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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지명

남해읍

죽산리

내용
죽산리 지명의 역사적 의의
출처
감충효

상세내용

  1. 죽산리(竹山里) 지명의 역사적 의의

 

죽산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그냥 지명의 설명만 하기엔 너무나 독특한 역사적 사실과 유배객들의 애환이 묻어있고 유적이 존재하며 동네 자체에서 내려오는 전통과 독특한 풍습이 살아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여러 공식적인 문헌과 동네 역사 자료, 가문의 족보, 구전, 비문, 석각을 통하여 이 글을 전개하고 동시에 지금 기록해 놓지 않으면 영원히 망실되어 버릴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 정리하였습니다.

 

필자는 이 동네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 온 후대이고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유소년, 청년 장년을 보냈기에 죽산리 특유의 지형과 환경에서 겪은 일들이 많습니다. 이를 정리하여 소개함은 죽산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일찍이 동네의 지도자 몇 분이 이 동네의 담장에 벽화를 그린다며 벽화자료를 좀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림과 글이 같이 들어가는 극히 제한된 벽면의 한계성과 특수성 때문에 글 역시 극히 압축된 내용으로 작업을 하여 보냈으나 예산상의 애로로 벽화제작이 무산된 바 있습니다.

 

죽산리(竹山里) 지명의 역사적 의의

죽산리(竹山里)라는 동네 이름은 삼한 또는 가야국 시대부터 생겨나 순 우리말 ‘대뫼’와 공존해 왔는데 그 지명이 여러 문헌과 고비석의 비문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즉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昆南郡條)에서는 남해읍성의 이전 과정에 그 중심지로 적혀 있을 정도입니다.

 

《세종 19년 남해를 복원하여 읍을 두었고, 세종 21년(1439) 화금현산성에서 죽산리로 읍성을 이전 축성하였는데 기존의 읍성이 비탈진 곳에 있어 옮겼다. ~중략~ 일제강점기에 존재했었던 흔적을 조선전도를 통해 확인 가능하며 지적도에 남아있다. 그러나 죽산리 일대 언막이 공사와 봉내천 범람에 따라 헐어서 사용되었고 큰 기단석은 활용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거나 건물 아래 묻혀 있다.》<남해군지 상권, 2000년도 발간>

 

 

지형풍습특산물

동쪽으로 강진바다를 두고 남쪽으로 남해읍의 젖줄기인 봉내[봉천(鳳川)]가 흐릅니다. 도립 남해대학 당산자락을 따라 대밭 속에 자리 잡은 풍광 좋고 인심이 좋으며 동제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마을입니다. 망운산에서 발원된 하천은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하마정 들을 품고 마을의 동쪽 묏부리 동뫼와 만나 유서깊은 봉내를 이루며 강진만으로 엄청난 수량을 실어 나릅니다. 봉내 유역의 하마정 들의 토질은 아주 기름져서 예부터 남해의 특산물 마늘 농사를 맨 먼저 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죽산(竹山) 마을의 동제(洞祭) 모시기와 유적

 

