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문화와 역사

Home
문화와 역사
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박권효 - 라이프스토리

내용
박권효 - 30년 이상 장미 재배로 부러움 사는 '최고 독농가'
출처
망메새

상세내용

남해종고 3학년때 실습생 인연, 고양시서 '맨몸'으로 '장미 인생' 시작

                                                             30년 이상 장미 재배

            부러움 사는 '최고 독농가'

 

 

 

 

▶ 인연, 가난, 성실, 끈기, 희생, 선국자, 귀감. 그리고 부러움

 

남해종고 원예과 3학년 여름방학 때 화훼 실습을 위해 고양시와 인연을 맺은 뒤 30년 이상 이곳에서 장미재배에만 몰두, 많은 화훼 농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박권효 동문과 얘기하면서 떠오른 단어들이다. 박동문을 이해하는 열쇳말들이기도 하다.

박 동문은 현재 고양시 일산서구 법곳동에 1천 여 평의 현대식 농원에서 장미를 재배하면서 일반 농가에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소득은 물론 자신과 아내 등 가족의 품삯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대부분의 다른 농업도 마찬가지지만, 화훼농업의 특성 상 재배에서 수확과 포장, 판매까지 사람의 손과 발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 남해종고 화훼 선생님의 가르침과 인연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 첫째 일요일, 기자는 그의 법곳동 농장을 찾았다.

먼저 인연.

7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살아온 그는 남해종고 3학년이던 1979년 여름방학 때 원예과 백도현 선생님의 가르침과 소개로 고양시 삼송리 근처에서 국화, 안개꽃, 백합 등을 재배하는 농가에 실습을 오게 된다.

신체검사 후 고향에서 군대 영장을 기다리던 몇 개월을 빼고는 줄곧 이 농가에서 가족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화훼농사에 몸을 바친다. 당시는 고양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장미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지 않을 때였단다.

그러다 당시 남대문 꽃시장에 가보니 장미를 파는 가게는 몇 곳 되지도 않고, 자연히 부가가치가 훨씬 높아 '주인집'은 1982년부터 국화와 백합 등에서 장미 재배로 전환한다. 그리고 3년 뒤 박 동문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독립하여 장미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고향에서 올라올 때 차비 외에 단 돈 십원도 주머니에 없었지만, 6년 동안 일했던 주인집 어른이 연대보증을 서줘서 금융기관으로부터 400만원의 대출을 받아 900 여 평의 논을 빌려 장미농원을 시작한다. 그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지금도 1년에 서너차례 그 '주인집'을 방문해 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 박 동문 이후, 고양시 화훼농가 실습생들은 함평농고에서 남해종고 출신으로 교체

 

그 주인의 마음씨도 고맙지만, 그만큼 박 동문이 그 주인집에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누구나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박 동문은 굳이 자신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자랑(?)하지 않았다. 대신 이어지는 그의 말에서 모든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그가 1979년 여름, 남해종고 원예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고양시 화훼농가에 실습 왔을 때, 그 전부터 고양시 화웨농가에서는 전남 함평농고 출신들이 실습생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박 동문이 온 다음 해부터 전원 남해종고 원예과 출신들로 실습생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 고양, 파주에서 장미농사 협업하는 남해종고 후배들의 든든한 울타리

 

박 동문은 든든하다. 그가 고양시 화훼농가에서 인정받은 성실함과 희생 덕분에 남해종고 원예과 후배들이 계속해서 고양시로 실습을 오게 되고, 한 때는 고양시에서 장미농사 짓는 남해종고 후배들이 10명에 달한 적도 있었지만, 채산성 악화 등으로 다른 지역으로 가거나 장미농사를 포기하고, 지금은 장미농사를 짓는 4명의 후배들과 협업 시스템을 갖추고 오순도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단다. 그 후배들도 각자 1천평 이상의 장미 농사를 짓고 있다.

