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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인물

상세내용

남해의 이시봉(李時鳳) 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에 앞장서고 지역 발전에 헌신한 남해의 대표적인 선구자이자 독지가입니다.

서홍(瑞洪) 이시봉 선생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입니다.
선생은 남해에서 태어나 평생을 고향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특히 이동면에 위치한 장평소류지(장평저수지) 축조에 기여하고, 인근 다초초등학교 부지를 기증하는 등 출생지인 이동면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 또한 선생의 자취가 깊게 남아있는 남해군 이동면 장평소류지 인근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 주요 경력 및 활동
 
 - 1951년 : 입(가마니)제조 사업
 - 1923년 : 남해군 최초 정미소 경영 시작
 - 1931년 : 부산 아동을 위한 6백 원의 기금 마련으로 초음 야학교 개축, 초음간이학교 낙성식 및 개학 (다초초등학교)
 - 1932년 : 빈민 퇴치를 위한 기부 (보리 70두, 백미 40두 등)
 - 1933년 : 이동공립보통학교 상주분교장 설립 기여 (상주초등학교), 이동공립보통학교 (이동초등학교) 12학급 증설 · 증 · 개축비 기부
 - 1937년 : 남해 정미소 조합장
 - 1938년 : 이동공립심상소학교 초음간이학교 설립 시 농토 800평 기부
 - 1939년 : 이동면 의원 당선
 - 1961년 : 서거
 
 

 
 
 ▶ 다초초등학교 부지 (현 국제탈공연예술촌)
 
  • 분교로 시작: 초기에는 인근의 큰 학교인 이동초등학교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거나 통학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이동초등학교 다초분교로 문을 열었습니다.
  • 독립과 승격: 이후 학생 수가 늘어나고 지역 주민들의 학교 설립 의지가 강해지면서 다초국민학교로 승격되어 독립된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역사적 장소: 2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장평소류지와 주민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군이 있는 곳에 학교가 들어섬으로써, 다초초등학교는 단순한 배움터를 넘어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 추억의 공간: 1999년 폐교되기 전까지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며 지역민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장소가 되었습니다.
  • 새로운 생명력: 비어있던 학교 건물은 2008년 김흥우 교수의 유물 기증을 계기로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으로 재탄생했습니다.
  • 현재의 모습: 운동장은 공연장이 되고 교실은 전시실과 도서관이 되어, 이제는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 대신 공연의 열기와 관람객들의 발길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 역사적 의미: 선생은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향교 전교를 지내는 등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다초초등학교는 지역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현재의 모습: 학교는 2004년에 폐교되었으나, 그 부지는 현재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선생이 기증한 터전 위에서 이제는 공연 예술과 문화가 꽃피우고 있습니다.

 

 

▶ 장평소류지 (장평저수지)

 

  • 선구적 활동: 선생은 저수지 둑에 빨래터를 마련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 편의까지 세심하게 살펴, 오늘날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 마애비와 공적비: 장평소류지 인근 도로변에는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큰 바위(마애비)가 남아있으며, 2022년에는 후손과 지역 사회가 힘을 모아 별도의 공적비를 건립하여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 남해의 명소: 현재 이곳은 봄철 벚꽃과 튤립이 어우러지는 남해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수지 물 위에 비치는 벚꽃 풍경은 사진작가들 사이에서도 매우 유명합니다. 

 


 

◎ 2백년 세월 논밭을 적시다
 
장평소류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비석이 소류지 동쪽 제방 한가운데 서 있다. 이름하여 <초곡장평저수지류지기공비(草谷長評貯水池溜池起功碑)>다. 여기에 자세한 역사가 나온다.
 
장평소류지가 처음 조성된 때는 1807년(순조 7) 봄이다. 현령 채익영(蔡翼永)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착공을 지시해 관개에 쓰도록 했다. 채익영은 1795년(정조 19)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한 것으로 나온다. 그때 저수지 크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자 토사가 쌓이고 물이 막혀 쓸모가 줄어들었다.
 
1914년 3월 준설 공사가 이뤄졌다. 군수 서기은(徐基殷)이 상황을 개탄하면서 소작인들을 동원해 돌을 캐어 제방을 쌓아 넓혔다. 서기은 군수는 1911년 2월부터 1914년 2월까지 재직했다. 7년 뒤인 1921년 5월 군수 성두식(成斗植, 1872-?)이 지방보조비 500원을 받아 수면을 넓히고 바닥을 파내 물길이 통하게 했다. 성두식은 일제 강점기의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관료편에 수록되었다. 주민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평이 전하기는 한다.
 
다시 8년이 지나 1929년 군수 이필동(李泌東)이 부임해 보조금 850원을 받아 증수했고, 다음 해에는 도의원 임종길(林鍾吉)과 면장 정종묵(鄭鍾默)의 자문을 구해 보조금 5155원을 받아 대대적인 제방 공사를 펼쳤다. 이필동은 울산군수도 지냈고, 만주국에 가 관료로 있었으며,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무림시장 입구 비석군에는 정종묵 씨의 <전성균관박사정종묵시혜비(前成均館博士鄭鍾默施惠碑)>가 있다.

 
1951년 전후해서 보강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공비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나오는데, 구민 이시봉(李時鳳) 등이 참여해 4월 6일부터 6월 20일까지 총 9천 평에 달하는 주변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시봉은 <부산일보> 1950년 1월 6일자에 전해 12월 30일 남해향교 명륜당에서 열린 유림회원대회(儒林會員大會)에서 사회를 봤던 것으로 나온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완 공사가 이어졌을 것인데, 지금 우리가 보는 소류지는 기원이 214년 전으로 올라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저수지라 해도 이처럼 장구한 시간 많은 이들의 노력과 관심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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