죽산사람들의 토속신앙은 지극합니다. 다른 마을 동제는 보통 당산이나 성황당 한 곳에만 지내는데 죽산 마을은 다섯 군데에서 제를 올립니다. 시월 보름날 아침이면 마을회관에 모여서 첫 제사를 올리고 당산으로 올라가 두 번째 제사를 모십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가 바위에 이어 농촌지도소 앞 바위, 그리고 아랫땀 몰 큰 바위(일명 정승비릉뱅이) 앞에서 마지막 제를 지냅니다. 어릴 때 동네 어른께 왜 정승비릉뱅이에 정승이라는 벼슬 이름이 붙었는지 여쭤 보면 바로 옆 당산에 조선 시대에 정승을 하신 분의 적소가 있어 자주 포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 바위위에 앉아 바람을 쐬고 가셨기에 그 당시 동네 사람들이 정승비릉뱅이라고 이름을 붙여 지금도 그렇게 불러온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바위는 엄청 커서 필자가 어렸을 때 죽마고우들과 그 바위 꼭대기에 손바닥만 한 돌로 큰 드럼통만 한 소규모 산성을 쌓고 논에서 떠온 진흙을 돌 틈 사이로 이겨 발라 물이 담기게 하여 키높이의 소위 산정호수의 작은 모델을 만들어 미꾸라지와 붕어, 개구리, 송사리, 올챙이, 게아재비, 물장군, 물자라, 소금쟁이 등을 덤벙에서 떠와 수초까지 심어 놓고 아주 작은 수문과 가는 수로를 만들어 그 물이 바위 아래로 하루 종일 흐르게 하며 해가 질 때까지 소꿉놀이를 하던 곳입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동제가 적어도 1960년 대 까지는 계속되었던 것 같고 그 후로 줄어 들다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지금은 어떠한지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얼마 전 읍내에서 봉천과 강진 바다를 보러 당산 뒷길을 가다가 지금의 남해제일고등학교 정문 건너편에 붉은 벽돌로 둘러친 구조물에 ‘동제 모시는 곳’이라는 팻말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사 지낸 흔적인 댓잎가지가 꽂혀 있고 제물 차린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기는 했었습니다.

 

또한 죽산 마을에는 군 보호 문화재 3호인 봉천사 묘정비는 물론 묘정비와 연결된 습감재(習坎齋) 등 남해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흔적이 많습니다. 임진왜란 때 군사들이 진을 쳤던 군둔산(軍屯山)이 있고 옛 산림조합 집터에는 조선시대 남해 고을의 감옥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해양초등학교에 재직 시 학생들의 대화나 글짓기에 ‘공부 마치고 가막소(감옥소)옆 냇고랑에 멱감으러 가자’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감옥소가 등장하는 것은 마을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다만 학생들은 감옥소를 가막소로 발음하거나 썼습니다. 동네 어른들의 전언에 의하면 학교에서 좀 떨어진 봉천의 물줄기를 따라 뻗은 방천 옆의 논 한가운데 제법 큰 가축 도살장 시설이 있었는데 그 곳이 옛날 감옥소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필자도 그 건물을 어릴 적부터 보아왔습니다. 또 지금은 옮겼는지 모르지만 농업기반공사 앞에는 옛날 고을 원님이 부임 할 때 말을 타고와 읍성으로 들어가기 전 말에서 내렸다는 하마정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하마정이 있었던 그 들을 하마정 들이라고 부릅니다.

 

 

보호문화재 3호 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선생은 국사에 연루되어 두 차례에 걸쳐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셨는데 적소에 습감재(習坎齋)라는 서당의 현판을 걸고 지방민들에게 4,5년 동안 충신효제(忠信孝悌)의 도리를 가르치다가 돌아가시니 은덕을 입은 사람들은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애도했으며 100년간이나 제사를 모시다가 경신년(정조 24.1800년)에 남해의 인사들이 진양의 선비들과 힘을 합해서 습감재의 옛터에서 2~3리 떨어진 곳에 봉천사를 세웠고 또 먼 서울로 달려가 노량(현,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사충서원 사당의 소재 이이명 선생의 초상화를 베껴 와서 봉안하고서는 봉천사묘정비를 세웠습니다.

 

그 후 봉천사는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봉천사 묘정비(높이 260cm, 폭 83cm, 두께 20.5cm)만 지금의 남해버스터미널 건너편 봉강산 산록 어느 문중이 관리하는 곳으로 이전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왔습니다. 어릴 적 나이 많은 필자의 형수뻘 되시는 분이 지금의 남해제일고등학교 옆 산록의 밭에서 일하시거나 봉강산 산록의 선영에 시제를 모실 때 봉천사 묘정비를 가리키시며 ‘봉천사가 훼철될 때 저 큰 비의 처리에 대해 남해향교의 높으신 분이셨던 윗대 할아버지께서 이전 및 보호를 위해 힘을 많이 쓰셨던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라는 전언을 하시곤 했습니다. 지금도 봉강산 그 일대의 산록은 어느 문중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봉강산 일대와 전택(田宅)은 그 문중의 입남 시조께서 성균관 남해향교의 교수관으로 발령되어 오시면서 조정에서 하사 받은 것이라고 하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그 일대를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후 봉천사 묘정비는 남해군 문화재 관리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봉강산 산록에서 남해유배문학관 앞뜰로 옮겨져 보호관리 되고 있고 봉천사 묘정비가 서있던 곳은 옮겨진 년 월일이 새겨진 표석이 서있습니다

