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2010년대
남해문협 제14집
상세내용
◈ 남해문협 제14집 ◈
▶ 중국 왕소군 묘역의 기념 공연
중국에는 묘가 많다. 그래서인지 유명해지면 묘가 여러 군데 있어 어떤 것이 진짜 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대만의 따이중에 가면 공자묘가 있는데 본토에도 같은 묘가 있어 관광객들을 놀라게 한다.
마찬가지로 왕소군의 묘도 몽골에만 여러 곳이 있다고 하며, 중국 남부 감숙성에도 있다고 전하지만 내몽골의 수도 후허하오터시의 남부 대흑하에 근접해 있는 그의 묘가 진짜라는 데는 중국인이나 몽골인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 어찌하여 왕소군이 그렇게 유명하게 되었는가? 이는 더 말할 나위 없이 그녀의 묘와 연극 때문이다. 필자가 그의 묘를 찾은 것은 1991년 여름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이 묘역에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란 것은 그 규모와 형상에서였다. 묘역에 들어서니 바로 앞에 몽골인들의 기상을 볼 수 있는 말을 탄 동상이 있고, 왼쪽에는 임시 가설 무대가 있으며, 오른쪽엔 표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묘 앞에는 두보의 시비를 비롯 1963년 당시 중국의 부주석 동필무가 이곳을 참관하고 지은 시비가 눈에 보이고, 그 제일 앞 쪽에 '한명비 왕소군지묘'라는 묘비가 있었다. 우측 돌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묘 앞에 '소군청총색외유방'이라 쓴 비석이 또 보인다.
묘 전체의 높이는 33미터, 천천히 둘러보며 오르면 10여분이 걸릴 정도였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묘 꼭대기까지 오르니 중앙에 노대가 있고 그 위에는 6각으로 된 누각이 우뚝 세워져 있다.
묘 주위는 꽃과 나무들이 울창하며 누가 안팎 둘레에는 사람들이 그위에서 시원한 휴식을 취하며 경관을 감상 할 수 있게 확 트여 있다. 우리 식의 묘가 없어 "위에 까오, 귀에 까오(눈떡, 아이스크림)," 를 외치는 여인에게 물었더니 자기가 앉아 있는 주변이 묘라고 가르킨다.
원나라 문채파의 작가 마치원의 역극 <한궁추>에는, 한원제는 화공 모연수가 의식적으로 잘못된 그림을 그려 왕에게 보이므로 오래도록 가까워질 기회를 못 얻는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왕에게 발견된 왕소군은 왕의 총애를 받게 되나 모연수의 간계에 의해 흉노한 호한사단우에게 시집가게 된다.
그녀가 가는 도중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 <한궁추>의 내용이다. 즉 마묘사, 왕소군에 대한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한층 더 깊은 인상으로 심게 하려는 작의를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작품이지 그녀에 대한 얘기는 그의 무덤만큼이나 많은 얘기를 남기고 있다.
즉, 소군이 흉노왕에게 시집간 후 곧 그가 죽자 왕의 아들에게 시집간 것을 이 작품에서는 국경의 장에 몸을 던져 버린 것으로 묘사했고, 모연수가 재물에 탐을 낸 것을 더 과장, 한나라를 반역해 나중에 흉노에게서 압송하여 한나라에서 형을 당했다는 등 이야기는 구구하다.
사실 진한이래 한과 흉노 사이엔 장기전이 계속돼 쌍방 국민들도 화평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에 흉노왕은 한과 좋게 지낼 양으로 공원전 51년에서 33년 사이 세 차례 한원제를 친견한다. 그 결과 한원제도 변방의 안녕을 위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또 왕소군은 서한 때 지금 호북성에서 출생, 한원제의 궁녀였다는 설도 있다. 서한 전설을 기록한 문학 작품집 『서경잡기』 가운데는 왕소군이 나타나 가깝게 지낸 이야기가 전한다. 한원제 때 궁녀가 너무 많아 왕은 일일이 만날 수 없으므로 화공에게 궁비를 그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보고 조치했다. 그래서 많은 궁녀들이 5~10만금을 화공에게 뇌물로 주면서 만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한원제를 볼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안 한원제는 궁에서 화공 전부를 내쫓아 버렸다는 것이다.
필자가 왕소군의 묘에서 내려왔을 때 무대에선 <한궁추>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 연극이 <한궁추>인지 후에 변경된 <왕소군>인지 필자는 아깝게도 모두 볼 수 없어 단언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왕소군을 기리기 위한 기념 연극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