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단종조 남해유배객_조관(趙貫)과 조숙(趙叔)
상세내용
조관(趙貫)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훈대부, 삼척부사 겸 수군첨절제사, 삼척진병마사를 역임하였고
승록대부(종1품) 중추부 판사를 지냈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 일당으로 몰려 이듬해 셋째 형 숙(叔)과 함께 남해로 유배되었다.
10여 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세조 14년(1468)에 풀려나 숭록대부에 올랐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양주의 서산(西山)에 은거하여 문을 닫고 왕실을 걱정하면서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왕조 : 조선 시대 : 초기 왕 : 단종 본관 : 한양(漢陽) 유배기간 : 1455-1468
조숙(趙叔)
조관(趙貫)의 셋째 형으로,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 일당으로 몰려 동생 조관과 함께 남해로 유배되었다고 전해진다.
왕조 : 조선 시대 : 초기 왕 : 단종 본관 : 한양(漢陽) 생몰연대 : 한양(漢陽)
단종(端宗 생몰: 1441-1457), <재위: 1452. 5-1455. 윤6. 3년 2개월>
(1) 시대 상황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수렴청정 할 대왕대비나 대비, 심지어는 왕비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맡아 했는데 황사정표 제도를 썼다. 즉 인사문제에 있어 조정에서 지명하는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그 점에 낙점하는 방식이다. 이때 고명대신으로는 황보 인과 김종서였다. 그래서 왕족인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웅 등의 왕숙들은 정권을 집권하려고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인 안평은 서로 세력싸움을 하기에 이르렀고 1453년 10월에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을 일으켜 영의정에 올라 안평대군과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안평을 사사하고 우직을 진도로 유폐시켰다.
이처럼 정치 실권을 수양대군이 장악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듬해 수양은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종친, 궁인,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단종은 위험을 느끼고 왕위를 내 놓으면서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겼다.
세월이 흘러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사건이 일어났는데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사형당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역시 단종복위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자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과 부인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다.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으로 다시 추봉되었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출처. 남해유배인물 100인전 >
단종조 남해 유배객
조관(趙貫)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훈대부, 삼척부사 겸 수군첨절제사, 삼척진병마사를 역임하였고 승록대부(종1품) 중추부 판사를 지냈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 일당으로 몰려 이듬해 셋째 형 숙(叔)과 함께 남해로 유배되었다. 10여 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세조 14년(1468)에 풀려나 숭록대부에 올랐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양주의 서산(西山)에 은거하여 문을 닫고 왕실을 걱정하면서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왕조 : 조선 시대 : 초기 왕 : 단종 본관 : 한양(漢陽) 유배기간 : 1455-1468
계유정난으로 조관을 비롯하여 중형인 갱과 종손 섬 그리고 교형에 처한 박이령, 조석강, 한숭, 박하, 황귀존, 김상충, 이차, 안막동, 양옥, 최노 등의 부자, 조손, 형제 중에 나이가 16세 이상인 자는 거제, 진도, 제주, 남해 등의 읍에 부처하였다고 하니 남해로 유배된 사람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먼저 계유정난이 일어나게 된 동기부터 알아보기로 하겠다.
수양대군은 야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전혀 무관심한 행동을 하였고 대신들이 보기에는 왕족의 왕권쟁탈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아주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심지어는 명나라에 고명 사은사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갔다가 단종 원년(1453) 4월에 돌아왔다. 수양대군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신숙주를 막하로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을 심복부하로 삼아 모반을 꾀하였다.
그해 10월에 안평대군 주위에 집권하고 있는 대신 황보인, 김종서 등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10일 밤에 수양대군은 양정, 한명회, 권람 등을 시켜 우의정 김종서와 아들을 철퇴로 피살하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3 조정 대신을 대궐로 불러 들여 참살하였다.
이때 참살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웅부를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유웅부는 계유정난을 비유한 "절의가" 한 구절을 지었다.
『간밤에 부던 바람에 눈서리(수양대군의 횡포) 치단 말가 / 낙락장송(조정의 충신들) 다 기울어 가노매라 /
하물며 못다핀 꽃(조정의 젊은 학사) 이야 닐러 무엇하리오』 라고 하였다.
