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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항일독립운동가

남해군

김명진(金明軫)

내용
미 포상 항일투사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남면 선구리
시대
-

상세내용

김명진(金明軫) 호 : 우암 (憂菴)

김명진 선생은 경남 남해군 남면 선구리 1248번지에서 부친 구정 김성재와 모친 정씨 슬하에서 태어났다.

서기 1907년 7월 24일 출생하신 김명진 선생은 천품이 준수하고 기우가 활달하며 몸이 장대하고 의위가 비범했다.

한문사숙에서 6년 동안 배울 때 『천자문』과 『명심보감』, 『논어』,『맹자』, 종용을 익혔다. 1921년 남명보통학교 4년을 졸업하고, 1928년 3월 5일 남해불교중학교를 월등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27일자와 중외일보 1928년 10월 21일자에 의하면 서울에서 개최되는 전국정구대회에 대구, 김해소년회 등과 함께 남해소년회, 즉 해성소년회 이름으로 참가했다. 해성소년회 제3회 정기총회가 남해군 남면 운암공회당에서 개최될 때 김명진 선생이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두문(李斗文 : 1906년 9월 12일생) 선생은 해성소년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이두문선생은 남해군 남면 가천리에서 태어나 73년 천도교에 입도하여 우암 김명진 선생과 함께 많은 헌신을 했고 교규설립의 공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격이 강직하여 불의와 타협을 모르고 지나치게 고집스런 분이었다.

전남 여수로 옮겨 살면서 전도실을 건립할 때 협력하고 일찍이 환원(별세)했다.(『천도교남해교사 336면』)

해성소년회에서 서울주재 천도교에서 애국 강사를 초빙하여 강연을 실시하자 일경이 나타나 강연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단체의 해산을 강요하고 협박하니 1930년 이후 부터 활동이 중단되었다.

1940년 3월 10일 남면종리원 원장 김명진 선생은 전도사 이두문, 성도집 이민수, 경도집 김학진, 신도집 박진기, 법도집 박원홍, 지도집 하봉구, 감사부 김학선, 박수원, 부령 김해도, 박치근, 조영호, 정덕호, 강장엽, 양종길 등과 함께 종리원을 설치했다.

1931년에 남면 선구리에 초가 삼간으로 교당을 처음으로 설립했으나 9년 만에 종리원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1940년부터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어 종교의 자유는 없어지고 마음대로 집회를 개최할 수 없었고 반일운동의 온상이라고 이유로 일제 정찰이 김명진, 이만수 등을 체포하여 130일간 구금하게 되는데 교호가 70여 호로 줄어들었다.

1942년에는 사아비 종교라는 굴레로 초가삼간은 매각 처분하도록 했다. 1945년 8월부터 선구리 공회당을 약 1년간 임시 교당으로 사용하다 김명진 사재인 아래채를 10년간 임시 교당으로 활용했다.

1951년 5월 1일 김명진 선생은 남면 종리원 종리사에 선출되었고 1953년 8월 1일 남면선구교구를 인가받아 초대 교구장에 김명진 선생이 임명되고 교당 낙성식에는 묵암 신용구 선생이 참석했다.

1969년 10월 28일 김명진 교구장의 부인 법수당 박차엽(만인의 어머니 상)이 환원(별세)했고, 1976년 2월 7일에 17차 전국대의원 대회에서 우암 김명진 선생이 최고위직교령에 당선되었다.

법수당 박차엽여사는 남해군 남면 석교리 박씨 가문의 1남 7녀 중 4녀로 태어났다.

김명진 선생과 결혼하여 평생을 부군을 도우며 교회 대소사를 보살피는 부화부순의 산 증인이요, 한국적인 여인상의 표본이었다.

도인들이 방문했을 때 점심 식사를 열두 번 지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부드러운 말씨와 인자한 얼굴 그를 아는 교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천도교남해교사』 337면)

김명진 선생이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와 최고 교직인 교령에 당선된 것은 본인의 수도에 대한 정성이 있었음을 물론이요 부인 법수당의 독실한 수련의 정성이 뒷받침이 있었으며 아들, 따님의 효성의 힘이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남해해성중학교를 창설하여 5년간 교장직을 수행하며 어려운 환경에서 학교 시설을 확충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육영사업가로 존경을 받았다.

1973년에 항일투사 정재모 선생 묘비를 건립할 때 건립위원장이었다.

천도교 남해중앙교당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이 되어 봉사하고 대한성인교육회 남해노인학교장을 6년간 역임했다.

1977년 4월에는 천도교연원회 부의장으로 피선되었고 1990년 9월 13일 83세로 환원(별세)했다.

우암 김명진 선생 묘비문은 석암 오익제가 글을 짓고 관암 양재한이 쓴 것인데 몇 줄 읽어 보면 다음과 같다.

김명진 선생은 본관이 김해요 가락국 수로왕 71세손이다. 육영사업에 뜻을 두시어 삼남보통학교와 해성중학교를 설립하는데 전력하시고 농촌계몽과 지역 사회 개발에 앞장 선 분으로 잔인한 일제에 저항하여 민족 자립운동에 분연히 일어나 싸우시다가 체포당하여 모진 고문 속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천품이 영달하고 온화하면서도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는 굳은 기개를 지니셨으니 대범한 지도력을 발휘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