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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인물

종교

법산스님

내용
-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출생지
남해군 남해읍 양지마을
시대
1945.11.23 ~

상세내용

인도철학은 물론 선과 중관사상, 대승불교까지 섭렵한 법산 스님의 강론은 교학의 깊이를 더했다.  우리나라 대표 선학 석학(碩學)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 학력 

 

남해초등학교 / 검정고시 후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 박사 / 1985년 대만 중국문화대학 철학과 박사 취득

 

 

▶ 경력

 

1986년 3월 ~ 2011년 2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선학과 교수 / 동국대학교 이사장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 다음 카페 '법따라 산따라'.

 

 

 

천혜의 비경이 펼쳐진 경남 남해에 태어났으나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 됐다. 하여, “절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할머니의 권유로 열다섯에 남해 망운산(望雲山) 화방사(花芳寺)로 출가했다. 은사는 덕산 스님. 산내 암자인 망운암으로 고시 공부하러 온 형들을 붙잡고 물어가며 중·고등학교 과정을 2년 만에 끝내고는, 경남 고성 옥천사에 기거하며 학업을 이어가 마산대(지금의 경남대)에 입학했다.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싶다면 문법을 독파하라”는 김도완 교수의 한마디에 정말 산스크리트어 문법책을 몽땅 외워버렸다. 학문을 향한 열정과 실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서경수 교수의 추천·권유로 동국대에 편입(인도철학과) 했다. 

탄허 스님을 비롯해 원의범, 정태혁, 김동화 박사를 만나며 법해(法海)의 중심으로 나아가 법온(法蘊)을 끌어올렸다. 선(禪)을 깊이 이해하는데 중관사상은 필수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삼론(三論)의 하나인 중론(中論)을 연구했다. 석사학위 논문 ‘중론 관거래품 연구’는 산스크리트어와 한역 원전을 일일이 비교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중론 이해를 시도해 당시 중진 불교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동국대 강단에서 산스크리트어 강의를 3년 하고는 교학의 지평을 넓히려 대만 중국문화대학 철학연구소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한국 간화선을 정초한 고승 보조국사 지눌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선의 황금시대’ 저자 오경웅(吳經熊·1899~1986), 불교학자 인순(印順·1906∼2005) 스님과 불광산사(佛光山寺)를 창건하고 ‘인간불교’를 주창한 성운(星雲·1927∼2023) 스님과도 교류하며 불교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의 안목을 넓혔다. 

대만 유학을 마치며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정년 퇴임(2011) 때까지 25년 동안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또한 보조사상연구원, 한국선학회, 한국정토학회, 인도철학회 등을 이끌며 불교학회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아울러 한국불교 최초의 종합역사서이자 불교백과사전인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역주팀을 8년간 이끈 후 총 8권으로 펴냈다.(2010) ‘조선불교통사’ 첫 한글 완역이다. 인도철학은 물론 선과 중관사상, 대승불교까지 섭렵한 법산 스님의 강론은 교학의 깊이를 더했다. 우리나라 대표 선학 석학(碩學)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동국대 강단에 섰을 때도 “수행 없는 학문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던 법산 스님은 퇴임 후에도 “불교를 연구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익혀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보였다. 교수 휴식년 때 지리산 벽송사 선원으로 걸음 해 ‘이뭣고’를 들었다. 정년 퇴임 후에도 백장암과 남산사에 방부를 들여 정진했다. 지리산 자락의 선원에서 가부좌를 튼 것만도 9년이다. 

2001년 11월 ‘금강경 10만 독(讀) 원력’을 세운 법산 스님은 2024년 1월 9일 7만 독에 이르렀다. 조계종의 승가고시·법계 제도도 복원한 법산경일(法山鏡日) 대종사는 선교겸수(禪敎兼修)·내외명철(內外明徹)한 한국 대표 선지식으로 손꼽힌다.

마산대학 1학년 때 산스크리트어를 처음 접했는데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파고들었습니다.
“고려대장경에 등장하는 역대 스님들의 활약상을 살펴보면, 범본(梵本)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스님은 138명이라고 합니다. 인도, 중국, 서역, 페르시아 등 다양한 지역 출신의 스님들이 참여했어요. 중국어와 범어에 능통한 고승이어야 이 역경에 뛰어들 수 있었겠지요. 고구려의 승랑(僧朗), 백제의 겸익(謙益), 신라의 원효(元曉), 고려의 의천(義天), 조선의 신미(信眉) 스님도 범어에 밝았습니다. ‘교(敎)는 부처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지요. 부처님 말씀을 좀 더 다양하게 듣고 연구해 전하려 한 원력이 있었기에 공부하셨을 겁니다. 저 역시도 불법의 요체에 좀 더 다가가 보려 범어 공부에 열성을 다했습니다. 범어를 알면 한문 번역본 이전의 원전(原典)에 다가설 수 있어요. 부처님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나 다름없지요. 신심도 더 깊어집니다.”


동국대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강의 하던 중 인도 바라나시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염두에 두었던 대학은 산스크리트어문학부가 있는 바나라스힌두대학교(BHU:Banaras Hindu Univer sity)였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제 부족함을 알게 됐고, 인도철학과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판단했지요. 그 대학에서는 산스크리트어 강의를 들어야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논문도 써야 하는데 10년 과정이라고 하더군요.” 

큰 뜻을 품었는데 탄허 스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국문화대학으로 틀었습니다.(1980)
“당시 탄허 스님은 서울 개운사 대원암(大圓庵)에 머무르시며 ‘화엄경’을 번역하고 계셨습니다.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사서삼경’과 노자, 장자를 배웠습니다. 평균 2시간 정도의 강의였는데 무비, 통광, 일장 스님 등도 함께했습니다. 훗날 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인도 유학 채비를 마치고 큰스님께 인사드리려 갔는데 ‘인도 가지 말고 대만 가라’고 하셨어요. 중국어를 쓰는 인구가 많다는 점, 훗날 중국의 문이 열리면 학문적으로도 할 일이 많을 것이라 보셨어요. 서울 종각 YMCA 학원에서 중국어 8개월 공부하고 대만으로 떠났습니다. 대만 유학 마치면 탄허 스님 모시고 좀 더 공부하고 싶었는데 참 아쉬웠습니다.”

중국 출신의 오경웅 박사는 로마 교황청의 공사로도 근무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육조혜능부터 법안문익까지 300년간 선의 불꽃을 틔운 선사들의 생애와 일화를 담은 ‘선의 황금시대’를 통해 선의 진수를 내보였으니 놀랍습니다.
“만년에 대만으로 돌아와 중국문화대학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는데 저도 그때 만나 명강의를 들었습니다. 법을 전공한 오 교수는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UN 헌장 구성 등에 참여했을 정도로 명망 높았던 법학자였어요. 미국에 있을 때 법학은 물론 중국철학과 문학도 가르칠 정도로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의 선학에 정통했어요. 오 교수 댁을 방문했을 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교를 일찍 접해 수행하는 스님이 되셨으니 화상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 교수의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출가는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가톨릭 신자였지만 불교를 향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입니다. 가끔 한국 곶감을 구해 드리면 ‘대륙(중국)의 맛을 보는 것 같다’라며 지그시 눈을 감았어요. 리포트 제출할 때 ‘화상은 공부할 게 더 있습니까?’라며 호탕하게 웃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