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김동규 - 모교의 역사, 추억, 학창 주변의 유배문학이야기
상세내용
추억의 농고생활과
고향발전모임 이야기
▶ 모두가 가난했지만 꿈은 부자였던 시절
1957년 남해농업고등학교(남해농고 전신)를 졸업할 무렵에는 우리나라가 문자 그대로 기아선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배가 고팠고 무엇이든 먹을 것만 있으면 불원천리 길도 마다않고 달려갔던 때이다. 아마 지금의 북한주민들이 그러할 것이다.
매년 4~5월경이면 어김없이 '보리고개'라고 해서 일년 중 가장 먹을 것이 없는 때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공부가 끝나고 집에 가면 김치반찬 하나에 보리밥 한술 먹고 곧바로 부모의 명령에 따라 소를 몰고 바지게나 풀 망태를 메고 산으로 갔다가 어두워질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산에 가서는 소도 풀을 뜯지만 우리들도 먹을 것을 찾았다. 주로 소나무의 새순을 꺽어 먹었으니 찔레꽃도 따 먹고 딱주(산도라지)도 캐 먹었다. 더러는 야산의 전답에 익어가는 보리를 훔쳐다가 구워먹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뚜드려 맞기도 했다. 그러나 얻어맞는 것이 배고픔보다 나았다.
그런데 이러한 야산의 먹을거리 중에서도 가장 고급메뉴는 뱀의 요리였다. 당시는 봄이 되면 너불때기(꽃뱀)가 많았다. 막대기로 잡아서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목 부분의 껍질을 찢어 밑으로 내리 훑으면 깨끗하게 벗겨진다. 그래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놈을 모닥불에 구어서 먹으면 닭고기 비슷하지만 지방질을 섭취하지 못했던 우리들에겐 그 맛은 천하일품이었다. 서울 롯데호텔 고급 레스토랑에 나오는 암송아지의 비프스테이크보다 더 맛있는 메뉴일 것이다. 이러한 추억은 나뿐만이 아닌 우리 세대의 공통적인 추억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하나의 유억(幼憶)이 있다. 당시 하도 쌀이 없어 끼니때 쌀밥은 매우 귀하여 집안의 어른이나 몸이 아픈 사람에게만 보리밥보다도 쌀밥을 우선적으로 주었기 때문에 나는 쌀밥이 먹고 싶어 어느 날 어머니에게 "엄마 나도 아팠으면 좋겠다." 고 했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매년 6월쯤 모내기철이 돌아오면 농고의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학교의 실습답에서 하루종일 모심기 행사를 하였다. 그날은 커다란 가마솥에 하얀 쌀밥을 지어 전교생들에게 점심을 주었는데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그때의 추억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집이 학교에서 먼 설천면이다 보니 읍에서 선소로 가는 길목 (보영대: 현재 남해보건소 자리)에 방을 얻어 친구(고채현/고동식)와 함께 자취생활을 했는데 늘 양식과 반찬거리가 부족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논에 심어 놓은 양파를 한밤중에 몰래가서 캐어다 훔쳐 먹었는가 하면 한번은 현재 남해대학의 기숙사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있었던 단감밭에 숨어 들어가 감을 따 먹다가 나무에서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옆에서 풀을 뜯던 황소가 달려와서 뿔로 받아버리려는 순간 몸을 피해 화를 모면한 친구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공공재산 절도죄로 잡혀가든지 구속도 될 행동이지만 당시는 절대빈곤의 시절이라 음식을 훔쳐 먹는 일은 사회적으로 묵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50여년 전의 이러한 일을 끝내 잊지 못하고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가 몇 년전 농고자리에 들어선 남해대학의 100만원을 기부하여 다소 위안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의 일인데도 엊그제의 일처럼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거에 비하여 지금의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학교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가이다. 학습용 테이프레코더 같은 것은 물론이고 라디오도 없었고 참고서도 없이 달랑 교과서 한권으로 공부했던 우리들과는 달리 온갖 교재와 학습기기 그리고 장학금까지 받으면서도 공부보다는 놀이에 관심이 더 많은 현재의 후배학생들이 부러울 뿐이다.
