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이수철 - 동문문원
상세내용
보릿고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추억
- 집 마당에 유실수를 다그 심은 사연 -
보릿고개를 아십니까?
1960년대 초반 무렵의 춘궁기를 회상하며 이 글을 씁니다.
그때는 참 못살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하늘은 어찌도 그리 맑고 산천은 온통 진달래(참꽃이라하여 먹을 수 있음)와 철쭉꽃(개꽃이라 부르며 먹지 못함)으로 뒤덮이고, 주변의 초목들은 연녹색으로 바뀌었는데도, 허기진 배를 채워줄 먹거리는 별로 없었습니다.
지난 가을에 수확한 쌀과 고구마, 김장 김치와 시래기는 이미 동이 났고, 보리는 수확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합니다. 동네 어른들은 까칠하게 여위었고, 애들은 핼쑥한 얼굴에 코를 연신 훌쩍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소입현) 60여 가구 중 저녁 때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집도 5~6가구는 되었지요. 그래도 그때는 배만 고팠지. 슬프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엔 다들 못 살아서 있는 집이나 없는 집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고, 그래도 좀 있는 집은 밥 굶는 옆집에 소문 안내고 조용히 먹거리를 갖다 주곤 했지요.
우리들은 산과 들로 나가서 달래, 냉이, 쑥을 뜯었고, 칡, 도라지 딱주도 캐먹고, 송구(소나무 속껍질), 찔레줄기에다가 갓 익어가는 뽈똥(보리수 열매)으로 허기를 채우곤 했지요. 떨어진 감꽃도 말려 먹었습니다.
우리가 다녔던 남해중 · 남해농고 교정에는 "우리는 다시 빈곤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남기지 않으리!"라는 글을 새긴 비석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모두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 각 분야에서 자리를 잡거나 할아버지가 된 60대 초반의 동네 친구들이 만나면 그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얘기꽃을 피웁니다. 그 때마다 한 두 명은 꼭 눈물을 흘리거나 가끔 소리 내 울기도 합니다.
물질적으로 다소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는 가난했던 시절의 초심을 너무 잊고 살지 않았나 자신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저는 그 시절에 우리 동네 뒷산이 온통 과일나무와 산나물로 가득 차있는 꿈을 꾸곤 하던 것이 엊그제처럼 생생합니다. 그 꿈을 좇아서인지 8년 전에 양평에 지은 집 마당과 텃밭에다 서울 토박이인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부 지방에서 자라는 거의 모든 유실수(有實樹)를 각각 한그루 이상씩 빽빽이 심었습니다. 12종류에 36그루나 됩니다.
제 지론은 이렇습니다. 과일나무는 꽃도 잎도 예쁘고, 다양한 색깔의 열매로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볼거리도 제공하고, 수확한 과실은 요긴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훗날 자신들과 손주들도 이 과일나무들 때문에라도 늙은 부부 집에 더 자주 오리라는 기대도 깔려 있습니다.
이제 정원과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지 여러 해가 지나, 자두, 배, 사과와 감 등은 이웃과 즐겁게 나눠먹고 있습니다. 매실, 앵두, 보리수, 대추, 모과도 요긴하게 씁니다. 추위에 약하다고 해서 심기를 망설이다 작은 유리 온실을 만든 후에야 심은 치자, 블루베리, 무화과도 곧 열릴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소박했던 꿈이 완성될 날을 기대하면서, 지독히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의 고향을 다시 생각하면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은 저만의 일은 아닐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