 

 

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文) (일부)

「남해현은 섬 안에 있는데 현의 동쪽에 죽산리가 있다. 그 마을 아래쪽으로 개천이 있어 이를 봉천(鳳川)이라 부른다. 이 봉천 상류에 있는 사당을 봉천사(鳳川祠)라 하고 좌의정 충문공(左議政 忠文公)이며 호가 소재(疎齋)인 이선생의 영정을 받들고 모시고 있는 곳이다.」

 

(南海縣 在海島中 縣之東 有竹山里 其下有川 曰鳳川 天之上有祠 鳳川祠 記故左議政 忠文公 號 疎齋 李先生 遺象處奉之所也)

 

습감재(習坎齋)와 죽산리의 인연

이이명(李頤命 ․ 1658~1722) 선생은 기사사화(숙종 15. 1689년)로 영해로 귀양 갔다가 5년 만에 남해로 이배되어 와서 집 한 채를 짓고 지감재(止坎齋)재라 편액하였습니다. 왕세제(뒤에 영조)를 세운 일로 화가 일어나서 경종 1년(1721)에 영의정의 벼슬을 하다가 다시 남해로 두 번이나 귀양 온 당대의 거유 거목입니다. 지감재를 수리하여 습감재(習坎齋)라 편액 하니 남해의 유생들은 물론 인근 하동 사천의 선비들도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습감재(習坎齋)를 찾아서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선생은 세종대왕의 서5남 밀성군의 6대손입니다. 또한 사씨남정기, 구운몽, 윤씨 행장, 서포만필, 사친시 등 수많은 시를 쓴 서포 김만중 선생의 사위가 됩니다. 서포 김만중 선생은 상주면 노도에 위리 안치되어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글을 남겨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금자탑을 쌓으신 당대의 거유 거목입니다. 사위인 소재 이이명 선생은 서포 김만중 선생의 사위였으니 빙부와 사위가 같은 곳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이명 선생이 남해에 귀양 와서 빙부인 서포 김만중 선생의 적소를 찾아가 보니 선생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여 널이 북쪽으로 간 뒤였습니다. 망연자실 적소를 돌아보다가 선생이 키우던 매화 두 그루가 주인을 잃고 시들어 가고 있음에 습감재로 옮겨와 정성들여 키웠더니 이듬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매부(梅賦)를 남기게 되는데 그의 문집인 소재집은 규장각에 보존되고 있고 복사본은 남해유배문학관에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남해유배문학관의 소재지는 남해읍 죽산리입니다. 유배문학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남해읍성을 포함한 죽산리에 유배문학관이 설립됨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매부(梅賦)와 매원(梅園)과 습감재(習坎齋)

습감재 서당이 있었던 곳은 죽산리의 배경으로 자리 잡은 당산입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매화 등걸이 매원을 이루었던 곳으로 소재 선생이 서포 김만중 선생의 적소에서 매화 두 그루를 옮겨와 심은 것과 무관하지 않은 곳으로 봅니다. 마을 전설에 의하면 학교가 생기기 오래전부터 매원을 가꾸어 왔는데 이 고장에 충신효제를 가르친 소재 선생을 추모한 흔적이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1932년에 남해공립농업실수학교 개교 때에도 죽산리 죽림과 당산 노송의 사이에 습감재 서당으로 보이는 고풍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 곳을 헐고 서 너 칸의 사택을 지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이 주변을 성역시하여 매원으로 더 키웠고 단감나무 과수원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즉 이곳은 소재선생의 매부(梅賦)가 탄생한 곳입니다. 매부에도 죽산의 상징인 대가 등장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성철 초대 남해유배문학관 관장은 국가 번역원에서 근무했던 제2회 김만중 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이상원 시인에게 매부 원본을 보내 번역을 부탁, 2012년도에 매부의 전반부를 오석에 새겨 장인인 김만중 선생의 문학비와 청동좌상 옆에 나란히 자리 잡게 하고 그 감회를 《남해시대》에 기고한 바 있습니다. 고 김성철 관장은 남해유배문학의 재조명을 통한 국문학 발전의 체계적인 연구로 남해유배문학을 대외에 알리는 큰 공적을 쌓으신 분입니다.

