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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준 - 라이프스토리

상세내용

군인의 길을 지킨

우리시대의 진정한 참 군인, 박효준 장군

 

 

박효준 장군(기무사 소장 예편)은 우리 동문들에게 어떤 존재와 의미로 다가올까? 어떻게 보면 박 장군은 '보리 고개'를 처절하게 겪었던 척박한 시대에 우리에게 오롯이 등불을 밝혀준 '등대 같은 존재',  '삶의 나침반이자 지도와 같은 존재.'  '우리시대 진정한 참군인' 등 그 어떤 찬사도 과하지 않은 그런 분이다.

 

그런데 박 장군은 뼛속까지 군인이면서도 군인 이미지를 풍기지 않아 참다운 군인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어진다. 박 장군이 34년 간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원리 원칙에 충실하며 강직하게 살아오면서도 부하 장교들이나 사병들에게 너무나 친근하고 인자했기에 박 장군과 함께 한 군인들은 모두 큰 형님이나 아버지 같은분으로 생각한다. 아직도 박 장군이 장교시절이나 준장과 소장이 되어서도 향우나 동문의 아들들이 근무하는 군부대를 직접 찾아가 이들과 해장국을 먹은 일화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박 장군은 1942년 임오년 말띠고, 설천면 동비가 고향이다. 진목초, 남해중, 남해농고를 졸업하고 간보 후 보생으로 군인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소대장 시절 2년을 근무하고 당시 보안사, 지금의 기무사로 차출되어 그곳에서 32년을 근무한 후 예비역 소장으로 퇴역했다. 박 장군은 비육사 출신이 군 요직에 근무하기 어려운 현실이 무색할 정도로 34년의 군 생활 중 32년을 보안사, 칠칠칠(일명 써리 세븐) 특무대, 기무사 등 주요 보직을 두루 지냈다. 하지만 박 장군은 보안사와 기무사 제1처장, 군 인사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철저한 자기관리로 단 한 번도 원리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인사잡음을 겪지 않았다.

 

박 장군은 "조직사회에서, 특히 군대라는 조직사회에서 신상필벌이 엄격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망하기 마련이다"고 단호히 말한다. 박 장군이 기무사 재임 때 행한 일화를 소개하면, 당시에 장교들의 포상과 포창은 대부분 인사 참모들이 독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장군이 근무하는 부대만큼은 소속부대의 특성과 성격을 정확히 반영하여 엄격하게 포상과 포창을 했다고 한다. 박 장군은 기무사의 예하 부대의 경우 암호와 신호 분석이 핵심활동인 점을 감안하여 암호와 신호 분석에 뛰어난 공적을 낸 장교와 사병이 반드시 포상과 표창을 받는 전통을 수립했다고 한다.

 

박 장군은 인터뷰하는 동안 34년 간 군 생활 중에 가장 보람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칠칠칠 특무대에 근무하던 시절 박 장군이 DMZ 철책선을 마주하고 있는 향로봉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향로봉은 병사들이 세수도 못할 정도로 물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 사실을 박 장군은 직접 확인하고 곧바로 인근에 살고 있는 수맥 전문가인 이치영 스님을 수소문하여 즉각 해결했다고 한다. 이치영 스님이 향로봉의 지질과 수맥을 탐지한 결과 지하 60m 깊이에 샘이 풍부히 흐르는 것을 예측했고, 실제로 그곳의 땅을 파 본 결과 정확하게 60m 지하에서 수맥이 터졌다고 한다. 향로봉 본부 대장이 그 자리에 모인 장병들에게 "존경하는 박 장군님의 덕택으로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던 물이 해결되었다"고 말하자 그곳에 참석한 모든 군인들이 울먹였다고 한다. 박 장군은 그 때 세수조차 하지 못하며 지낸 병사들의 눈물어린 환한 밝은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후 박 장군은 이치영 스님을 모셔 기무사 본부 법당 부근 지하 84m 지점의 수맥을 뚫어 부족한 기무사의 물을 해결했다고 한다.

 

또한 박 장군은 고향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친근한 큰 형님으로 통한다. 박 장군이 1994년 보안사 처장 시절 동비 마을 사람들이 판문점 탐방을 하게 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에 일반 사람들이 단체로 판문점을 관광하거나 방문하려면 군수나 도지사의 보증이 있어야 가능했고, 보증이 있어도 수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박 장군이 고향에 살고 계셨던 형님(박영환님)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의 판문점 관광 소망을 전해 듣고 직접 보증을 하여 이를 곧바로 해결했다고 한다. 박 장군이 당시 25사단 사단장으로부터 휴양소의 사용을 양해 받아 직접 그곳에 찾아가 고향사람들을 후하게 대접하게 되었는데, 그 후 설천 청년회를 비롯해 남해 향우들의 판문점 관광을 직접 보증하는 사례들이 빈번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이, 박 장군 연배의 장군들 중에는 자신들의 소중한 군인생활을 하루아침에 청산하고 정치에 입문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박 장군은 기무사 근무시절 군 조직을 관리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으면서도 끝내 정치입문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군인의 길을 지킨 참다운 군인정신을 실천하였다. 기무사 소장으로 퇴역을 하고 당시에 함께 했던 부하들이 하나 둘씩 장군으로 진급하는 소식을 들으면 그만큼 즐거울 수가 없다는 박 장군의 말에서 참군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느껴진다.

 

현재 박 장군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과거 보안사와 기무사에 32년 근무했으면 정말 큰 부자가 되었을 법도한데 바보 아니냐고 종종 농담 아닌 농담을 들을 때가 있다고 한다. 박 장군은 군 생활에 충실 하느라 세상물정 모르고 살았는데, 그래도 옛날에 살던 집이 장군이 살아온 집이라는 세상의 인식 때문인지 당시 시세보다 높게 팔려 지금 강남 서초동의 100평 남짓한 집을 새로 장만하여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박 장군은 이증자 여사와 함께 슬하에 1남 2녀(장남 박인섭, 장년 박지숙, 차녀 박지현)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박 장군은 아내와 자녀들을 보면 늘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고 말한다. 박 장군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자녀들이 성장할 무렵 아버지의 손길과 애정이 필요할 때 그곳에 정작 당신이 없었던 것을 못내 가슴 아파한다. 박 장군은 아이들이 잠자고 있을 때 출근하여 아이들이 잠들어 있을 때 퇴근했음에도 자녀들이 모두 대견스럽게 잘 자라고 사회에서 자기역할을 충분히 잘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박 장군은 군 생활 동안 아버지가 못 다한 빈자리를 채워준 부인께 고마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를 끝낼 무렵 박 장군께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화가 걸려 왔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전직 국회의원과 기자협회장을 지낸 분의 전화였다. 대화 일부는 프로야구팀 NC의 야구경기 실황 얘기임을 알 수 있었다. 퇴역 장군의 소박하고 행복한 삶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참군인 박 장군과 함께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장군님! 건강한 모습으로 야구경기 오래 오래 즐기면서 행복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