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고일웅 - 라이프스토리
상세내용
어려움을 이겨낸 저역으로
오늘을 이루기까지
▶ 흔히 말하는 두 가지 경우와 그 것을 초월하는 경우를 전제하면서
누구나 성장과정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명암이 갈리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성공이 좌절된 사람들은 흔히 성장과정에서 인적 물적 환경의 열악했던 탓을 많이 하고 여러 환경이 좋았던 사람은 후일담을 말할 때는 자기의 치적을 나열하며 좋았던 환경보다는 자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고일웅 회장은 어떤 경우일까?
두 가지 경우를 초월한다. 그는 어려웠던 고향에서의 여러 환경이 주는 담금질로 세상을 헤쳐 가는 힘이 생성되었고 그러한 인고의 과정이 오늘에 와서도 몸에 배었다고 한다. 남면 상가 출신인 고일웅 동문은 중학교를 다닐 때 읍에서 출발하여 연죽 삼거리에서 남면 쪽을 가다보면 고실고개를 넘게 되는데 날이 저물고 비라도 올라치면 그 곳이 너무나 무서웠다고 한다.
그 고개를 넘어가는 길가에는 군데군데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실제로 귀신을 만나 혼이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와 비가 오는 밤중에 이 고개를 넘는 것은 금기사항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통학을 하다 보면 어두워져 이 고개를 넘기가 힘들어지면 동네 선배 두 사람은 서면 쪽의 친척집으로 가버리게 되고 그는 혼자서라도 그 무서운 고개를 넘어왔다고 했다. 머리끝이 쭈뻣쭈뻣해지다가 부엉새라도 울면 혼비백산 하여 냅다 뛰면서 무서움을 뿌리쳤다고 한다. 고일웅 동문도 서면 쪽으로 가는 동네에 세분의 고모가 계셨지만 무서워서 고모집에 왔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자존심도 나중에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 듯하다고 했다.
▶ 어려웠던 어린 시절, 무서운 고실고개의 기억 그리고 가족사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농사를 짓는 어머니를 도우면서 가뭄에 타는 벼들을 살리느라 밤새도록 웅덩이의 물을 퍼 올리는 일을 했고 동생은 물이 새어나가는 갈라진 논바닥을 발로 밟아 메워야 했다. 겨우겨우 낟알을 단 벼는 또 멸구가 덮쳐 벼들이 거의 타들어가 주저앉으면 굶기를 각오해야 하고 연명하려면 칡뿌리라도 캐어먹어야 했다. 그러니까 일제 치하에 허덕이다가 광복 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대한민국 50년대와 60년대 이야기다. 그 시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거의 이런 어려움을 당했기에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하는 일도 많았다.
잠깐 세월을 좀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출생에 대해서 알아보면 고일웅 동문은 1945년생이다. 호적상 9월 29일생이지만 사실은 해방 3개월 전 일본(궁기현 동구저군 부도정대자 1809번지 : 호적등본에 기재)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자동차운전을 했던 그의 아버지 고병순(98년 작고)씨는 해방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그 당시 남해는 자동차가 없었기에 운전기술을 가진 아버지는 서울에서 직장을 이어가야했고 고일웅 동문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와야 했다. 그 당시 운전은 고급 기술이어서 그런대로 벌이가 좋아 서울에서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번 돈으로 행복한 생활을 하던 중 6·25 전쟁이 터지고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에게 붙들려 트럭을 몰았던 그의 아버지는 수복 후 부역자로 몰려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어, 고일웅 동문의 어머니 하말희(92년 작고)씨는 가족을 데리고 남해로 내려왔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어머니는 고일웅 동문의 아버지의 생사를 알기 위해 굿을 하였지만 사망으로 나타났으나, 어머니의 끈질긴 노력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고 장승포로 이주하여 약 2년 동안 천막 생활과 배급으로 주는 통밀을 받아 밀밥을 먹고 살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 석방 때 풀려나 남해로 돌아왔고 부산에서 다시 운전일을 했다고 한다.
3. 고향에서의 학창시절을 끝내고 부산으로, 서울로, 그리고 사우디로···.
남해에 내려온 고일웅 동문은 상덕초를 졸업하고 남해중을 2학년까지 다니는 동안 농사를 짓는 어머니를 도왔다. 상가에서 읍내의 남해중학을 다니는 2년간의 학창시절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배워야 산다는 일념 아래 해 저문 무서운 밤길, 고실 고개를 넘어 다닌 이야기는 서두에서도 한 바 있다.