 

 

매부(梅賦)의 소개

매부(梅賦)에는 서포 선생과 소재 선생의 혼백이 서려있고 당대의 두 거목이 이곳에 귀양 와서 뿌리고 간 남해유배문학의 원류가 흐르고 있는 고전문학의 큰 보물입니다. 이 마을에서 탄생한 시 한 편으로 이 분들의 넋을 기려봅니다.

 

매부(梅賦)

 

炎州地瘴(염주지장) 불타는 고을에 병은 나돌아도

卉木滋兮(훼목자혜) 풀과 나무는 잘 자라네.

玉玦南遷(옥결남천) 옥에 티로 남쪽에 귀양 가니

梅受知兮(매수지혜) 매화가 미리 알았네.

 

托根敷榮(탁근부영) 뿌리 내리고 꽃을 피워

慰幽獨兮(위유독혜) 외로움을 달랬구나.

氷心雪膚(빙심설부) 얼음 같은 마음과 눈 같은 살결

炯相燭兮(형상촉혜) 서로 비추어 밝히셨네.

 

窮荒萬里(궁황만리) 거칠고 외친 만리 땅에

兩美合兮(양미합혜) 두 아름다움이 만났구나.

日斜孟夏(일사맹하) 사월에 해 질 무렵

夜鳥入兮(야조입혜) 산새가 날아드네.

 

空園脩竹(공원수죽) 빈 뜰에는 긴 대나무

倚荒籬兮(의황리혜) 거친 울타리가 기댔구나.

於悒無色(어읍무색) 슬퍼서 빛을 잃어

奄彼離兮(엄피리혜) 우수수 떨어지네.

 

嗟爾貞心(차이정심) 아, 깨끗한 마음이여

類服義兮(유복의혜) 너도 의리에 따르는 구나

榮枯一切(영고일절) 영화와 고락에도 한결같은 절개여

廓其無媿兮(곽기무괴혜) 텅 비어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이하 한시 생략)

 

굴원이 이소를 읊었지만 / 공에는 이르지 못했구나.

송경은 이미 죽고 / 고산은 비었구나.

 

천 번의 봄을 만났으나 / 갑자기 영원히 떠나갔네.

한 마음으로 고이 끌려 / 떨칠 수가 없구나.

 

왕손이 한 번 떠나니 / 어느 때나 돌아올까

되 바람 구진 비에도 / 예쁜 꽃은 피는구나.

 

한 해 저문 빈 골짜기 / 아는 사람 그 누구인지

말라 죽고자 스스로 맹세하니 / 죽어도 마음 변하지 않네.

 

동쪽에서 온 나그네 / 취하여 문 앞을 지났더니

바람결에 실려 온 향기 / 꽃다운 뿌리에 울었어라.

 

남의 사위가 아니라 부끄럽지만 / 한평생 동안 사모 하였네.

비록 늙어 이룬 것 없지만 / 전범은 여전하셨지.

 

원컨대 늘그막에 맺은 정이야 / 형제와 같았다네.