계유정난으로 남해에 유배 온 조관(趙貫)에 대한 한양조씨 세보 기록은 다음과 같다.
『조관은 한양조씨 충정공 4번째 아들로서 6세손 판사공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훈대부, 삼척부사 겸 수군첨절제사, 삼척진병마사를 역임하였고 승록대부(종1품) 중추부 관사를 지냈다. 단종이 화(계유정난)를 입을 때, 중형인 사평공 갱과 증손인 섬과 함께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한 때는 종마관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중추원부사로 있을 때 사은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기록된 조관의 요약연보에는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사평 갱(賡)의 아우이다.
세종 13년(1431)에 종마관압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뒤에 집현전교리를 거쳐 1445년에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48년 중추원부사에 이르렀고 문종 즉위년(1450)에 사은사로 이견기와 함께 연경에 다녀왔다. 단종 3년(1455)에 단종이 양위하자 셋째형 숙(叔)과 함께 계유정난에 연유되어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세조 14년(1468)에 풀려났는데 10여 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이듬해 숭록대부에 가자(加資)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양주의 서산에 은거하여 문을 닫고 왕실을 걱정하면서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일찍이 세종 때 상호군으로 함길도성기간심사가 되어 용성과 길주 읍성의 이설지를 시찰한 일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남해로 유배 올 때 중형 갱과 중손 섬이 같이 왔다고 세보에 기록하고 있지만 인물정보시스템 인터넷 자료에서는 셋째형 숙과 함께 유배된 것으로 되어 있어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남해 어느 곳에서 언제까지 어떻게 유배 생활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배에서 풀러나 후손이 번성하였기에 조관은 한양조씨 판사공파 시조로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단종실록에 의하면 계유정난으로 교형, 유배당한 자의 부자, 조손, 형제, 모녀, 처첩, 자매 등에 대한 형벌 중 남해로 유배시킨 내용이 있다.
"(전략)의금부에 전지하기를, 박이령, 조석강, 한숭, 박하, 황귀존, 김상충, 이차, 안막동, 양옥, 최노 등은 교형에 처하고 정분, 조순생, 이석정, 조충순 등은 전에 안치한 곳으로 보내어 종으로 삼아 소속시키고 정효강, 이춘 등은 극변의 관노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교형에 처한 삶의 부자, 조손, 형제 중에 나이가 16세 이상인 자는 거제, 진도, 제주, 남해 등의 읍에 부처하고 15세 이하는 어미에게 주어 기르게 하여 장정이 된 뒤에 부처하고 모녀, 처첩, 자매는 그 자원에 딸라 외방에 부처하고 아들의 처첩과 백부, 숙부, 형제의 아들은 모두 노하지 말라 하였다.“(하략)
앞의 내용을 종합하여볼 때, 계유정난으로 남해에 유배 온 유배객은 조관외 친족 2명 뿐 아니라 죄인의 내외측, 처가 등 친인척의 상당수가 남해읍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유배 생활을 하거나 또는 종이나 관노 등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이름과 숫자는 알 수가 없다.
<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동학지(東鶴志)』>
<기타 인물>
이석정(李石貞)
단종 1년(1453)에 안평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경북 포항의 연일(延日)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남해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듬해 1454년 8월 15일 태조와 문종의 능에 추석제를 올리고 환궁하던 단종이 중신들의 뜻에 따라 이석정을 처결하라는 문헌 기록이 있다.
왕조 : 조선 시대 : 초기 왕 : 단종 본관 : 미상 생몰연대 : 미상~1454년
정원석
정원석은 단종 1년(1453)에 세조를 모해한 죄로 1454년에 남해로 유배되어 노비가 되었다. 몇 개월 뒤 아내 만금도 남해현의 노비로 유배되었으며, 정원석은 이듬해 1454년 단종의 처결 명에 따라 사형되었다.
왕조 : 조선 시대 : 초기 왕 : 단종 본관 : 미상 생몰연대 : 미상~14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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