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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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오 - 라이프스토리
상세내용
가난을 무기로 오뚝이처럼 일어선 박현오 동문
공연, 드라마 등 무대설치 분야의 1인자
김건모, 신승훈, 박미경, 쿨론, 이미자, 패티 김, 조영남.....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 이런 가수들을 포함하여 연예인들이 대중들과 만남을 통해 화려한 조명을 받으려면 무대가 있어야 한다. 무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대와 보이는 무대가 있다.
'보이는 무대'를 꾸미는 분야에서 대한민국 제1인자로 불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자랑스런 동문이 있다.
각종 콘서트, 드라마, 연극, 영화 등의 무대 장치를 제작, 공급하는 (주)코리아무대 대표가 바로 박현오 동문(남중 20회, 남해종고 2회졸)이다.
박 동문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로 제작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극적인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의 삶은 가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바다를 끼고 있지만 농사짓는 가구가 대부분인 남해읍 입현리 토촌 부락에서 나고 자랐다. 박 동문은 남해종고(토목과)를 졸업하자마자 그 시절 많은 동문 선배들이 그랬던것처럼 '무작정'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그를 기다려 준 것은 '막일'과 '떠돌이'인생. 그러나 이것이 훗날 인생의 고비마다 그를 오뚝이처럼 세워주는 원동력이 될 줄은 당시에는 몰랐다.
부산에서 1년 정도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일단 번듯한 직업을 갖고 서울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실질적인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남산(예술)드라마센터에 들어가 예술전문대 과정을 밟았다.
그곳에서 그림을 전공한 박 동문은 1979년 졸업하자마자 당시 서울 정동에 있던 MBC 미술부 사원으로 입사한다. 그리고 1년 정도 근무한다.
"지금의 MBC와 조건이 많이 달랐겠지만 왜 그만뒀느냐"는 질문에, 박 동문은 "그 때는 월급이 8만원밖에 되지 않았다"며 순전히 급여 때문에 그만뒀다고 한다.
그의 다음 선택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3년 동안 일하며 받은 월급을 서울에 있던 누나에게 꼬박꼬박 송금했다고 한다. 훗날 귀국해 누나가 대신 저축해 놓은 이 돈으로 나중에 검찰청사와 법원이 들어선 서초동에 36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된 그의 인생 도전 3막.
그것은 전혀 새로운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영호실업이라는 봉제공장을 설립해 6년 동안 의류제작 및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완패, 욕심을 부려 여름에 겨울옷을 잔뜩 제작했는데 그 해 겨울이 따뜻한 바람에 엄청난 손실을 보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고 한다. 서초동 36평짜리 아파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이럴때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그는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일했던 혜화동 대학로로 돌아가 연극을 소개하는 무대그림을 그리는 일용직을 시작했다. 10년의 '외도' 끝에 '본업'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다가 전북 고창 촬영현장에서 KBS 사극 무대를 제작하는 작업에 참여해 능력을 인정받는다. 이를 계기로 바로 KBS에 특채돼 본격적인 무대장치 전문가로 올라선다.
KBS 내부의 노동조합 결성과 이어지는 방송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엉뚱한' 피해를 본 박 동문은 바로 KBS를 떠나 독자적인 무대 장치 사업에 뛰어든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한 단계 도약하는 것과 때를 맞춰 각종 음악회(콘서트), 디너쇼 등이 활발해지면서 그의 사업은 날개를 단다.
지상파 TV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CBS와 불교방송 등으로부터도 무대제작을 의뢰받는 등 이 분야에서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다. 경기도 파주시에 상당한 규모의 무대제작 공장도 가지고 있는 등 이 분야에서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최근에는 경기침체로 회사 경영이 상당히 어려워졌지만, 그는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눈치다. 이쯤에서 그의 가족들이 궁금해진다.
부인(1959년생)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봉제공장에서 일할 때 만나 어려움을 같이 이겨 낸 동지"라고 박 동문은 서슴없이 표현했다. 슬하의 두 아들 중 장남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고, 둘째아들은 디자인을 공부해 아버지의 사업을 거들고 있다고 한다.
박 동문은 무대 사업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나름의 성공을 이뤘지만, 부인은 지금도 패션 쇼 등을 위한 작업을 준비할 때는 과거의 '전문성'을 살려 바느질 실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맨 몸으로 올라와 사업에 성공할 때까지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겪었는데 그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선 원동력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돌아온 박 동문의 대답은 짧지만 분명했다. "어릴 때 너무 어렵게 살았기 때문이다. 가난이 지긋 지긋해서 죽기 살기로 일만 했다. 넘어지면 생각할 것도 없이 서고.... 벌어서(다른 사업하다)또 까먹고...."
그 과정에서 주위의 좋은 친구들과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주위로부터 받은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했다고 굳이 자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표나 총무 등을 맡고 있는 친구나 동창 모임이 어떤 것이 있는지 우회해서 물었다.
임기 2년의 전국무대미술장치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 동문은 사적인 모음으로는 재경 남해초등학교와 남해중학교 동기 모임, 호수회(일산에 거주하는 남해군 출신 55년생 모임) 회장을 맡고 있고, 55회(쌍오회) 산악회 모임은 총무를 맡아 물심양면으로 봉사하고 있다.
학교나 고향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박 동문의 말투는 지극히 투박했지만 삶의 고미 고비를 넘긴 자신감이 묻어난다. "뭐든지 열심히 하면 빛이 온다." 거꾸로 이어진 그의 질문이자 대답: "객지에 나온 남해 사람들이 왜(다른 지역 출신들보다) 잘 산다고 생각하나?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니까! 새도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