슬프게 초사를 읊으며 / 이에 혼을 부르노라.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곳

자암(自庵) 김구(金絿) 선생의 화전별곡(花田別曲)에 봉천(鳳川), 파천(巴川), 망운산(望雲山)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소재 이이명 선생의 매부(梅賦)를 지은 곳과 적소도 봉천변 주변이었던 바 남해유배문학관이 세워진 곳도 바로 망운산 자락이 강진바다 쪽으로 펼쳐놓은 이 봉천변입니다. 화전별곡에 나오는 봉천(鳳川), 파천(巴川) 등의 지명은 모두 죽산리 앞을 지나며 하마정 들을 적시는 그 봉천이고 파천은 죽산리 봉천 건너편에 있으며 죽산리가 그 소재지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서포 김만중 선생의 적소에 있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사위인 소재 이이명 선생이 옮겨와 심어서 키운 곳으로 추정되는 읍성의 죽산리 당산 매원 주변의 습감재임을 생각할 때 남해 읍내의 봉천변 주변은 남해유배문학의 메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겸재(謙齋) 박성원(박성원, 1697~1767) 선생이 기로소에 들겠다는 영조의 뜻에 반대하다가 남해로 유배형을 받아 1744년 8월 30일부터 1745년 1월 6일까지 15개월 정도의 짧은 유배기간 동안 300편이 넘는 한시를 남겼는데 그의 적소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내용이 있으며, 거처의 죽림에서 대나무를 주제로 하여 지은 시가 많은 것을 보면서 그의 적소는 읍성의 동쪽으로 대가 많은 동네 죽산리가 아니었을까하는 짐작도 조심스럽게 해 보게 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남해의 풍속을 담은 기행문인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을 지은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의 적소도 읍성 남문 밖(현, 남해읍 남산동) 김시위의 집이었고 그 남문 밖은 다름 아닌 죽산과 연결된 봉천 상류쯤입니다. 유의양 선생은 54세 때인 영조 47년(1771년)에 홍문관 수찬, 부수찬을 지내다가 삭탈관직 되어 남해로 유배되어 왔습니다. 노량 나루에 접한 충렬사를 참배하고 싶었지만 신분상 이를 억제하고 남해읍으로 들어와 선소의 장량상동정마애비 앞에서 충렬사 헌시를 읊어 그의 남해문견록에 남기게 됩니다. 그는 천리 먼 길 낯선 곳에 귀양을 와서 살았지만 전직 고관의 금도와 기개를 잃지 않았고 청렴결백, 안빈낙도, 경륜과 충성심 등 그의 높은 지조를 읽을 수 있기에 이 글은 후세 사람들에게 까지 교훈을 줍니다. 후송 유의양 선생은 대충 10편 정도의 남해문견록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남해문견록은 순수한 국문자에 의하여 최초로 남겨진 한글 기행문체로 아주 소중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곳’ 겸재 박성원 선생의 시심이 바로 이 읍성의 죽림마을에서 발원 되었습니다.

 

 