사람이란 판자집에서 서럽게 살아보지 않고는 양옥집의 고마움을 모르고 굶어보지 않고는 음식의 가치를 모르기 마련이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괴데도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의 이러한 학습환경 조건에서는 우등생과 열등생의 결정은, 지금처럼 고액과외나 학교등급에 의하여 결정되기 보다는 순전히 자신의 머리(두뇌)와 노력과 교사의 실력에 달렸던 것이다.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것도 중학교과정에서 선생님의 실력으로 판가름 나는데, 당시 남중의 영어 선생님으로 오신 분은 일본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고 채용한 나이가 드신 선생님이었다. 가령, 교과서에서 Gentleman (신사)이라는 단어의 발음을 일본식인 '젠또루망'이라고 했고 Grasshopper(메뚜기)라는 것도 '구라스호파'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도 선생님의 발음대로 따라 읽었다. 혀 짧은 서당 훈장님의 '바담 풍(風)'의 고사와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영어선생님의 별명으로 '그라스호르프'라고 지어서 불러서인지 지금도 누구나 알기 어려운 '메뚜기'의 영어단어를 아마 우리 동기들은 누구나 쉽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농고(農高)에 잠깐 계셨던 김용태(金容太)라는 국어과 선생님은 당시 국내 최고의 명문고였던 서울의 경기고나 서울고의 국어과 교사보다도 더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다. 국어교과서 학습단원 가운데서도 특히 고문(古文)을 얼마나 흥미롭고 쉽게 가르쳤는지 지금도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이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이조왕조의 찬가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등의 고전문(古典文)을 암기할 만큼 잘 배웠다.
1957년 2월 일주일에 영어수업이라고는 6시간밖에 없는 시골의 농업학교를 다닌 주제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아직 한번도 부산에도 가보지 못한 촌놈이 여수에서 평생 처음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는 대학입시제도가 지금의 수능과 같은 일제고사가 없었고 대학별로 주관식 문제로 출제되는 형식이었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던 서울사범대를 겨우 찾아가 제1교시 국어시험을 마치고 10분간의 휴식시간에 혼자 밖에서 웅크리고 있는데 마침 서울 경기고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수험생들이 내 곁에서 1교시 국어시험에 출제된 용비어천가의 고문해석 문제에 대한 정답을 두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다. 나는 쉽게 푼 문제였는데도 그들은 어려웠다고 하면서 틀린 것을 정답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국어는 이처럼 합격권의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수학이나 여타과목의 성적은 형편없었기에 합격한다는 것은 벼랑 끝에 달린 맛있는 열매와 같았던 것이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고향 남해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려운 생활환경과 학습조건 가운데서도 당시 우리들 학우들은 언제나 명랑했고 막연하지만 커다란 포부와 꿈을 먹고 살았다. 학우들은 자취방의 책상 앞에 'Boys be ambitious!'의 구호나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라는 격언을 써 붙여 놓았고 비록 배는 고프고 학습환경은 열악했어도 꿈과 젊음이라는 용기와 도전정신으로 충분히 메꾸었던 것이다. 영어공부도 <삼위일체>라는 당시 유명했던 참고서에 의존하면서 단어공부 방법으로 영어사전을 A부터 시작하여Z까지 단어 하나하나를 무조건 쓰고 외우는 공부법이 유행했다. 어떤 친구들은 그렇게 다 외운 영어사전을 완전 마스터 했다는 뜻으로 냄비에다 사전을 삶아서 물을 마시는 엉뚱한 만용도 부렸다.
여기서 남해제일고의 선배로서 지금의 후배학생들에게 멘토를 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의 옛날 선배들처럼 밥을 굶고 뱀을 잡아먹지는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3년간의 재학기간만이라도 죽어라고 공부만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생의 본분은 오로지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국의 어느 일류대학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남해의 학생이라고 대도시의 학생들보다 머리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생활환경이 맑고 신선한 남해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머리가 더 우수하기 때문인다.
