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남해군
정영모(鄭英模)
상세내용
▶ 정영모(鄭英模)
정영모 선생은 1902년 7월 25일 경남 남해군 설천면 비란리 574번지에서 아버지 정규수와 어머니 류재춘 슬하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때는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기 위하여 비밀공작을 수행하고 있을 시기였다.
선생은 사숙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논어』, 『맹자』등을 배우면서 애국심과 애족심이 점차 성장해 갔다.
남해 3·1운동을 지도한 한 분인 정재모 선생의 아우로 다 같이 혁명가요 애국지사로 손샌이 없는 훌륭한 집안이었다. 친형 정재모 선생이 3·1운동으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가산이 탕진되고 일제의 감시와 감독이 날로 극심해 가정의 위기에 처해진 상황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형님의 채무를 갚아 형제일신의 의로움을 실천하기도 했다.
옥고를 치른 형님의 지도로 포덕 72년에 입도하여 교당의 방침에 따라 실천을 철저히 하면서 극일, 반일의 신앙으로 울분을 달래시었다. 한 집안에 항일투사와 천도교인이 함께 나오자 일본과 천황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면서 일제 경찰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졌다. 일제의 감시는 날로 심해져 농촌 청년들이 일제에 정신이 팔려 친일로 돌아서면 취업, 학업에 유리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정재모, 정영모 형제는 천도교만이 국운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군내청년들에게 포덕과 애국 계몽에 앞장섰다. 부회를 열 때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인적이 없는 해안을 통해 개최했고, 공동묘지에서 부회를 개최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1926년부터 일제는 사이비라는 굴레를 씌워 고현면 이어리에 있던 종리원을 해체했다. 설천면 비란리에 남해교구의 첫 건물을 신축할 때 망운산골에서 목재를 운반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전심전력을 다하신 분이다.
일제의 종교 탄압은 극에 달해 불교와 기독교 외에는 인정하지 안고 교인들의 출입을 제한했다. 집에서 나가면 보고하고 논밭에 갈 때와 오면 경찰 파출소에 보고하라는 요구가 계속되자 수백 호에 달하던 교호수가 겨우 7명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신축 교당에서 7인 동지회를 조직해 교당을 지켰다. 묵암 신용구 선생의 교회를 받아 다시 수백 호의 교세를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전쟁 때 노량리에 계시던 회암 하준천 선생을 좌익계열에서 암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석암(공의열), 환암(하점준), 우암 세 분이 밤중에 30리 길을 달려가 회암 선생을 모시고 문의리 윤주사(윤봉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밤낮으로 지켰다고 전해온다.
천도교남해중앙교당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봉사(1972년)했고, 또 선도사로 예우직을 수행하시었다. 선생은 평생토록 천도교를 위해 정성, 정열을 다하시다가 1994년 3월 2일 90세의 일기로 환원(별세)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