강진바다에서 봉천으로 오르는 숭어 잡이

강진바다의 밀물이 봉천으로 밀려오면 방천의 수문이 닫히면서 간척된 갯논 쪽으로는 바닷물이 차단되지만 봉천의 하구에서는 봉천 물을 밀어 올리며 동뫼(東山)의 용왕바위 쪽으로 차오릅니다.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용왕바위 밑 깊은 곳에 용이 살아 강진바다로 까지 용굴이 이어져 있어 용이 승천할 때 강진바다 깊은 곳까지 나아갔고 선소와 쐬섬 사이에서 용오름이 몇 백 년 사이에 몇 번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 왔습니다. 필자가 유년시절 때 동네 사람들이 왁자하게 봉천을 타고 강진 바다 쪽으로 몰려간 일이 있어 따라 가봤는데 용오름이라 하여 바닷물이 하늘로 솟는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태풍이 몰아치며 폭우가 쏟아 질 때 봉천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선소와 쇠섬〔소도(蘇島)〕 사이의 높은 파도와 부딪치며 생긴 물보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적어도 그 때는 그런 전설이 마을에는 내려왔고 필자도 그 때는 그 전설을 당연히 믿었습니다. 더구나 그 용왕바위 밑은 봉천의 급류가 쏟아져 내리는 힘으로 엄청난 침식작용을 일으켜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었고 비가 많이 올 때는 망운산과 하마정 벌판의 물이 모여 엄청난 수량이 용왕바위와 그 주변의 올망졸망 솟아 오른 작은 바위와 봉천의 방천 사이를 급히 빠져나가면서 소용돌이치는데다 무엇인가 강바닥에서 빨아들이는 듯한 와류의 어지러운 모습과 음산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무서움이 들곤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동네의 김참봉 어른께서는 이 용왕 바위 주변에서 동네 아이들이 멱을 감으면 벗어놓은 옷들을 몰래 감추시곤 하셨는데 나중에 아이들이 옷이 없어진 것을 알고 울상이 되면 김참봉 어른께서는 다시는 이곳에 하동들이 멱을 안 감는다는 약속을 받고 옷을 내어주시곤 하셨는데 필자도 유년 시절 이 곳에서 멱을 감다가 김참봉 어른의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수심이 깊고 와류가 심하여 바위 밑에는 물이 빨려 들어가는 곳도 있어 위험하며 바다로 연결된 수중 동굴이 있고 그 안에 용이 살고 있어 동네에서 신성한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멱을 감고 옷을 입은 아이들을 동뫼와 용왕바위 사이의 잔디밭에 데리고 가셔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은 물론 해동명장전의 고전을 읽어 주시면서 나라를 지킨 유명한 장수들의 무용담을 들려주시곤 하셨고 조선 시대에 죽산 동네에 유배를 와 서당을 열어 백성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를 가르치신 조정의 고관대작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뒤에 좀 커서 알고 보니 그 유배객은 소재 이이명 선생이셨습니다. 김참봉 어른께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그 당시 꽤 비쌌던 눈깔사탕을 나누어 주시곤 하셨고 시를 잘 지은 아이 몇 명을 뽑아 몇 개 더 상으로 주셨던 일 들이 어릴 적 추억으로 다가오며 그 김참봉 어른이 그리워 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옛날 용왕바위의 논과 들은 거의 남해군이나 관계기관에서 수용하여 가스저장소 또는 기타 연구시설이나 생태환경 시설이 들어서며 농토는 많아 줄어 들었습니다. 그 때 죽산 사람들은 그 논들을 용왕바위 옆에 있다 하여 용왕마지기라 지칭하였습니다.

 

오래 전 이조 말엽 무렵 용왕바위 부근의 갯벌을 막아 만든 갯논은 방천의 수문이 닫혀 갯논으로는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지만 봉천의 하구에서 동뫼 용왕바위 쪽까지 바닷물이 가득 차오릅니다. 이 때 숭어떼들이 밀물과 함께 봉천 중류 쪽으로 몰려오게 되는데 그물을 칠 줄 아는 몇 분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수중 작업을 해 싱싱한 숭어를 한 둥우리 가득 채우게 되고 동네 사람들은 숭어회와 숭어탕으로 막걸리 파티를 벌리면서 힘든 농사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도 했습니다.

 

 