몇 년 전, 시골의 어느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불우한 가정현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정살림을 돕기 위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길거리에서 리어카 장사를 하는 악조건하의 고된생활의 가운데서도 열심히 독학하여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이 있었다. 그가 쓴 책이 <공부만큼 쉬운 것이 없다>라는 제목의 책도 출판했다.
여러분의 고교 3년간의 분투는 졸업 후 30년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젖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 농부의 땀방울, 책 읽는 학생의 모습이 왜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각자 자신들의 본분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인류사를 빛낸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젊은 시절을 참으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했고 숱한 역경을 극복한 고비가 많았다. 이라는 소설에서처럼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켄트키주의 외딴 농장의 가난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언제나 고난을 용기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던 의지가 그를 유명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정주영 회장도 그랬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도, 청소년 시절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안일하면 장래에 큰일을 못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남다른 노력 없이 성공을, 고통과 고난이 없이 잘 살고 잘 먹겠다는 것은, 마르크스(K. Marx)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를 말라."라고 한 듯이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먹지도 말라."라는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이다. 놀고 싶고 사춘기이므로 이성교제의 욕망도 강렬하겠지만 참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면 10년 20년 후에는 놀기만 하던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인 지도자의 위치에서 인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귀향과 고향발전을 위한 모임
2003년, 반평생을 교단에서 보내다가 정년퇴임하자 곧바로 고향을 찾아 정착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 돌아오니, 이조시대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는 옛 시조가 새삼 떠 올랐다. 옛날 학우들이 더러 고향을 지키고는 있었으나 대부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남해 섬은 여전히 이은상 시인의 '가고파'인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로 나에게 다가왔다.
부모형제는 떠나고 없으나 아직도 활동할 수 있는 여생을 어떻게 하면 고향발전에 도움이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그동안 배운 것이라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밖에 없는지라 우선 한글로 동네 할머니들을 마을회관에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였다.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밤에 모여 배우는 할머니들이지만 새로 깨닫는 글자에 어린 학생들처럼 신기해했고 나도 보람을 느꼈다. 군청의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젊은 가정주부들을 상대로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교양독서 모임을 만들어 지도하기 시작했다. 주로 세계명작이나 한국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매월 한편씩 읽고 모여서 독후감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형식이었다. 벌써 4년에 접어드니 그동안 상당한 숫자의 작품을 읽었다.
한편 군청의 권유에 의하여 <국제화추진협의회>라는 단체를 맡아 중국의 3개 도시(敦煌市-益陽市-井岡山市)와 일본의 자매도시 이사시(伊佐市)를 순회하면서 남해군민과 일본주민들과의 국제간의 친선교류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의 아까지시(明石市)에 사는 제일교포 이상철(李相哲)사장의 중계로 아와지시(淡路市)와 새로운 자매결연을 성사시켜 해마다 학생들의 상호교류와 친선방문의 행사를 갖게 했다.
한편, 2000년에는 군정에 보다 학술적이고 중장기적인 발전방안의 아이디어 제공과 정책자문을 위한 단체로서 남해출신 전현직 교수출신들로 구성된 <보물섬남해포럼>을 결성하여 지금까지 그런대로 운영하고 있다.
창립 취지와 목적으로는, 포럼의 정관 제2조와 11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남해출신 전현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상호 친목을 도모하여 각자의 전공분야에 따른 지식과 정보교환을 통하여 미래의 남해발전에 도움을 주며 군정의 현안문제에도 자문과 정책을 제공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임원진으로는 전국공동대표로 류삼남(부산해양대), 서울지역 공동대표에 류동길(숭실대) 중부지역 공동대표는 김성렬(서원대), 부산지역 공동대표에는 이수봉(동아대), 남해지역 공동대표는 김동규(고려대)이며 기업인 대표로 이동형(주식회사 스타코 회장), 감사에는 최광(한국외대: 현재는 국민연금 관리공단 이사장)과 정길정(한국교원대)로 구성되어 있고 서울총무에 김영표(관동대: 현재는 대한지적공사 사장)와 남해의 문홍태(남해대)이다.
