무자까지 징용하여 일본의 인적자원으로 한국의 청·장년들을 희생시켰다.

지원이라는 미명아래 지원병제도를 실시하여 강제로 모병했다. 한국은 단순한 병참기지라기 보다 가장 중요한 전력원(戰力源)으로 침략전 노예화의 양태를 나타내었다. 지원병 아닌 강제 모병은 징집제도가 확립되면서 없어졌다. 일제의 동원정책은 병력관계에서 보면 징병, 학도병, 해군지원병, 해군징집 등 4대 조치가 취해지고 노무동원을 위한 국민징용령을 발동한다.

군속도 이미 동원되었고, 여자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선박구난(船舶救難) 의용전투대의 편성이 있었다. 한편 인적전력원(人的戰力源)으로써 노무동원(勞務動員)은 병력동원 보다 더 가혹하였다.

1938년 6월 13일 학교근로보국대 실시요항을 발표한 다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근로보국대 시행요령을 발표하면서 이를 강력히 추진하여 나갔다.

1938년 7월 1일 학교근로보국대가 동원된다. 한국 내에서 총독부에 의한 근로보국대의 강제 동원이 장기화되고 여기에 동원된 한국 노무자들은 극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강요당했다.

근로보국대의 인원수는 1940년도에 65만, 2,481명, 1944년도에 192만 5,272명이었다.

일본이 이렇게 물적, 인적, 정신적 수탈을 한 것은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해 준비를 한 것이며, 태평양 전쟁 승리를 위한 최후 발악이기도 했다.

그때의 국세정세는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9월 일본, 독일, 이태리가 삼국동맹을 맺고,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1943년 이탈리가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여 태평양전쟁은 종식하게 된다.

남해에 일본군이 주둔하게 된 것은 1941년으로 추정된다. 목적은 중요한 군사, 항구도시인 여수를 보호하고, 연합군의 기습상륙작전을 봉쇄하는 일이었다. 일본 주둔군의 진지는 남면 홍현리(虹峴里) 가천으로 다치마(立間) 육군 중위가 지휘하였다. 10개 동의 병영이 건설되고, 200명 정도 일본군들이 주둔하였다. 그 병영은 지금 논이 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1941년 남면 선구리(仙區里) 항촌에도 일본 해군이 주둔하였다. 히라다 병조장의 지휘 아래 목조건물 2동(건평 40×2)에 1개 소대 규모의 병력이 전함은 보유하지 않고 경계를 주임무로 배치되었다.

1942년에는 남면 선구마을의 옛날 선구 간이학교가 있었던 자리(선구 아랫마을 창고, 선구리 1283번지)와 하봉은씨 밭(선구리 1283번지)에 병영을 건설하였다.

다치마 육군 중위의 부대는 선구와 사촌 사이에 있는 암벽을 뚫어 요새를 구축하는 임무를 띠고 남해에 거주하는 근로보국대를 동원하여 작업을 시작했다. 다치마 중대의 구성원은 모두 일본인었으며, 근로보국대는 대부분 남해사람이었으나 간혹 하동사람도 있었다. 1일2교대로 12시간 근무하는 중노동보다 심한 노예노동이었고 강제노동이었다. 식사는 보국대에서 자체 공급했으며, 옥수수, 콩깻묵, 안남미가 재료였고 그것마저도 양이 모자라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노력동원이 되었다.

근로보국대의 취침은 장소가 없어서 선구마을 민간에 민박이라는 형태로 해결하는 생지옥의 연장이었다. 한집에 보통 5~6명이 숙박하였고 선구 호수가 그 당시 100호를 넘었으니 선구 석굴요새를 구축하기 위하여 동원된 근로부국대원의 숫자는 500~700명이었다. 석굴을 파는 기구는 현대적 실비가 없어서 정과 망치, 곡갱이 등 극히 원시적인 기구였고, 이 기구를 가지고 밤낮 24시간 악 조건하에서 강제 동원된 근로보국대가 종사했다. 이 요새를 건설하는 목적은 고사포, 야포 등 대안포를 설치하여 대공포 역할까지도 겸하게 하였다.

