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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항일독립운동가

남해군

이상태 (李相兌)

내용
이상태 (李相兌)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삼동면
시대
1891~1955

상세내용

▶ 이상태 (李相兌,1891~1955)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1891년 9월 17일에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105번지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동지들과 계몽노동 단체인 조선노동대회를 조직 한 후 조선노동 총동맹에 합류하여 독립운동 중흥목적, 한흥회조직활동을 하였다.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문 탁(文鐸)·김영만(金榮萬)·이종만(李鍾萬) 등과 더불어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노동자의 상부상조와 인격적 및 지적향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한 계몽적 노동단체였다. 초대회장은 김광제였으나 그가 사망하자 동년 8월 임원진을 개편하였는데 회장에 문 탁, 부회장에 정태용(鄭泰容), 총무에 윤철중(尹喆重), 서무에 송우익(宋又翼), 영업에 김호연(金浩然) 등이었고 그는 재무를 담당하였다. 동회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기존 노동단체의 규합에 힘써 한때 회원이 8천여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내부갈등과 재정난으로 활동이 위축되던 중 1924년 4월 통일적이고 전국적인 노동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 합류하였다.

한편 그는 김종명(金鍾鳴)·김인섭(金寅燮)과 함께 1919년 8월에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탄압이 심하여 국내 각지의 독립운동이 점차 약화되어감을 개탄하고 이를 다시 중흥할 목적으로 1921년 11월 15일 경기도 인천의 인해여관(仁海旅館)에서 한흥회(韓興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후 국내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 폭탄·권총 등의 무기가 필요할 것을 예상하고 이의 사용방법을 미리 습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으로 가서 무기사용법을 익히기로 한 이들은 1921년 12월 16일 인천을 출발, 중국 상해(上海)방면으로 향하던 중 경의선(京義線) 차련관(車輦館)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2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3년 7월 25일 가출옥하였다.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유림단 조직 항일운동... 진주·남해 어업권 확보에도 총력

 

광복80주년을 맞아 정봉주 前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하고 하전 이상태 선생의 보훈부 공적서기록을 게재한다. 공적서 내용에 따르면, 이상태 선생은 3.1운동 직후 유림단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옥고를 치른 후 진주와 남해를 거점으로 일제에 빼앗긴 어업권 확보와 어민보호에 앞장서고, 정봉주 전 위원장의 도움으로 공적서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 바꿔 게제했다.

 

공적서(功績書)

 

이상태는 남해 탈출 후 진주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유년시 진주 봉래서당(逢來書堂) 유학 동지들의 도움이 컸다. 그의 항일 독립운동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남해 탈출 직후부터 활동을 개시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9년 4월 15일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 86번지 자기 방에서 (영남)유림단(儒林團)을 조직하니 단원은 무려 50명에 이르고 단장에 추대되니 명실공히 영남 유림 독립지사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상태는 유림단을 조직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19년 9월에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참가함으로써 그의 독립운동의 활동영역을 전국적으로 넓혔을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와도 비밀금 모금에 있어서 남해의 거부 김주석과 윤도천(애국지사, 3선 국회의원 윤병호의 친형) 두 지사의 적극적인 호응에 크게 힘입었다 한다. 그리고 그의 모금 활동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내 활동에는 여건의 한계를 느끼고 보다 결정적인 독립운동을 완수키 위해서는 임시정부와 합류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이 첩경임을 절감하고 실질적 해외망명 길에 나섰다.

 

이상태는 1920년 4월 임시정부로 가는 도중 서울에서 일경에게 피검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당시 보안주임(과장?) 이원보(李元甫)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종로경찰서를 탈출할 수 있었다. 이원보(전북지사 역임)의 회고에 의하면 이상태가 서울에서 체포된 것은 상해와 인천을 왕래하는 화물선에서 모 독립자시의 소지품에서 이상태에 대한 임시정부의 발령장(직책미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종로경찰서를 위기일발로 탈출한 이상태는 행상을 가장하여 전국 각지를 전전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다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1921년 11월 김종명(金鍾鳴), 김인섭(金寅燮) 동지들과 함께 상해에 망명코저 인천에서 상해행 선편을 기다리다가 동년 11월 15일 인천부(仁川府) 용강정(龍岡町) 인해여관(仁海旅館)에서 급거 출동한 일경에게 피검되었다. 피검시 이상태는 독립자금 제공자 명단을 신속히 입속에 삼킴으로써 많은 동지들의 고초를 면케 할 수 있었다.

 

인천경찰서에서 온갖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는 심문이 3개월여나 계속된 끝에 겨우 조사가 끝났는데, 고문 중에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대침으로 손톱, 발톱 사이를 수없이 계속 쑤시는 것이었다고 이상태는 후일 모 인사에게 실토한 일이 있었다 한다.

 

익년 2월 28일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이 선고되었고, 동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일심 형량이 확정되어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23년 7월 25일 출옥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고초를 겪고도 이상태는 추호의 동요나 주저도 없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니, 이는 잔인무도한 일제의 단근질도 워낙 청직(淸直), 강의(剛毅), 총혜(總慧)한 그의 천성에는 미지근하였거나, 또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그의 애국충절을 더욱 자극한 탓이었으리라. 다시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동지들의 규합과 독립자금 모금에 심혈을 기울이기를 4년여의 세월을 소비하고 다시 진주에 낙향하였다.

 

그가 진주로 돌아오자 유림 독립 동지들과 독립자금을 출연(出捐)했던 동지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의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고초를 위로하였다. 특히 독립자금 제공자 명단을 입속에 삼킨 기지와 그 혹독한 고문을 감내하여 많은 동지들을 보호해준 용기에 그들은 크게 감명되었다.