그동안 회원확보의 노력으로 현재 약 123명(교수: 105명, 기업인: 23명)과 함께 당연직으로 남해군수와 군 의회 의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3년간의 주요활동은, 해마다 8월중에 남해에서 남해발전을 위한 다양한 주제로 정기종합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매년 회보(News Letter)를 3회까지 발간하여 회원과 지역사회 기관단체에 배포하고 있다. 그리고 회원들의 전공분야에 따른 남해군민들의 교양특강도 계획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남해군청에서는 군수가 매년 지역별로 해당년도의 남해군정의 주요 현안에 대한 회원들과의 간담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인들이 그동안 많은 협조를 하였다. 지금까지는 부산의 이동형 대표와 류지선 회장, 김인찬 대표(2012년 별세), 강태욱 사장, 일본의 이상철 사장 등이 많은 발전기금을 보내 주면서 후원하고 있다.
▶ 돈과 힘보다는 지식으로 봉사하려는 교수모임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슨 조직이든지 활동자금이 필수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본회에서도 고향발전을 위해서 무엇인가 군민들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군청으로부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학자들이란 머리는 부자인지는 모르나 주머니는 가난한 처지이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과 같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참다운 학자라면 돈과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물질이 정신을 흐리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2001년 8월 평양시 낙량구역에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을 건설하기 위한 모금활동에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자."고 말한 것처럼, 고향발전에 교수들의 역할과 기능은 돈과 힘이 아닌 지식인 것이다.
<보물섬 남해포럼>에서는 앞으로 회원들의 인적자원을 활용하여 남해군정에 대한 자문과 함께 지역사회의 문화예술의 향상과 후손들의 자녀교육문제에 관한 활동도 구상하고 있다. 다행히 교수회원들은 평생동안 배운 것이라고는 청소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밖에 없으므로 남해읍에 적당한 공간을 확보하여 대학진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진로선택에 대한 상담과 논술지도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발달된 정보망과 콘텐츠로 공간과 시간의 제한성이 없이 외부의 각종정보를 접촉할 수 있기는 하지만 남해는 실제로 유수대학교의 고급정보에서 소외되고 있으므로 교수와 직접 접촉하여 맞춤형 진로지도가 절실한 형편이다. 여기에 남해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절실한 대학진학이나 진로상담과 함께 수능문제풀이를 위한 능력향상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가난은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도약과 삶의 활력소
가난과 역경은 우리시대의 세대들에겐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가졌던 공통분모였다. 굶느냐 먹느냐와 같은 절박한 본능과 늘 부족함이 있었기에 그 공간을 메꾸고 벗어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살다보니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능력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중(南中)3회, 농고(農高) 6회의 동기동창들 중에는 역경을 이기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출세하여 지도자의 위치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분들이 많다.
아무리 시대가치관이 변하고 생활환경이 달라져도 인내와 용기 그리고 희망과 같은 삶의 지혜와 진리는 불변하는 법이다. 마치 몇 백년의 세월이 지나도 세계명작이나 고전음악이 그 가치를 잃지 않고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세계여행으로 각국의 다양한 민족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인종과 민족과 국가의 다름에 관계없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실패한 사람들의 사고와 태도는 어딘가에 남다름이 있다.