그리고 1960년 가족과 함께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고교 졸업 후 1966년 부산대학교 토목과에 입학했고 1967년에 육군 입대하여 제대한 후 1970년에 대한종합기술단에 입사했으며 1978년 8월까지 근무하다가 퇴사하여 그해 9월에 한국종합조정공사에 입사하여 1년 만에 나와서 다시 1979년 10월에 (주)삼호주택에 입사했다. 1980년부터 사우디에 파견되어 토목공사를 설계하면서 토목, 설계실장과 기술담당 사무직에 있다가 1992년에는 (주)삼위공영을 창립하여 대표이사로 취임하게 된다. 그 후 1997년 4월에 IMF 외환위기와 (주)한보 부도로 5월에 오늘의 (주)지오콘건영으로 상호변경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98년 4월에는 서울시 기술심사 자문위원에 위촉되었으며 2008년 9월에는 한국토지공사기술 심의위원(토목분야)에 또 위촉되었다. 이와 같은 일은 고일웅 동문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외국전문가들과 15년간 3개의 신도시(턴키베이스)공사를 건설한 경험이 있어 우리나라의 기술이 선진국과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러한 능력이 오늘 날 20년이 넘게 지오콘건영의 대표가 되기까지의 원동력이었음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외에도 고일웅 동문은 측지기사 자격과 특급 기술자로 등록된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 자녀교육과 향우회와 향우산악회에 쏟은 정성
1남 2녀의 자녀들도 잘 키워 결혼한 장녀 고재영(39)씨는 인하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연수를 마쳤으며 인천 송내에 거주하며 시사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역시 출가한 차년 고재은(36)씨는 경기대 관광개발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개봉동에 검사 집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역시 결혼한 장남 고재홍(34)씨는 성결대 전산학과를 졸업하고 인천대학 전산담당 교수를 하고 있으며 부모님과 같이 거주하고 있다.
고일웅 동문은 2009년 재경남해군남면향우회장을 맡으면서 맨 먼저 그 당시 13개 마을 정도 조직된 마을별 향우회를 26개 마을 전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다. 그리고 돈 때문에 향우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향우들을 위한 연금제도를 만들고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 위한 계획도 수립하는 등 회칙 개정 등에 애를 많이 썼다. 재경남해군남면상가부회장, 재경남해군 구로구 부회장, 예함의 집 경로지원회장을 역임하였거나 현재 재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제주 고씨 남면상가 평장묘 설립자로 2006년도에 완성하여 84기의 위패를 모시고 관리회장을 맡고 있다. 이것은 곧 몸은 서울에 있으되 마음은 고향으로 이어져 있음을 뜻한다.
최근 5년간 고일웅 동문은 재경남해군향우산악회 향우들과의 산행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가한다. 몸과 마음을 다지고 고향 사람들과의 끈끈한 정을 이어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였는데 단합을 상징하는 시범을 보임이라고 한다. 일흔이 다 된 나이임에도 1000m 고지를 젊은이들과 오르고, 2013년 8월과 9월에 있었던 강원도 덕산기 계곡과 용소계곡의 트레킹을 소화함은 물론 10월에 있었던 무밥 2일의 영남아프스 고난도 산행도 거뜬히 해냈다. 필자는 고일웅 동문과 위에서 열거한 8, 9, 10월 고난도 트레킹과 무박 2일의 산행에 동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탄탄한 체력과 정신력이 남달랐다.
그리고 그의 듬직한 성격과 봉사정신이며 애향심을 배운다. 물심양면으로 재경남해군향우산악회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 평균적으로 매월 군 향우들과의 산행에 참여하는 최고령의 나이다. 아직도 일선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그의 굳건한 정신력과 체력이 산행을 통하여 이어지기를 빌어본다.
▶ 좌우명과 함께 우리의 토목을 평가한다.
고일웅 동문의 생활신조를 알아보니 가훈은 '복의 근원이 되라'이고 좌우명은
1. 사랑의 빚 외는 빚지지 말자.
2. 100번 당할지라도 남을 해하지 말라. (속여서 괴로움 당하는 것보다 낫다.)
3. 1%의 가능이라면 도전하라. 꿈은 이루어진다.
4. 무슨 일이든 10번의 10번을 생각하라. 그러면 답이 있다.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의 신조는 변하지 않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에 이른 고일웅 동문이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직장도 토목 분야에서 종사한 만큼 그는 초지일관 한 우물만 팠다. 며 오늘 날 젊은 세대에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해외에서 토목공사에서 주로 설계에 참여하면서 외국의 선진기술을 많이 배운 탓에 국내의 기술력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고일웅 동문은 '우리의 기술력은 선진국의 60%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지금도 기술선진화가 퇴우선 과제다.' 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원칙과 법을 무시하는 관행이 없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선진국은 설계한 그대로 시공하고 우리는 시공한 후에 설계를 변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최근 에도 설계대로 시공되지 않아 완공한지 며칠 만에 건물에 비가 새고 벽이 떨어져 나간 청사가 매스컴에 대서특필 보도되었고 대형 아파트의 지하실이나 벽에 금이 가거나 물이 새고 다리나 건물이 붕괴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현 듯 필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