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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현대

한국전쟁과 남해

내용
한국전쟁과 남해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한국전쟁과 남해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상잔으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에 의하여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 양대진영의 대립이 열전화한 첫 실전이며, 지역적인 한계를 가졌던 국지전이었지만 양대 진영의 주요국가들이 모두 참전한 전면전이며 국제전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지닌 전쟁이다.

 

1) 한국전쟁 원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인민정부을 세웠다. 북한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친일파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였다.

1945년 9월 인천항을 통하여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인민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김구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고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일본 총독부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이것은 남한 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19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였던 토지개혁을 자신의 집권 후에 실시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혼란을 더욱 가증시켰다.

정부수립 이후, 김구 암살과 반민특위(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 해체 등이 이어지며 이승만 정부의 인기는 떨어졌고 국민들의 의지에 역행하는 정부의 정책으로 인하여 빨치산 활동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불안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국면을 해소하기 위하여 선거직전인 1950년 4월에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지만 1950년 제헌국회의 임기가 만료되어 제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월 30일 총선거에서 무소속 의원이 국회의석의 과반수를 점했고 여당은 패배하였다.

북한은 1948년 2월 인민군을 창설하고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여 국공내전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1949년 3월 소련과 비밀군사 협정을 체결하여 남침 준비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분단정부의 수립 이후 지속적으로 민족의 평화통일과 그 실현을 위한 각종 회담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로 남침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50년 15억원에 달하는 공채를 발행하여 군비강화를 서둘렀으며, "조국보위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비행기, 탱크 등의 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이중적인 행동은 6월 25일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남침 18일전인 6월 7일 해방 5주년 기념일에 남북통일최고입법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자고 하였고 남침 6일전인 19일에는 다시 남한 국회가 동의만 하면 21일 최고인민회의 대표를 서울로 보내든지 또는 남한국회 대표를 평양에서 맞아 남북국회에 의한 통일정부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제의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6월 1일 북한에 감금돼 있는 조만식 선생과 남로당 지하조직들인 김삼룡, 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6월 10일에는 북한 공산군 총참모장 강건이 예하 각 사단장 및 여단장을 비상 소집하고 "각 부대는 6월 23일까지 전투배치를 위한 아동을 완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8일에는 다시 "공격을 개시할 만반태세를 갖춰라"는 김일성(金日成) 명의의 훈령을 하달했다. 12일부터 북한 공산군의 38선 배치를 위한 부대이동을 살펴보면 나남에 있던 5사단, 함흥에 있던 2사단 귀주에 있던 1사단, 평양 근처에 있던 4사단 105사단, 사리원에 있던 6사단 등 38선에서 떨어져 있던 부대들이 일제히 남하했다.

23일에 완료된 북한군의 38선 배치병력을 보면 10개 보병 사단과 1개 전차사단 및 3개 경비여단 등으로써 북한군의 총병력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편 국군은 보병 8개 사단 중 옹진에 17연대, 개성 지구에 1사단, 동두천 지구에 7사단 춘천과 원주 지구에 6사단, 주문진과 강릉지구에 8사단 등 도합 4개 사단 및 1개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는 서울의 수도 사단을 제외하고 모두 대전, 대구, 광주 등의 후방에 있었다. 장비에 있어서도 국군은 북한군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미미했다.

이와 같이 국내적 원인과 아울러 국외적으로도 당시의 정황을 보면, ①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대륙에 공산 정권을 세웠으며, ② 1949년 6월에 이미 주한미국이 철수를 완료했으며, ③ 당시 미국이 설정한 태평양 방위권에서 대만과 한국이 제외되어 있었다는 것 등이 북한의 침략시기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2) 6·25 한국전쟁과 남해

 

한국 전쟁에서 주민 학살은 크게 세 주체에 의하여 행해졌다. 북한 인민군과 빨치산, 남한국군과 경찰, 지역주민(상호 보복)이다. 전쟁 기간 중에 남북한 군인들에 의해 벌어진 학살들은 대게 정치범에 대한 것과 군사적 필요에 의해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지역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친 것은 공동체 주민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이었다. 남한에서 벌어진 상호보복 살인의 시작은 보도연맹이었다.

보도연맹이란 1949년 6월에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인데 이 조직의 가입자 수는 전국에 30만 명에 달했다. 결성 목적은 좌익세력을 통제, 회유하려는  것이었으며, 활동 목표는 대한민국 정부의 절대 지지, 북한 정권 절대 반대와 타도, 공산주의 사상 배격·분쇄 등이다.

