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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구 - 라이프스토리

내용
최봉구 - 남북신뢰 프로세스의 주창자
출처
망메새

상세내용

남북신뢰 프로세스의 주창자

최봉구 전 국회의원을 만나다

 

 

 

최봉구 동문은 남해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전직 국회의원이다. 최 동문의 인생역정과 관련하여 1988년 4월 26일에 있었던 제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국회 의석 숫자는 16년 만에 소선거구제가 부활되어 지역구 224석과 전국구 75석을 합친 총 299석이었다. 이들 중 민정당이 125석(전국구 38석), 평민당이 70석(전국구 16석), 민주당이 59석(전국구 13석), 공화당이 35석(전국구 8석), 한겨레민주당이 1석(총선 직후 평민당에 입당), 그리고 무소속이 9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당정치가 정착된 이래 최초로 집권여당이 과반수 의석확보에 실패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이른바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이 형성됐던 것이다. 당시에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한 평민당에는 문동환, 박영숙, 조승형, 서경원, 양성우, 박석무, 이철용, 이상수, 김영진, 정상용, 이해찬 의원 등 제야 시민운동가들이 많이 입당했다. 최봉구 동문은 남해에서는 입당을 차마 꿈도 꿀 수 없는 평민당을 통해 야심차게 제13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성하여 남북신뢰 관계의 구축을 위한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최봉구 전 국회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경제외교를 통해 경색된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일익을 담당하고 싶은 열정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실제로 최 의원은 북경을 수 십 차례 오가면서 민족화해와 민족평화 정착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에 최봉구 전 국회의원은 분단된 한반도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염원하며 민족애와 인도주의 정신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북 인도적 지원 및 협력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한반도가 불신과 반목으로 평화가 무너지고 전쟁의 위기와 긴장이 조성되는 것을 해소하려면 민간 차원의 경제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최 의원은 미술품 교역을 위해 북경을 수십 차례 오가면서 남북 간 신뢰 회복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의 주춧돌을 놓았다.

 

최 전 국회의원은 유례없는 한반도 긴장국면 속에서 터진 대화의 물꼬를 잘 살리기 위해서는 남북한 모두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인식한 나머지 '평화의 시계'를 경제 외교를 통해 움직여 보려고 시도했다. 최 의원의 노력으로 '남북 신뢰회복'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북 간의 평화체제정착을 위해서는 신뢰를 쌓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현재 박근혜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정책 아이디어가 최봉구 의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셈이다.

 

사실 최 의원은 DJ 정권 때 대복통이었다. 최 의원은 북경을 중심으로 미술품 교역을 꾸준히 하면서 중국의 경제인들과 맺은 두터운 인맥을 활용하여 북한에 경제교역의 물꼬를 터는 일에 앞장을 섰고, 당시에 정치인으로서는 최 의원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단독 방문했다. 최 의원은 중국 어로수역에서 조업하다 안개 속에서 NLL를 잠시 월선하여 납북된 우성호 선원 11명을 석방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최 의원은 북한 측 관계자에게 다음처럼 말했다고 한다 : "강대국 군사논리에 끌려 다니지 말자, 풍선을 계속 부풀리면 터져 버리듯 긴장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남북한이 서로 박수받는 정치를 하자. 선원들은 모두 불쌍한 서민들이다. 7000만의 행복을 위한 정치를 하자, 참새는 베 까먹고 나쁜 짓만 하기에 우리는 항상 나쁜 새라고 인식한다. 반대로 제비는 항상 희망을 안겨주고 좋은 일을 하기에 좋은 새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나쁜 일 계속하면 참새 같은 존재가 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참새 같은 존재가 되어야 되겠느냐!" 북학 측 배석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쳤고, 얼마 후에 우성호 선원 11명이 석방되었다고 한다.

 

최 봉구 전 국회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고 원내 활동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14대 공천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 적극적으로 공천경쟁에 뛰어들었더라면 14대 국회의원도 무난히 힙성을 했을 것이지만 정작 본인은 사업가 체질이니 정치는 성격에 맞지 않아 포기했다고 한다.

 

최봉구 전 의원은 남해인들 사이에 대검차장을 지내고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한 육영수 영사의 서거사건을 수사한 바 있는 고(故)김일두 변호사의 대검차장 시절 비서관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최 의원은 워낙 정직하고 성실하고 일을 주도 면밀하게 잘 처리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서관으로 있기에 아까운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실제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최봉구 전 의원을 일단 만나서 대화하고 겪어보면 감탄하고 탄복한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도 최봉구 의원과 막걸리 잔을 몇 잔 나누는 사이에 그 분의 면모를 새삼 확인하였다.

 

최 전 국회의원은 남해의 피조개 사업에 투자하여 성공을 한 경제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지녔다. 1979년에서 2000년까지 피조개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친형이 관리하고 자신은 투자만 하였지만 최 의원은 남해의 피조개사업 개척자인 셈이다. 최 의원은 당시에 공무원이었던 친형이 피조개 시세가 좋아 이 사업을 남해 강진바다에서 시작하면 사업전망이 좋겠다는 사업 제안을 듣고 그곳에 피조개 종패 160만 개를 뿌렸다고 한다.

 

최 의원은 이 사업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작했다고 한다. 모든 일에는 5% 정도의 변수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고 한다. 최 의원이 무척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죽어서 혼불이 되어 자식들을 항상 지켜줄 것이다"는 말씀을 굳게 믿었다고 한다. 결국 최 의원은 조상님들이 잘 돌봐주어서 사업에 성공했다고 사업 성공의 공을 조상님들에게 돌렸다. 당시 피조개는 채취와 동시에 100%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새벽에 작업하면 오후에 동경과 오사카에 바로 배달되는 원스톱 수출체제를 획기적으로 갖춘 것이 주효하였다.

최봉구 전 의원은 피조개사업의 성공 못지않게 국회의원 재임 때도 남다른 역량을 발휘하였다. 최 전 의원은 제13대 때 평민당 원내 부총무를 3년 간 지냈고, 민주청년연합중앙회 회장과 남북신뢰회복추진협의 회장을 역임했다. 최 전 의원은 후배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언제가는 인생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강조한다. 최봉구 전 의원님! 건강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