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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김정석 - 동문문원

내용
김정석 - 우리 동문들이 자라온 고향 이야기
출처
망메새

상세내용

우리 동문들이 자라온

고향 이야기

 

 

 

우리 동문들이 꿈을 키우며 자라온 남해는 보물섬이다.

 

남해를 상징하는 통합브랜드 "보물섬"은 전국 지자체 브랜드에서도 최고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2천년전에 중국 진시황제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남해금산을 들렸다가 전설속의 "서불과차" 상형문자가 거북바위에 남아 있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기도하였다는 금산,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충무공 이순신의 얼이 서려있는 관음포가 있는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이 남해이다.

 

자연경관으로도 수려한 바다를 전망으로 한 스포츠 파크, 힘튼리조트와 골프장, 독일마을, 동양최대의 적교(현수교)로 불리던 남해대교, 최근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을 차지한 빼어나게 아름다운 창선 · 삼천포대교가 있으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백일 기도후 왕위에 올랐다는 금산은 남해를 일컫는 전설의 백미라고 할 것이다.

 

때문인지 영험한 산의 정기를 품은 금산 보리암은 강화도 보문사, 양양 낙선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기도사찰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금산에 올라 바다쪽을 보면 그림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잃게 되고, 쪽빛바다 상주해수욕장의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은모래 해변은 여름철만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해안을 따라 남해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하노라면 점점이 떠있는 섬과 바다가 눈이 시리도록 고와서 몇 번이고 감탄을 하게 되고, 남면 가천 다랭이 마을에 이르면, 척박한 한평의 땅이라도 일구기 위하여 고생하신 조상들의 슬기를 느낄수 있다.

 

임진왜란시 명량대첩, 한산도대첩 등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작전으로 승리하였으나 퇴각하는 왜군을 상대로 남해 노량바다에서 적군의 총탄에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역사의 현장에 가보면 저절로 숙연해지고, 해양성 온난화 기후로 인하여 사시사철 축구 · 야구 등의 운동을 할 수 있는 스포츠파크에는 전국의 유소년 선수들이 필수적으로 다녀가는 전지훈련 장소이며, 이곳에서 각종 타이틀이 걸린 대회가 열리면서 전국각지의 선수들이 모여드는 곳이 남해이다. 빼어난 환경과 그곳에서 자랑스레 자랐기에 우리 남해가 배출한 인재들을 살펴보아도 보물섬 남해라는 명칭이 전혀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우리 동문 뿐만아니라 남해를 고향으로 한 사람이면 술자리에서 고향 이야기는 단골메뉴이고 남해를 자랑하는 데에 열변을 토하니 우리 남해는 단순히 태어난 곳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러한 남해 보물섬의 중심지에 우리들의 동문들이 수학하고 명실공히 남해를 대표하는 모교가 망운산의 정기를 받아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동문들과 함께 수도권에도 3,000여명의 동문선후배가 거주하며 남해를 알리고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은 익히 알고들 있는 사실이다.

 

기별로 구성된 동문들의 모임도 활발하여 모이는 곳마다 철따라 남해에서 공수되어오는 전어와 장어, 멸치회 등을 안주로 술잔이 권해지고 백발이 성성한 선배들로부터는 서울로 처음 상경하여 터전을 잡기까지의 고생한 이야기들을 시작으로 당연지사 남해를 화제로 한 이야기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해를 빛낸 그분들의 명망이야 익히 들어왔지만 우리 남해 출신이 수도 서울을 책임지고 행정을 펼친 서울시장,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총수를 맡았던 당시의 전설 같은 이야기며, 최근에 이르러서도 법무부장관, 국정원장, 검찰총장 등 수많은 장 · 차관급과 육해공군 각 군의 참모총장급과 해병대 사령관을 비롯한 많은 장성을 배출하였고, 대기업 및 유명대학 등에서 활약하는 향우들은 부지기수이며,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까지 남해출신중에서도 우리 동문이 맡았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남해대교와 창선 · 삼천포대교가 놓이고 부산이나 서울로 고속도로가 뚫려 몇시간 만에 전국으로 통할 수 있지만 1970년 초반까지만 하여도 도회지로 나가려면 울퉁불퉁한 자갈길 비포장 도로를 따라 노량 선착장에서 부산으로 가는 여객선을 6시간 이상 타고 가거나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여수까지 배를 이용한 후에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하루종일을 달려야 서울역에 도착할 수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교통사정이 불편하고, 승용차도 없던 옛시절에 명절이 오면 수많은 인파에 시달리며 우리의 고향을 오간 동문 · 향우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려지기도 하였다.

 

비록 어린 시절의 가난에 힘들었던 기억이 가슴을 짓누를 때도 많았겠지만 고향을 떠나 타향 객지에서 고향의 선후배를 중심으로 뭉쳐 살아가는 것도 이러한 힘든 시절을 이겨낸 불굴의 정신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만 하더라도 남해향우회를 중심으로 각 지역출신별, 졸업학교별로 모임을 만들다보니 한사람이 남해를 상징하는 울타리 안에서 적어도 서너개 이상의 모임에 가입하여 안부를 묻고 선후배간의 정을 이어가게 되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이런저런 모임은 수백개가 넘을 것으로 짐작되니 남해 사람들의 유별난 고향사랑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지난세월 이야기에 즐거워하고 막걸리 한 사발에도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유년 시절 같이 살아온 동문, 선후배와 친구들이고 고향이라 하지 않는가?

 

여우도 죽을 때면 자기가 태어난 언덕에 기대어 죽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로서 고향을 어찌 잊을수 있으리......

 

따라서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형제마저 고향을 떠나고 없다 할지라도 우리 동문들은 가끔씩 가족들과 함께 우리의 고향 남해를 찾아 우리가 자란 학교에 들러 그 시절의 낭만과 꿈을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그러함으로 인하여 자식들이 부모님의 고향을 잊지 않을 것이리라.

 

옛 시절 기억나는 곳을 더듬어 남해를 잘 알지 못하는 아내와 아들딸들에게 남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며 왜 남해가 보물섬인지를 알려줘야 하리라. 그리고는 시장통의 허름한 횟집에라도 들러 소주 한잔을 곁들이며 자랑스런 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사람 사는 냄새를 맡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후세들이 남해를 잊지않고 마음에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