끝으로 모교의 남해제일고의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적어도 고등학교 3년 동안만이라도 죽었다 생각하고 오로지 학교공부에만 몰두하면서 원대한 미래의 꿈을 설계하고 매진하라는 것이다. 스마트폰도 버리고 TV도 안보고 친구들과 어울려 잡담하는 시간도, 이성과의 만남도 일체 피하고 그 시간에 책속에 묻혀 지내면서 더러 등산이나 운동으로 땀을 흘려라. 그러면 어느 날인가 세계적인 재벌총수도 될 수 있고 위대한 대통령도 될 수 있으며 국제적인 석학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공확률이 로또복권 당첨확률 보다는 훨씬 높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다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은 결코 아니지만, 작가도 좋고 만화가도 좋으며 일류요리사도, 국가대표 축구선수나 야구선수도 좋으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매달려 세계적인 일인자가 된다면 성공한 삶인 것이다.
청년학생들에게 꿈이 없으면 국가의 미래도 어두울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삶이 있을 뿐이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기 마련이다. 여하튼 원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 꿈이 모자라거든 한 달에 한두번 정도 망운산 정상에 올라가서 야망을 키우든지 설흘산 정상에서 광활한 태평양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원대한 꿈을 갖도록 하라.
남해제일고의 교가 "백두대간 이어 뻗어 꽃을 피우는/ 화려강산 남해 벌에 터전을 닦아/ 푸른 꿈 엮어가며 진리를 찾고..... 라는 가사처럼 말이다.
▶ 귀향생활의 즐거움과 불편함
젊어서 고향 남해를 떠나 멀리 일본과 미국에서의 오랜 유학생활과 직장생활로 객지에서의 40여년을 보내고 나이 들어서야 다시 남해로 돌아와 정착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엄마 품을 떠났다가 다시 엄마 품에 안기는 아이처럼 마음이 편하고 옛날의 정겨웠던 산하를 다시 보는 즐거움이 있어 매우 행복하다.
또한 집 앞의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어 유기농산물을 먹고 깨끗한 공기와 지하수를 마시면서 산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골생활의 선물이며 자연이 주는 축복인 것이다. 더불어 여가에는 친우들과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여 그 자리에서 생선회 만들어 먹기도 하고 더러는 산속의 고요한 저수지에 가서 산수와 함께 명상을 하거나 금산이나 망운산 등의 산봉우리를 오르면서 옛날 나무하고 소 먹이던 추억을 더듬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한편 이러한 자연생활에서 삶의 지혜도 많이 배우고 있다.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데만 익숙하여 자만심만 가졌던 나에게 자연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가르치던 선생에서 배우는 학생의 신분인 것이다. 가령, 여름철 채소밭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에서도 많은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뽑고 또 뽑고 밟아도 되살아나는 놀라운 생명력, 무수한 뿌리 가운데서 실오라기 같은 뿌리 한 가닥만이라도 흙에 닿아있으면 새파랗게 살아나는 그 끈질긴 생명의 집착력...... 그런가하면 반대로 농작물은 잘 키우려고 정성스럽게 비료도 주고 농약도 살포하면서 보살피지만 쉽게 시들거나 병들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잡초 하나로 부터도 배우게 되는 것은, 농부가 농작물을 너무 보호하고 성장조건을 잘 해 주어도 오히려 병충해에 약해지면서 수확이 좋지 않는 것처럼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도 과보호하면 무능하고 연약하여 경쟁사회에서 쉽게 도태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자연이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는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에는 반드시 명암이 있듯이 농촌생활에서도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농촌생활에서의 불편함으로는 고급문화 접촉기회의 불가능과 농어촌의 열악한 의료시설로 응급환자의 긴급조치에 대한 어려움 그리고 사고세계의 차이에 따른 소통문제....등이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너무 몰라주어 불만이라면 시골에서는 너무 알아주어 오히려 불편할 때가 많은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영어로는 'No Thank You' 일본어로는 'ありがたいめいわく'라는 아주 적합한 표현이 있다. 이것은 사회학자 퇴니스(F. Tonnies)가 개념한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원시공동체와 같은 감성적 유대관계의 사회적인 특징)이 남해지역에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고향은 항상 어머님의 따스한 품속 같아 이러한 불편함보다는 편함이 더 크기에 마음의 안식처로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