 

이들 동지들은 이상태를 중심으로 다시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기로 굳게 맹세하고 자금을 거출(醵出)하여, 진주에 갑을탕(甲乙湯)을 신출하여 이상태에게 운영케 하고 이곳을 독립투쟁의 거점으로 하였다. 이상태는 이 여관의 운영을 가장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이 여관은 많은 독립투사들의 도피 또는 휴식처로 제공되었다. 이상태의 독립자금 모금은 일관되게 계속되었다.

 

이상태는 남해 출신으로 어업에 남다른 감심(感心)을 가졌으며 어업 경영에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진주 갑을여관을 운영하는 한편 향리 삼동면 지족리에서 어업을 경영하였다. 이 어업 경영은 독립자금 조달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일제는 조국 강점 이후 농토의 수탈뿐만 아니라 어업권도 약탈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남해 연안의 어업권도 날로 일인들에게 잠식되었다.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남해는 도민(島民)의 생활 터전이 무엇보다도 어업에 있음을 누구보다도 있는 그는 극도로 분개하여 일인들의 간계를 저지하고 빼앗긴 어업권을 되찾아 주고 어민보호에 사재를 털고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 남해수산고 신축 이전에 재산 희사... 수산 인재 육성에 헌신

 

이상태의 독립운동의 활약은 간단없이 계속되었으나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민족의 황민화 정책도 최후 발악으로 극에 달하여 독립운동이 극도로 제약을 받게 되자, 1943년 2월에 삼동면 동천리 271번지 구릉에 해관암(海觀庵)을 지어 수양을 가장하고 동지들을 불러들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동지들이 다 떠나고 주위가 적막하면 그는 홀로 남해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조국의 앞날을 관조하고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저도 모르게 장탄식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의에 빠지지않고 스스로 자신의 심신을 채찍질하여 가면서 독립운동과 독립자금 모금 활동은 조국이 해방되기까지 멈추지 않았으니 그의 조국에의 일편담심은 만고에 빛날 것이다.

 

이상태는 조국의 해방에 누구보다도 감격이 깊었으나 그 감격도 가시기 전에 조국의 재건과 부흥에 이바지코저 지방의 사회사업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삼동면 미조리 소재 남해수산고등학교를 면소재지지족리로 이전 발전시키기 위하여 면 유지들을 설득하여 학교 이전 신축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의 대임을 맡았다.

 

자신의 농토와 많은 재산을 희사하고 관계요로(문교부, 도교육위원회, 도건설국 등)를 동분서주하는 등 불철주야 노심초사하였다. 남해의 어업 발전에 기여코저 육순의 노구를 이끌고 수산 육영사업에 생애 최후의 정력을 소진하게 되니 수년의 각고 끝에 마침내 쓰러지고 와병으로 두문불출의 몸이 되었다. 1955년 11월 12일 [공적서 원문은 '12월 21일'이나 착오로 보여 수정함] 휠체어에 실린 몸으로 학교 낙성식을 참관하였으니 과연 누가 그의 감개와 허무를 통찰하였으랴.

 

학교 낙성식 후 불과 한 달여[원문은 '3일']만에 이 남해의 거목 독립투사가 쓰러지니 삼동면민들의 애통함은 친부상 못지않았다 한다. 남해수산고등학교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학교장(學校葬)으로 그 영령을 위로하고, 그이 독립 공정과 학교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55년 11월 12일 교정에서 하전 이상태의 기공비를 건립하였다. 그 비문은 별지와 같다.

 

전국 애국청년들로 1909년 조직된 대동청년당원(大東靑年黨員)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 활약했었고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윤병호(尹炳浩, 애국지사, 대통령표창 수상, 63년도)는 평소 이상태 선열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하천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은 실로 크고 장한 것이며 이렇게 훌륭한 선열이 남해 출신임은 정말 남해의 자랑이요 명예가 아닐 수 없다"고 역설하고, 국회의원 입후보시 정견발표 때마다 이상태의 독립운동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항일투사 정신을 길이 받들어야 한다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여 군중으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었다.

 

1954년 4월경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장군은 이상태의 와병중에 친히 비서를 대동하고 남해에 와서 이상태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상호 독립운동 시절을 회고 위로하였는데 철기(鐵驥, 이범석의 호)는 "하전(河筌)의 발병은 일제의 잔악한 고문 탓이다"라고 분개하면서 낙루(落淚)하니 주위는 숙연하였다.

 

남해 항민들은 아직도 한결같이 이상태의 불굴의 항일독립투쟁을 찬양하고 그의 애국, 애족, 애향 정신을 흠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숭고한 호국영령 이상태의 독립 공적에 대하여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수반되는 것이 도리이며, 따라서 국가는 마땅히 상훈에 있어서도, 훈격의 재심, 재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90년 2월 5일 독립유공자 홍창식(洪昌植)

 

◎ 하전 이상태 선생 기공비

 

선생은 일찍이 민족을 사랑하고 교육을 장려하며 산업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시더니, 삼일운동 때는 임시정부와 깊은 관계를 가지시어 국내 요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왜정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시지 못한 채 오랫동안 영어의 고초를 받으셨고, 민생경제에 깊은 뜻을 쓰시어 특히 수산업 발전에 큰 공을 남기시었고, 만년에 이르러 수산학교를 이전 신축하자 궁핍한 재정으로 원대한 계획을 세워 지방 인사와 굳게 손을 잡고 널리 동지의 협조와 당국의 원조를 받아 육 년 동안 병구를 이끌고 불철주야 불피풍우의 노력과 물심양면의 공헌으로 오늘의 이 석조전의 위관을 이루게 되었음은 실로 선생의 공적이라 이에 비에 새겨 길이 후세에 빛내고저 하는 바이다.

단기 사천이백팔십팔년 십일월 십이일(1955.11.12.)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