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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이야기

조선시대

연산군 남해유배객 : 이인, 엄귀손, 배계종

내용
왕조: 연산 휘: 이인(李仁) 본관: 전주 생물연도: 1465~1507 유배기간: 1504~1507 유배시관직: 영춘군(왕손) 최종관직: 숭헌대부 유배사유: 아들 기사건 연루, 왕조: 연산 휘: 엄귀손(嚴貴孫) 본관: 미상 생물연도: 미상~1500 유배기간: 1500~1500 유배시관직: 우후 최종관직: 우후 유배사유: 홍길동과 통한 죄
출처
남해문화원_남해유배인물 100인전
출생지
-
시대
조선 연산군

상세내용

연산군(燕山君 생몰: 1476~1506) (제위: 1494. 12-1506. 9. 119개월)

 

정황(政況)

 

성종시대는 조선시대 중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군자임음 자칭하였고 가족으로는 12명의 부인과 30명에 가까운 자식을 얻었다. 성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윤씨는 숙의의 신분에서 중전에까지 오른 인물로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으로 인하여 폐비되었는데 윤씨의 아들 세자 융(연산군)은 4살 때 윤씨가 폐비되었기에 사사(賜死) 된 것을 모르고 자랐다.

 

1483년. 8세 때 세자로 책봉된 급은 내면을 쉽게 나타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이 있었다.

 

1494년 12월. 19세 때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12년 집권기에 두 번의 사화(무오, 갑자)를 풍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하였다.

 

갑자사화 이후 폭정은 노골화되었다. 언론 주축인 사간원을 없애고 정치 논쟁을 피하기 위해 강연을 폐지하였으며,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 폐지와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를 없애고 장악원으로 개칭하여 기생들의 모임장소로 만들었다. 또한 사냥을 위해 민가를 도성에서 30리 밖으로 철거하였고 훈민정음 사용 금지와 한글서적을 불태웠다.

 

패륜적 행위를 일삼는 폭군으로 낙인이 적힌 연산군은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패하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반란군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둥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그 해 3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연산군조 남해 유배객

 

왕조: 연산 휘: 이인(李仁) 본관: 전주 생물연도: 1465~1507 유배기간: 1504~1507

유배시관직: 영춘군(왕손) 최종관직: 숭헌대부 유배사유: 아들 기사건 연루

 

성종과 부인 12명 사이에서 출생한 16남 12녀 중 페비윤씨 소생인 현 연산군은 왕위에 올라 선정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페비윤씨가 사사된 사실을 알고 폭군으로 돌변하였다.

이때, 세종의 3번째 부인 신빈김씨의 5남인 영해군의 아들 영춘군 이인이 그의 둘째아들 기() 사건에 연좌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죄목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연산군 시대의 주요 사건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라 불 수 있는데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이 노하여 유배를 보내게 되었고 이인은 왕손이기 때문에 항상 왕손의 주위에는 세력을 잡기 위한 대신들의 견제 대상이었다.

 

이인은 세조 11년(1465)에 출생하여 성종 5년(1474)에 영춘군에 봉해지고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에 올랐다가 얼마 안 되어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연산군 3년(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와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 여파로 연산군의 폭정과 독재정치를 참지 못하던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정현왕후 윤씨 소생인 진성대군 (성종의 둘째아들. 중종)을 옹립하여 왕으로 추천하는 중종반정에 이인은 연산군 12년(1506) 9월에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나 정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연산군이 집권하기 전 성종시대는 조선을 통틀어서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지만, 홍망성쇠가 있듯이 호황이 있은 뒤에는 불황이 뒤 따랐다. 연산군의 모친인 윤씨는 숙의의 신분에서 중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폐비론으로 대두되어 서인으로 폐출, 사사되었다.

 

이인(李仁. 1465~1507)

이인은 조선 전기의 왕실 종친으로 자는 자정(子靜)이며 세종의 9남 영해군 당의 아들이다. 성종 5(1474) 영춘군에 봉하여졌으며, 사옹원제조를 지냈다. 연산군 때 아들 기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 형제가 모두 유배당하였으며, 이인은 남해에 정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되고 정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엄귀손(嚴貴孫)

왕조: 연산 휘: 엄귀손(嚴貴孫) 본관: 미상 생물연도: 미상~1500

유배기간: 1500~1500 유배시관직: 우후 최종관직: 우후 유배사유: 홍길동과 통한 죄

 

연산 6년(1500) 10월 28일에 홍길동을 도와 엄귀손의 처벌을 의논한 내용이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엄귀손은 죄가 마땅히 관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을 모두 회수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정승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윤필상이 의논 드리기를, “포악하고 독한 무리끼리 작당하여 백성들에게 큰 해독을 끼쳤으니, 이같은 도적들은 사람마다 분개하는 것입니다. 만약 들었다면 의당 고발하여 체포해야 할 것인데, 엄귀손이 홍길동(洪吉同)의 행동거지가 황당한 줄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고 또한 따라서 산업까지 경영하여 주었으니, 법으로도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죄가 법과 합합니다.” 하고, 어세겸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이 비록 홍길동의 음식물을 받아 먹었지만 이것은 인정에 보통 있는 일이니 그다지 허물함 것은 못 됩니다. 그러나 국문을 당하여도 승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졸급하게 율문에 ‘실정을 알고도 죄인을 숨겨준 조문’ 을 적용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고,

 

한치형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은 본래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선왕 때에 포도장 이양생이 엄귀손의 홍천 본가에 가서 황당한 물색을 수색해 냈으나 그 때 겨우

면했었는데, 지금 또 홍길동의 음식물을 받았고, 또 일찍이 주선하여 가옥을 사 주었으니 홍길동의 범한 짓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형벌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고,

 

성준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은 범죄와 율이 서로 꼭 맞습니다.” 하며,

 

이극균은 의논 드리기를, “엄커손이 다만 홍길동의 행동 거지가 횡당한 것을 알면서도 주선하여 감추어 주었다면 적용한 법이 너무도 적당하겠지마는 만약 홍길동이 장물을 기탁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법을 적용할 수 없으니, 홍길동의 문초 끝나기를 기다려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니, 한치형의 의논대로 하였다. ...중략...

 

“엄귀손은 무식하나 힘이 있는 사람이니, 만약 변방에 유배시킨다면 적인들과 서로 통하여 포악하고 사나운 자들과 무리를 이루어 불칙한 짓을 하게 될 것이고, 남해(南海) 같은 데라면 포악을 부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12월 21일에 엄귀손이 옥중에서 죽었다.

 

앞의 기록을 볼 때 홍길동을 도운 엄귀손은 유배지가 남해로 결정된 것이 1118일인데 1221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므로 남해까지 유배오지 못하고 옥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유배령이 남해로 설정된 사실이 있기에 언급하였다.

 

<문헌 燕山君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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