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학문(교육·학자)
박민기
상세내용
「경남일보」논설위원 /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 / 경남수필문학회 회장 / 한글문화협회 진주지부장 역임 1945년 한글맞춤범과 시조, 태극기 해설을 수록한 「곳집」을 발간하여 군내 각급 학교에 배포 출판사 강산문화사를 창립하여 1962년 초등학생용 「국정교과서 국어 새사전」을 출간 보급하는 등 우리말의 연구와 순화에 헌신.
▶ 학력
1931년 남해공립보통학교 18회 졸업
해인대학(경남대학 전신) 국문학과와 정경학과 수학
▶ 경력
1938년 소학교 교원검정시험 연속 2회 합격
1940년 이후 남해군 중현과 고현, 갈화국민학교 교사
대서국민학교 초대 교장
진주 천전 및 봉래국민학교 교감
산청 교육구 학무과장
진양 문산, 진주 봉원(초대), 중안, 진양 반성국민학교 교장 역임
「고향땅 유자나무」
나의 고향은 금산·남해대교·유자나무가 나를 자랑스럽게 하는 땅이다.
올해 여름은 데모·농성처럼 태풍이 풍성하여 고향행을 그럭저럭 미룬 8월말 '다이너'가 몰고 왔던 비가 멎어 하늘이 빼꼼해진 오후 늦게 부랴부랴 막내가 모는 차에 올라 고향으로 갔으나, 목적지는 사촌 형님이 계신 남해읍이었다.
나는 69년 전에 그곳 북문 안에서 잔뼈가 굵어져 젊은 시절의 꿈을 가꿨으나, 일본인과 공산주의자들에게 굴하지 않은 저항의 원천이던 신앙심까지 선물로 받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 50년째 동고동락하는 아내도 그곳 남문 안에서 성장했으나, 모두 현내면이라 뻐기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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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쪽으로 종형 댁을 향하니 전에는 좁고 흙먼지의 길이 넓고 깨끗한 포장도로로 변하여 장의차의 내왕도 편리하리니 그것만도 큰 축복이라 느껴져, 새마을운동의 혜택에 새삼 감사하였다.
형님께서 출타했으면 어쩌나 조바심하며 들어서니, 방금 돌아왔노라며 반겨 주셨다.
종형은 올해 89세 노인으로 장수하였으므로 동수(同首)로서 항상 존경받는 분인데, 유복자로 태어나도 자수성가한 노력과 탐스러운 은백 수염의 소유자로 이름이 나 있는 바 그 수염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으려다 얼굴을 할퀴신 일로 유명한 우리 할아버님의 힘과 수염을 닮으셨다니, 맨먼저 태어난 손자가 받은 분복이리라.
해가 기울고 있으니 서둘러 가보자고 한내한 곳은 죽죽 곧은 소나무가 동북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곳인데 지금은 콩이 심어진 반반한 밭이었다.
종혈수의 묘소와 종형의 예비한 묘지와도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 밭머리에 4미터 높이의 큰 유자나무가 있어 주먹만한 푸른 유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겨울에도 햇볕이 잘 드는 양지란 걸 보증하고 있었다. 유자(柚子)나무는 운향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으로 티베트·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익은 열매는 모양과 냄새가 품위 있는 귀공자 같은 친밀감을 주는 것이므로, 누가 봐도 부러우리라 여겨져 흐뭇하였다.
왕년에 읍내 부자 박진평(朴晉平) 노인이 자기 묘지로 탐을 낸 자리였으나,
우리 집에 필요하다며 거절했었노라 말씀하시면서 마음에 들거든 주마고 하시니 진정 고마운 일이었다.
잠깐 정담을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둘째 당질 가족들을 반갑게 만나고 다시 고현 탑동을 통과하면서 해방 전에 양조장 주인이자 경방 단장이던 구장과 다퉜던 사연을 막내에게 들려주었다.
소풍날 길에서 만난 구장은 내게 느닷없이
"박 선생, 자네 저축 목표 채우지 못하면 우리 동네에서 나가야 하네."
이건 인권 침해적인 협박 공갈이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쏘아 붙였다. 내가 아무리 젊은 후배라도 옆에 있는 수석교사 보고 있는 자리에서 무슨 꼴인가 생각하니 흐지부지 넘어갈 수 없었다.
"예, 136호 중에서 저 혼자 못하면 분명히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못하는 사람이 2명 이상일 때는 구장님이 나가기로 합시다."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하던 그는 한 바탕 더하고 멋쩍게 돌아섰다.
밑져봤자 본전 내게 손해는 없었으니 통쾌하였다.
운전석에서 듣고 있는 막내도 나와 같은 기분인 것 같았다 다시 대교 건너 밤 8시경 무사히 상평동 집으로 돌아왔으니 이래저래 기분 좋은 날이었는데, 유자나무가 기다려줘서 한결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