석굴요새는 총 아홉 개를 계획환 흔적이 발견되며, 거의 완선된 석굴은 2개로 그 하나의 길이는 38m, 또 하나의 길이는 16m 정도이다. 모두 완성되면 들어가는 구멍은 하홉 개이고 안은 서로 연결하여 큰 광장을 만들어 요새화된 병영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 요새는 연합국의 기습 상륙작전을 막고 끝까지 항전하려는 일본군의 최후의 결전을 위한 진지 구축 작업이었다. 즉, 지난번 공개된 일본 도쿄의 지아대 본영 건설 목적에 상당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석굴의 폭은 3m, 높이는 2.5m정도이고 석굴의 중간에서 이리저리 파 들어간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9개 석굴을 서로 연결하기 위한 통로로 생각되며, 그 가지 석굴은 동북쪽으로 6m 또 중간지점에서 바다 쪽으로 2m정도 파 들어가다 해방으로 중단되었다.

이 석굴을 만들면서 낮에는 석굴을 만들고 밤에는 포대건설을 위한 이원작업을 하였고 미군비행기의 공습이 있자 한두번 대공포를 발사한 적이 있어서 포대는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있었고 석굴의 완성까지는 많은 시일이 더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남면 삼남초등학교에 하라(原) 대대, 히라노(平野) 대대, 노도(等野) 대대 등 3개 육군대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3개대대 구성원은 모두 일본인이었으나 강제 정집된 한국인이 간혹 있었다. 삼남초등학교에 주둔한 주둔군은 학교 앞산과 동산에 선구 주둔군에게 보급 받은 남해의 근로보급대를 동원하여 토치카로 건설하기 시작했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들은 선구 뒷산 산정에 한 개의 석굴을 만들었다. 벼락바위 부근에는 석굴을 파기 시작하다 포기했다.

처음에 3개대대가 주둔했을 때는 삼남초등학교 학생들은 교실에서 공부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물리자 교사 모두를 징발하여 교실에서 취침, 식사를 하여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겨나 동네 집회소에서 분산되어 수업을 받았다. 가천마을 주둔군, 항촌마을 주둔군, 선구마을 주둔군, 삼남초등학교 주둔군은 모두 여수의 주둔 병력인 니시마루(西丸)대대에서 각기 따로 명령을 내렸고 남해에 있는 주둔군은 니시마루의 명령에 따랐다.

전기시설은 모두 자가 발전해서 사용했고 통신시설은 여수에서 항촌까지 해저케이블로 여수와 항촌까지 해저케이블로 여수와 항톤이 교신했다. 남해 각 주둔군간의 통신은 전쟁 중이라 물자곤란으로 동선이 아닌 철선으로 대체하여 지하에 매설하여 교신했다. 이 철선의 매설을 위하여 전신주를 1.5m정도 높이로 매설했다. 이 거창한 석굴요새가 진행 중에 8·15해방이 되어 한국인 근로 보국대는 자진 해산하고 일본 주둔군 중 삼남학교 주둔군은 빨리 퇴각했으나 선구에 주둔했던 다찌마 중대는 1개월 정도 남해 선구에 주둔하면서 남해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선구에 집결시켜 선구에서 여수대대 연락용 선박으로 여수로 가서 여수에서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거대한 석굴요새와 남해 남면의 일본군 주둔은 전남 돌산면에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아 여수를 연합국의 상륙지점으로 보고 섬구에 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선구해안에 있는 자갈은 니시마루 대대에서 여수로 실어가 여수 오동도 연육공사에 사용되었다. 또 니사마루 부대가 군진지 구축을 위해 선구 자갈을 무한정 골재로 채취하여 갔다. 이것은 남해 선구의 한숨과 땀으로 뒤범벅이던 역사적 현장은 이젠 박쥐들의 서식처로 잔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