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이란 읍면 단위의 소규모 지방 자치조직으로서 면향약(面鄕約) 또는 면향약계(面鄕約契)라고도 하며, 그 기본 내용은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 (德業相勸)」, 「잘못된 일은 서로 고쳐준다 (過失相規)」,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 (禮俗相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 (患難相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향약계에서는 향리에서 특별히 선행이 있는 자를 관아에 알려서 중앙에까지 보고하고 표창토록 하는 한편, 악행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경계하여 타이르거나 벌주(罰酒)를 안기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관아에 고발하여 고향에서 쫓아내며 벌금을 물리거나 태형(笞刑) 등의 형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혼인이나 장례 같은 일이 있을 경우에는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미풍(美風)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향약의 조직에 해당하는 행정적 구역으로는 면(面), 동(洞), 리(里), 촌(村)이 있어서 수령과 백성 사이의 교량 역할 즉 수령의 지시를 전달한다던가 납세를 독촉하는 일이 그들의 또 다른 임무였다. 그 임원은 대개 상위 조직인 향소(鄕所 : 郡鄕約契)에서 추천하는 대로 고을 수령이 임명하였다. 면 책임자는 풍헌(風憲), 약정(約正), 집강(執綱), 면임(面任) 등 현재의 면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 남면 향약계(鄕約契)
남면 향약계는 조선 정조 8년(1784년), 지금부터 206년 전 반수(班首: 契長), 공원(公員: 총무), 유사(有司: 재무)의 삼 소임(三所任)을 두어 면정(面政)의 의결 명령기관으로서 효열(孝烈) 표창은 물론 불효하고 친목을 해하는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리는 등 향리의 풍기를 단속하고, 후생을 거듭 일러 가르쳤다.
전국의 면 단위 향약계에서는 집강(執綱), 풍헌(風憲), 영세원(領稅員: 재무)의 직제를 두고, 고을(懸廳)과 종횡으로 연관해서 운영하여 오든바, 조선 말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여 결국 일제 초기 신(新) 행정제도 시행과 더불어 유명무실하여 자연 소멸되고 말았으나, 유독 남면에서는 206년 전 선현들의 선견지명으로 장구한 전승을 바라는 완문(完文)에 약간의 금전을 보존하고, 매년 이자를 증식하여 운영하도록 기반을 닦아준 덕(德)과 선조들께서 그 뒤를 이어 잘 지켜주신 덕으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고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에서 향약계가 순수 향약교화단체(鄕約敎化團體)임을 알고 일금 일백원을 보내주면서 이율곡(李栗谷) 선생과 함께 일본 이궁존덕(二宮尊德)까지 숭상케 하라는 부탁을 받고, 이 돈으로 상가리(上加里)에 계답(契沓) 300여 평을 구입, 이 수곡(收穀) 33두(斗)로 매년 춘추계회를 풍성하게 치르고, 광복 후까지만 해도 반상서열(班常序列)이 분명하여 여간한 서민은 말석에 참여하는 것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엄숙했다.
광복 후 농지 개혁으로 계답(契沓)을 소작인에게 몰수당하듯 하여 연부(年賦)로 그 대가를 받기는 했으나 미미한 적은 금액이라 각 마을에 일금 십환(十圜)씩 똑같이 나누어주고, 그 이자(利子)조로 정조(正租) 이두(二斗)씩 납부토록 해서 연구세심(年久細深)토록 계를 이어나갈 개책을 세웠으나 십여 년이 흐르고 나니 세대도 바뀌고, 수 차례의 화폐 개혁과 사회 혼란 및 통화 팽창으로 인한 물가 상승으로 그 원금(元金)은 가치가 폭락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정조이두(正租二斗) 납부를 거부하는 동리가 늘어나 원금을 회수는 하였으나 한심할 정도로 소액의 돈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남면향약계가 유명무실해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홍현리의 박진용(朴珍容: 호 소강·남면장 역임) 씨가 남면 향약계의 재건을 위하여 면 내외의 뜻있는 분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설득하여, 그분들의 정재(淨財)를 모아 홍덕의 오독산정에 율곡사(栗谷祠)를 건립하고 향약계 문서 7권을 도 문화재 자료 제44호로 등록하였으나, 관리사가 없으므로 다시 군비(郡費) 지원을 받아 정풍정(正風亭)을 건립하여 향약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모임의 장소를 마련하고, 쉼터가 없는 노인들의 쉼터를 제공하는 등 다대한 공적이 있어 현재 율곡사 동편에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렇지만 향약 정신을 계승코자 하는 세대의 노령화와 서구 문명과 현대화에 쫓기고 있는 오늘의 세대를 생각할 때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는지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 완문을 정하는 것은 오직 우리 일면에는 아무 곳도 없던바 면(面)의 갖가지 모든 일에 꼭 구하여 써야 되는 일이다. 도리가 아니고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무리가 관가(官街)의 다스림을 받으니 항상 단락(團樂)함에 폐(弊)를 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당시 맡은바 임무를 차지하여 맡아보던 자의 불공평한 판단으로 번거롭게 말썽을 일으켜 다투는 어려움이 있어 여기에 면내에서 이같은 목적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논의하여 약간의 돈을 해마다 거두어 이자와 합한 것이 백여냥(百餘兩)에 이르렀으니, 이 후부터 그 본전을 보존하고 그 이식(利息)을 취하여 공(公)과 사(私)를 분별하여 씀에 있어서 어찌 아름답지 아니할 것인가. 각종 장부(帳簿)에 똑똑히 기록해서 참고로 쓸 만한 증거하기를 바라니 임원이 된 자는 조심스럽게 웃어른이 시키는 대로 좇아 행하여 소기의 목적을 성취시켰으면 심히 다행스러울 뿐이다.
◆ 이 금전은 각 동에서 분급(分給)해서 이자를 받되 한 냥에 월 네 푼(月 四分)씩 이자를 규정한다.
◆ 총회는 1년에 봄, 가을 2차로 하되 음식 접대는 두 동리에서 분담한다.
◆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동리는 임원회 결의에 의하여 매 열 대를 친다.
◆ 말을 조심하지 않고, 웃옷을 벗고, 술에 취하여 자리를 소란하게 하는 자는 매 열 대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