협업체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매월 회비를 걷되 일절 먹는 데 쓰지 않고 농원 시설 개·보수나 장미 재배용 농지 구입 등에 보탠다고 한다. 일년에 한 번씩 후배 가족들과 여행하는 것도 거르지 않는다. 지난 6월에는 1박 2일로 서해 백령도를 다녀왔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가 정말 자랑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박 동문은 지극히 겸손하다. 자기 자랑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신이 장미 농사를 처음 시작한 1980년대 초에는 백장미 한 다발을 남대문 시장에 갖고 가면 쌀 한가마 값을 받았을 정도로 수입이 좋았지만, 지금은 시설비, 난방(연료)비와 인건비 상승 등으로 화훼농가 전체가 어려워지고 있다며 후배들 걱정으로 화제를 돌린다.

자신의 '장미 인생'을 돌아볼 때 기억에 남는 일이나 애환을 꼽아보라고 했다.

"처음 고양시에 올라와 주인집에서 일할 때인데, 작업하면서 실수로 장미 한 송이를 부러뜨렸는데, 주인께서 그 장미 한 송이가 밥 한끼 값과 같다고 했을 때 정말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가르치고 고양시로 화훼 실습까지 주선해 주셨던 백도현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학교 수업 시간에 백도현 선생님은 같은 (단위)면적에 쌀농사를 짓는 것보다 국화나 장미를 재배하면서 최소 5~6배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늘 강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제대로 실갑났죠."

 

 

▶ 잦은 폭설에도 단 한 차례도 무너진 적 없는 비닐하우스 관리 비결

 

농장 관리용으로 지은 방안에서 기자와 인터뷰 도중 농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하던 얘기를 멈추고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간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진다. 눈이 많이 와 비닐하우스가 무너져 큰 피해가 났다는 뉴스가 가끔 나오는데 박 동문은 그런 적이 없냐고 물었다.

돌아온 그의 대답. 장미 농사지으면서 실패를 경험한 적도 없지만, 폭설이 와도 단 한번도 비닐하우스가 내려앉거나 피해를 본 적이 없단다. 놀라웠다. 비결(?)을 물었다. "시설을 특수하게 한 것이 아니라. 눈이 오는 족족 녹게 만들었죠."

과연 30여년 장미 농장을 경영한 최고의 전문가다웠다. 비닐하우스 지붕은 20~30cm 간격으로 두겹의 비닐로 되어 있고, 그 밑에 부직포 등으로 만든 두꺼운 커튼이 설치돼 있었다. 겨울철에는 두겹의 비닐과 부직포 커튼 등으로 난방을 하다가 폭설이 내릴 조짐을 보이면, 커튼과 두겹의 비닐로 된 지붕을 열어젖혀 비닐하우스 안의 열기로 눈이 내리는 즉시 녹아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다."

 

 

▶ 고향 이웃마을 출신의 헌신적인 아내에 늘 고마움 느껴

 

극히 최근에 베트남 출신 실습생을 한 명 뽑아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어떻게 30여년동안 1천여평 이상의 장미 농사를 혼자서 지을 수 있었을까?

역시 부찰부수다. 결혼하자마자 홀어머니를 고향에서 모셔와 같이 살면서, 두 아이 키우면서 장미 농사일까지 1인 3역을 묵묵히 해 낸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할 길이 없단다.

"장미를 키우는 농사는 제가 잘 하지만, 장미를 수확하고 다듬고 포장하는 일은 제 아내가 저보다 훨씬 잘 합니다."

 

 

▶ 장미농사보다 자식농사가 어렵다면서도 자녀도 훌륭히 성장시켜

 

장미 농사와 '자식 농사'중 어느 쪽이 더 어렵냐는 질문에 "자식 농사가 더 어렵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기자가 보기에, 1녀 1남의 자녀도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다. 딸(1985년생)은 인천 지역의 모 공사에 근무하고 있고, 아들(1987년생)은 고려대 환경공학과에 다니고 있다.

 

 

▶ 30여년 한 우물 판 '장미 인생' 스스로도 성공 평가

 

우리말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된 '아웃라이어(원저작명 : Outliers)'란 책에서 맬컴 글래드웰(Malcom Gladwell)은 '1만 시간의 법칙(10,000-hour)'이란 걸 내놨다. 어떤 분야에서건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의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박 동문이 장미 농사에 투입한 시간을 얼추 계산해 봤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투입 했을텐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12만 시간 이상 장미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을 터다. 그 결과, 누가 어떤 각도로 보더라도 그의 '장미 인생'은 성공적이다.  가난과 성실과 끈기와 희생이 가져다 준 값진 결실이자 멋진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