봉천에서 뗏목 타고 쇠섬으로 건너간 이야기

필자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과 책을 돌려가며 참 독서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독일 작가 쥘 베른이 지은 소년 소설 《십 오 소년 표류기》에 심취해있던 필자는 동네 죽마고우 몇 명과 배 대신 뗏목을 타고 쇠섬까지 건너가서 십 오 소년 표류기 흉내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이었던 것 같았는데 확실히 기억나는 친구는 필자의 동갑내기 6촌이었던 같고 제일 체력이 좋고 수영을 잘 하는 친구는 김철순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나를 포함한 동네 개구쟁이들은 봉천에서 수상생활을 할 정도로 물에는 자신이 있었고 아무리 홍수가 나서 사나운 물결이 굽이쳐도 떠내려 오는 큰 드럼통이나 목재를 타고 강진바다에 까지 겁도 없이 흘러간 일은 부지기 수였기 때문에 뗏목이라 해서 별스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름 장마 때 밤중에 폭우가 쏟아지면 날이 새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봉천으로 내달렸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철없는 개구쟁이의 눈으로는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수박이나 호박 참외 등의 채소류는 덩굴 채 떠내려 오고 돼지나 개, 송아지, 오리, 닭 등 가축들도 떠내려 오는데 대개 허술하게 지어 물에 휩쓸려 떠내려 오는 헛간의 초가지붕을 타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더러는 드럼통이나 통나무를 타고 떠내려 오는 염소나 토끼 중에는 갓 나은 새끼들이 어미 곁에 겨우 붙어서 떨고 있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더 떠내려가면 강진바다의 파도에 살아날 확률은 거의 희박한 동물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며 구해주기로 의견을 모으고 곧 행동으로 옮깁니다. 아무리 물살이 거세도 봉천은 아이들의 수영장이고 놀이터였습니다. 어지간한 급류에도 역류해서 오를 수 있는 수영실력과 체력을 가진 그들이었습니다. 용감한 개구쟁이들은 밧줄로 동미산의 소나무에 몸을 묶고 급류를 헤엄쳐가서 헛간 기둥과 서까래에 줄을 묶고 어른 몇 분의 도움을 받아 끌어당겨 동물들을 구해 오는 등 여름 철 천둥 번개 치고 폭우 쏟아지는 소리와 일렁이는 냇물의 너울은 그들에게는 진군가와 같았습니다. 냇물에서 건져낸 전리품들은 50년대 자원이 부족할 때에 농가에서 유용하게 쓰이던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철로 된 큰 드럼통은 쥐가 쏠지 못하는 곡식저장고로 인기였고 큰 통나무는 건축용이나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필자는 거의 다 죽어 가는 레그혼 닭 한 마리를 건져 왔는데 정성들여 보살핀 결과 되살아 나 필자의 할머니께서 잘 키워 주셨는데 날마다 계란을 한 개씩 낳았습니다. 20 여 마리의 닭 중에서 산란율이 으뜸이었습니다.

그 해 초가을 태풍이 몰아치던 날 폭우로 냇물이 불어나 넘실거릴 때 좀 더 멀리 쇠섬 쪽으로 떠내려 가보기로 했습니다. 죽산 마을에 지천인 대로 뗏목 엮기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긴 튼튼한 대는 삿대로 썼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물때를 생각지 않은 계산 착오로 뗏목을 쇠섬 쪽으로 저어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썰물이 되면서 조류의 방향은 쇠섬의 반대 방향인 창선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표류가 시작된 것입니다. 태풍이 차츰 거세어지며 파도가 뗏목을 집어 삼킬 듯했습니다. 가차 없이 뗏목을 버리고 물로 뛰어 들어 쇠섬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영과 자유형으로 속도를 내다가 힘이 들면 배영으로 바꿔 휴식을 취하며 그리 힘들지 않게 쇠섬에 상륙하여 몸을 풀고 큰 바위 밑에 감춰둔 취사도구와 쌀로 밥을 짓고 반찬은 쇠섬에 지천인 굴, 바지락, 성게, 듬장에 든 물고기를 톳이나 청각, 가사리, 파래, 미역과 같이 끓여먹으면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밤 새 몰아친 바람은 보통 때와는 달랐습니다. 뒷날 새벽에 썰물이 되었을 때 몰아치는 태풍에 폭우를 맞으며 갯벌을 건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동네가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난 부모님과 동네 사람들과는 다르게 개구쟁이들은 태평스럽기만 했습니다. 참 겁이 없는 아이들이었지요. 동네에서는 아이들은 온데간데없고 뗏목만 선소 백사장에 밀려왔으니 그 상황이 어떠하였는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이리하여 쥘 베른의 《십 오 소년 표류기》에서는 2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죽산의 개구쟁이 소년 표류기는 1박 2일로 끝났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필자는 할머님과 부모님께 얼마나 혼이 났는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참 철없던 시절이었음을 통감합니다.

