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2020년대
백이정 선생과 난곡사
상세내용
◈ 백이정 선생과 난곡사 ◈
남해는 이재 백이정의 정신이 곳곳에 배어 있는 곳이다. 그가 지난간 곳은 설화로 가득하다. 남해에 남긴 백이정의 정신은 성리학의 교화, 지방문화의 배양, 향토정신으로 남아 있다. 백이정의 삶의 무대가 되었던 이동면, 삼동면, 남면 등에는 수많은 설화와 지명이 남아 있다.
▶ 백이정의 탄생설화
난곡사가 있는 마을을 고랑촌이라 했다. 옛날에는 뜸으로 된 20여 호가 사는 작은 골이었다. 이 곳이 백이정이 손수 심었다는 느티나무 이재수가 있는 곳이다. 예전부터 전하는 말에 희하면 백정승을 모시는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 당제는 군자정에서 행해졌는데 그 이유는 백이정의 탄생지라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어느 날, 해질 무렵, 난음리 산막골 어떤 집에 머슴살이 하던 한 총각이 뒷산에서 나무를 해서 집으로 내려오는데 산길을 올라오는 여인을 만났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두 사람 모두 놀랐다. 총각은 아녀자의 몸으로 땅거미가 짙어오는 저녁에 산길을 오르는 것이 이상하여 이유를 물었다.
“낭자는 무슨 연유로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산길을 오릅니까?”
처녀가 나직이 말했다.
“사람 사는 곳이 산 속보다 더 무서운 산에서 살아갈까 합니다.”
총각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저 아랫마을에 사는 머슴인데 저희 주인어른이 인자하고 마음씨 좋기로 소문난 분이니 하룻밤 머무르고 난 후에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백씨 총각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처녀가 안쓰러워 재차 자신이 머슴살이 하는 곳에서 같이 지내기를 권유했다. 처녀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밤에 산 속에서 지내는 것이 사실 무섭기도하여 다음날 일찍 산에 올라 거처할 곳을 찾기로 생각하고 총각의 제의에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처녀는 주인의 인간됨과 백씨 총각의 인정이 남다름을 느끼고 그 집에서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 처녀는 살아가면서 백씨 총각의 인간됨에 반하게 되었다. 결국 두 남녀는 혼인을 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아들, 딸을 낳아 살았다.
남편은 아내가 어디에서 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자식들도 커가고 생활의 안정도 찾아가게 되자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사연으로 이 섬까지 와서 산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려 했습니까?”
“저는 서울 양반댁에서 태어났지만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이곳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의 도움으로 옛일은 모두 잊고 잘 살게 되었으니 다시 부모님을 찾아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게 해야겠습니다.”
아내는 편지를 써서 남편에게 서울 친정집을 다녀와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편지를 가지고 처갓집을 찾아갔다. 처갓집에서는 그동안 딸의 생사마저도 모르고 있다가 백씨의 편지를 보고 기뻐하면서 사위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백씨 내외는 아들을 서울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하여 고려의 대들보가 되었으니 그 분이 바로 백이정 선생이었다. 시문마을은 백이정 선생이 활을 쏘던 곳이라 살문이라 불렸고, 후에 살 시자를 써서 시문리가 되었다.
이 설화는 백이정의 탄생을 남해에 결부시킨 것이다. 설화의 내용은 백이정이 남해로 은둔이나 유배가 아니고 아버지 백문절이 남해로 내려왔다는 것이 된다.
수원 백씨 중 남포 백씨가 충남 보령에 있다. 이곳의 남포가 남해현의 난포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백이정의 선대에서부터 남해현 난포에서 났다는 이야기가 남해군에 널리 퍼져 있다.
▶ 성리학의 도입자 이재 백이정을 주벽으로 모신 사당
고려시대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원나라 수도 연경에 10년간 머물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다.
백이정은 이제현과 박충좌 등에게 학통을 계승시켰고, 이색, 정몽주 등을 거쳐 조선시대 김종직, 조광조 등에게 성리학을 전승시킨 핵심적인 유학자였다.
그러나 왕도정치를 정주학에서 터득한 백이정은 고려 말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남해로 은둔하여 만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백이정이 남해로 와서 은거한 곳은 난음마을 군자정 옛터로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조선 선조 때 서원을 세워 안향·권보와 함께 배향하기로 했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남해군 남면 평산리 우지막골에 백이정 선생의 묘가 남아 있어 1925년 난곡사라는 사우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