그 무렵 좌익계열이라고 지목되는 사람들을 각 동리(洞里)별로 2~4명씩 보도연맹에 가입시켜놓고 중요 사찰 대상으로 관리해 왔다. 그러나 좌익계열 인사가 마을마다 2~4명씩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치사상과 무관한 주민들도 마음별로 할당된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 보도연맹에 다수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남지역에서는 정부, 경찰이 초기 후퇴과정에서 보도연맹원을 무차별 검속하여 집단 학살을 단행하였다. 남해경찰서는 사태가 악화되자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子備檢束)하여 복골, 진섬 등지에서 집단 살해하였는데 그 숫자가 몇백 명에 이르러 그들의 가족들은 매일 시신 수습을 위해 여기 저기 헤매고 다녔다.

북한군이 점령하고 난 후에는 상황이 달라져 보도연맹원(保導聯盟員)의 가족들에 의해 보복 살인이 진행되었다. 재판 절차가 없는 즉자적이며 개인적 보복 수준이었고 소규모로 일어난 일들이 많아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대검찰청수사국에서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 의하면 "8월 하순, 경남 남해군 창천면(창선면 혹은 설천면)에서 보도연맹 유가족 70명과 치안대가 경찰 5명 등 7명을 학살하고····"라 기록하고 있다. 한주윤의 증언에는 고현면장(정현석), 고현면 대한정년단장(이숙기), 우익단체 간부 4명(김갑동, 박호영·····)등이 고현면 도마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북한군의 남해 침입은 삼천포 방향과 하동 방향 두 군데였다. 삼천포 경찰서를 장악한 북한군 일부는 8월 20일 창선도를 침입하고 8월 24일 선소, 지족, 은점 등을 침입하여 남해군 전역을 점령하였다. 창선에서는 미처 피신하지 못한 경찰, 지서장 등 5명을 야산으로 끌고 가서 보도연맹 유족들이 돌멩이로 때려 집단살해 했으며, 몇 몇 마을에서는 우익인사들의 가산을 부수고 소를 잡아먹고 폭행하였다. 심한 동리는 가옥을 몰수하여 그들의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양곡 창고에는 우익 인사들을 가두어 놓고 한편으로는 농지를 분배했다.

남해를 점령한 북한군의 병력은 300여 명으로 소총, 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하였고, 아군은 기존의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120여명의 경찰병력 뿐이었다. 이들 병력 3~4명이 각면의 지서에 배치되어 치안 질서를 담당하고 있었던 빈약한 병력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침입에는 중과부적이었다.

7월 28일 하동경찰서가 북한군의 습격을 받자 당시 하동경찰서 경무주임 정동휘(鄭東揮) 경위, 정갑민 경사, 김종찬(金鍾讚 : 설천면 진목 출신) 순경 등 33명이 설천면 노량리에 일시 후퇴하여 남해경찰서장의 작전 지휘를 받으며 고현면 갈화리 해변에 주둔하면서 북한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남해경찰서는 후퇴해 온 청도경찰대 ○○명과 하동경찰서 35명, 남해경찰서 본·지서 병력 ○○명, 한국청년단원 약 200여 명 등으로 북한군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었다.

동년 8월 20일경 삼펀포서를 장악한 북한군은 창선지서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다. 남해경찰서장은 갈화에 주둔 중인 하동경찰서 정동휘 경위와 34명을 창선지서 탈환작전에 투입하라는 작전 명령을 지시하였다. 부대는 삼동면 지족에서 선박편으로 창선으로 가는 도중 과잉 승선으로 인해 선박이 침몰하였으나 희생자는 없었다.

날이 어두워져 이 작전은 다음날 새벽으로 미루어졌고 대치하던 중 밀어닥친 북한군에 맞서 이동면 지서 부근에 집결하여 빈약한 병력으로 교전하였으나 쌍방은 약간의 부상자만 남긴 채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50년 8월초 미공군은 남부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자 남해안 일대도 북한군의 점령지역으로 간주하여 남해에도 폭격을 가하여 중요 관공서를 파괴시켰다. 미공군의 폭격으로 군청, 면사무소(현 남해읍사무소), 경찰서, 교육청 등 중요건물이 파괴되었다. 이 폭격으로 경찰관 3명(경사 1명, 순경 2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북한군의 남해 점령기간은 약 1개월이었다. 행정조직으로 조선인민위원회의 간판을 걸고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치안대를 조직하고 농민을 위한다는 구실 하에 농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현물세를 징수하여 민심은 이반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남해군민이 입은 피해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특이한 일은 남면 꼭두방 해안에 직경 1.5m, 둘레 4m, 길이2m의 기뢰가 말려와 촉발의 위험에 부딪혀 있었다. 신고를 접하고 급히 현장에 도착한 탁금환 순경이 정밀 분해 해체하여 주민의 인명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남해 주둔 기간에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피해로 인명과 재산을 잃었고 북한군이 남해를 퇴각하면서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