 

아주 특별한 천렵(곱실이 쓸기)놀이

봉천(鳳川)에는 예부터 이 마을의 전통인 곱실이 쓸기가 있습니다. 봄이 되면 동네 청장년들이 가마니나 멍석을 말아 길게 연결한 다음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듯 여러 사람이 좌우로 “시이소오! 시이소오!...”구호를 외치며 바닥을 훑어가면서 ‘곱실이’라는 물고기를 떼로 몰아 큰 대소쿠리로 쓸어 담는 듯한 천렵(川獵)인데 이미 이때는 봉천 잔디밭의 농악놀이와 씨름 대회, 척사, 석사 놀이가 무르익어가며 석사가 명중할 때마다“간주야!”하는 소리꾼들의 합창과 농악에 맞춰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덩실덩실 춤을 추며 대형 가마솥에서 끓여 낸 천하일미 곱실이 국과 갖은 음식을 즐기며 동민들의 단합과 풍년을 기원하였습니다.

 

 

강진바다에서 봉천으로 오르는 은어잡이

은어(銀魚)는 연어처럼 모천회귀성(母川回歸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양에서 성체가 된 연어들은 봄이 되면 자기가 태어났던 하천에 산란을 위한 대 이동을 합니다. 이 때 맑은 봉천은 장관을 이룹니다. 은어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은빛 잔치가 벌어져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지금은 은어의 몸값이 대단하지만 그 당시 동네 사람들은 은어를 크게 취급하지 않은 듯합니다. 물이 조금만 탁해도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일급수에 사는 아주 깨끗한 물고기어서 하동들이 바켓스에 황토나 여뀌대를 찧어 푼 물을 흩어 뿌려도 기절을 하며 물 밖으로 튀어 나오거나 물위에 떠오르므로 그냥 주워 담으면 되었습니다. 봉천 물이 그만큼 맑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산인들의 개척정신과 근면성 그리고 자립정신

 

새마을 운동 태동 이전에 죽산은 이미 마을 안길 넓히기와 소득증대를 위한 강진바다 굴 양식장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죽산 사람들은 이미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 60년대 중반에 개발위원회를 열어 마을 안길을 넓히기 시작하였고 소득증대를 위한 강진바다 굴양식장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석산의 돌을 깨어 동네 모든 사람들이 개펄에 돌을 이고 지고 날라 굴을 키웠으며 비가 많이 와 봉천 물이 많아지면 봉천 반대편에 농토를 가진 사람들은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농작물의 관리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동미산의 큰 바위를 깨뜨려 큰 돌을 날라 어지간한 물은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았으며 그 뒤에 새마을 사업으로 시멘트와 철근이 지원되면서 리어카와 작은 차가 지날 수 있는 다리를 만들었습니

다. 초기의 굴 양식장은 개펄 가운데 큰 돌을 언덕처럼 쌓았는데 그 뒤에 다시 헐어 큰 돌을 낱개로 개펄에 세우는 형태로 바꿨습니다.

 

자료제공 〯감충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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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육대학 졸업/인천교육대학교 졸업/경희대학교 대학원 전문상담 과정 수료 1급 전문상담사 자격 취득/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졸업 및 중등학교 교사 자격 취득/한국문인협회회원/남해문학회회원/양주 시립도서관 사람책(Human Book) 강사(2017)/이원수·정한모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1979)/《시조생활》지 신인문학상에 당선(1991)/한·몽 문화교류협회회원/세계전통시인협회(Tpwaw) 한국본부자문위원/녹조근정훈장서훈(2008)/중앙문단의 문인 40여명을 안내한 남해 시엔 드림의 1박 2일 세미나에서 ‘남해유배문학 현장 답사 및 남해를 배경으로 한 현대시 감상’자료를 제작하여 발표(2008)/《남해시대》에 3년간, 《남해신문》에 6개월간 주로 유배문학을 주제로 매주 칼럼과 시조 연재/시조집《크리스털의 노래》/《남녘 바람 불거든》/칼럼시문집《읍성의 문창에 시혼 걸기》/《텅 비어서 부끄럼 없구나》출간/태극권·우슈 국내·국제교류대회 출전 금메달 획득/보물섬 남해포럼 자문위원 역임/재경남해군향우회 자문위원 및 향우회지 《남해가 그리운 사람들》 편집위원장/재경남해중·제일고총동문회고문이사 및 동문라이프스토리 《망메새》 편집주간/제16회 김만중문학상 유배문학특별상 수상(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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