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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열 - 라이프스토리

상세내용

우리시대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진정한 경찰인

 

 

 

박종열 의정부 경찰서 감찰과장은 33년 동안 경찰 조직 내 인사부서에서 경찰인생 대부분을 보내어 진정한 인사 통으로 통한다. 그는 81년 초에 순경으로 임용되어 성북경찰서 경무과 7년, 서울시경 인사과(당시 남대문 소재)2년, 청와대(경찰경비단 경무과)8년, 경찰청 인사과 7년 등 약 24여 년을 인사부서에서 지냈고, 이후 현재까지 약 7여 년 간 감찰부서에 근무하고 있다. 박 감찰과장 본인은 "경찰의 경우 말 그대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주 임무라서 강도, 도둑 등을 잡는 수사나 형사를 포함해 교통, 정보, 외사, 보안, 경비, 방범 등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어 아쉽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경찰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우리시대에 박종열 감찰관장 만큼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지난 시절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지혜로운 인생 스토리의 자취와 흔적을 곳곳에 느낄 수 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지금도 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열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은 자기 한입 먹고살기 힘들지만 한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은 열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얘기를 가슴속 깊이 되새겼다고 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일에 전념해서 그 분야의 실력을 갖추려고 무척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박종열 감찰과장은 그 당시 어린 나이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며 부산으로 가출했다고 한다. 그는 집안 사정 상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고 명예보다는 부를 얻어야겠다는 판단으로 6학년 2학기 말 졸업직전 부를 찾아 노량 부두에서 무조건 경복호에 몸을 싣고 부산 땅을 밟았다고 한다. 그는 "직장을 잡으려 해도 어느 누가 어린아이를 받아 줄 것인가! 참 허무맹랑하여 소도 웃을 일이었다. 약간의 기간을 부산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부모님들은 난리가 나서 중학교 진학시험도 끝나고 방법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지난날의 철부지 시절을 회고했다. 그 후 그는 대국산과 녹두산을 오가며 쇠꼴 나무를 하면서 일년을 거의 산에서 보낸 후 남중 22회로, 우여곡절 끝에 또 보결로 남해 종고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신 잡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백령도에서 병장으로 제대한 후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고 한다.

당시에 박종열 감찰과장은 서울에서 노가다를 닥치는 대로 하던 중 어느 날 종로통에서 우연히 검찰사무직 채용공고문을 보게 되었는데, "아하 저게 내가 할 일이다"고 생각하고 주간에는 노가다 야간에 공무원 학원에 등록하여 열심히 공부해 경찰공무원 순경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고 한다. 박 감찰과장은 인터뷰 하는 동안 "별 실력이 없었는데도 운이 좋았는지 조상의 음덕인지 그래도 제법 상위점수로 합격하여 오늘에까지 경찰관으로 살아오게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였지만 그 때 일과 공부에 쏟은 열정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의 눈가에 스쳐가는 눈시울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박종열 감찰과장과 의정부 경찰서에서 가까운 보신탕집에서 소주를 몇잔 함께 나누는 동안 그는 그동안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잊지 못할 일화와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려주었다. 그는 "청화대 근무당시 대통령 세분을 모셨다. 5공이 끝나고 6공으로 이어지면서 청와대를 정기적으로 개방하여 국민들이 관람토록 하였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많은 관광객이 왔고, 특히 남해, 하동에서도 많은 고향 분들이 왔다. 고향 분들이 온다고 남해, 하동 군청 등에서 연락이 오면 본인이 직접 안내하여 청와대 전 경내를 소개 해주면서 관림시킨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또한 박종열 감찰과장은 문민정부로 이어지면서 일정기간 근무 후 경찰청 인사과로 자리를 옮겨 인사보임(승진, 발령) 담당으로 근무를 하였는데, 중간에 정부가 바뀌면서 경찰청의 제일 중요보직인 승진, 발령 업무를 고향(말씨)이 다른 사람이 맡고 있다고 업무교체 또는 서울 경찰서 전출을 계속 압박 받았다고 한다. 그는 "남해 촌놈의 고오매 뺏때기 먹던 건승으로 버티고 이겨 내었는데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생각하기 싫고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박종열 감찰과장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이러한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보람된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 예로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남과달리 외국 경찰의 제도 등을 비교 연구하기 위해 영국, 독일, 일본 등 선진 7개국을 각각 국비로 해외 연수를 다녀온 경험과 현직에서 받기 어려운 근정포장과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표창 등 40여 회의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진 빚인데 살아가면서 갚아야 할 일이다"고 말한다.

박종열 감찰과장의 남해인으로서의 긍지와 고향인들에 대한 사랑 또한 대단하다. 그는 6년 전에 5백여 향우가 살고 있는 <재고양·파주향우회장>을 맡아 향우회의 활성화와 고향 선·후배 간의 친목과 우의를 다지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동물은 귀소 본능이 있다고 한다. 즉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조금 젊었을 때는 퇴직 전에 고향 남해를 가서 봉사를 하면서 존경받는 경찰인으로 명예스럽게 퇴직 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니 생각이 바뀌고 또 여건이 되지 않아 5여 년 전에 도봉산 자락에 자그마한 농가 주택을 하나짓고 몇 평 안 되는 남새밭에 채소 등을 가꾸고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서울, 일산 등지에서 아파트에 만 오래 살다가 교외로 약간 벗어나 볼품은 없지만 땅을 밟고 산다는 것이 너무 좋다고 아이들도 좋아하니 다행이다. 이러한 삶이 아마 도시민들이 대다수 생각하고 동경하고 희망하는 그러한 삶이 아닌가 싶으니 나름대로 보람과 행복이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의 바램과 희망이 하나 있다면 총경으로 승진하여 고향 남해경찰서장으로 봉사를 꼭 한번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아직 남아있는 꿈과 희망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박종열 감찰과장은 부처의 법문 얘기를 이어가면서 "팔만대장경을 몇 마디로 요약 한다면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마라 사람차별 하지마라 뭐 이런 거 아니겠느냐. 얼마나 훌륭한 말이야 이렇게 하면 세상 잘 돌아간다. 경전 밤낮 달달 외운다고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과 북송시대 소동파처럼 인자함은 지나쳐도 좋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사람을 잔인하게 만든다는 말을 가슴 깊게 새기고,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언행을 삼가고 오늘도 동네 주민들과 어우러져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즐겁게 살자고 건배한다"고 말하면서 지혜로운 삶을 재차 강조했다. 인터뷰 동안 박 감찰과장이 줄곧 언급했던 것처럼 그의 인생 스토리 속에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지혜가 가득했다. 빠른 시일 내 남해경찰서에서 근무하는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선배님의 멋진 삶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