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사향록(思鄕錄) - 회포(懷抱) 어린 성지(城址)
상세내용
회포(懷抱) 어린 성지(城址)
南海邑城(남해읍성) ‥‥‥ 남해 읍안에 있던 성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그 형태를 찾아 보기조차 어려우나 세조오년 서기 一四五五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수정 : 서기一四五五년 세종 21년(1439)년
* 참고 내용(남해읍성 축조)
- 『세종실록』 87권, 세종 21년(1439) 11월 20일에는 「甲子/築慶尙道, 長髻·迎日·南海·金海築城(갑자/축경상도, 장계·영일·남해·김해축성)」
- 1759년 여지도서 邑城. 石築. 周二千八百七十六尺, 高十三尺. 女堞五百九十堞. 有南北門, 擁城十八. 內有井一泉五, 四時不渴. 我世祖五年己卯築城. * 己卯(1459年)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 정이오(鄭以吾)의 남해읍성기(南海邑城記) 원문 번역
정이오(鄭以吾)가 기록하기를, 남해는 현(縣)으로, 바다 섬 가운데에 있으며, 이른바 진도(珍島)와 거제(巨濟)가 서로 솥발처럼 서로 마주 서 있다. 그 땅은 기름지고 비옥하며, 그 생물은 크고 또 번성하니, 나라가 이를 통해 얻는 자원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고을(남해현)의 경계가 왜도(倭島)와 가까이 있어, 경인년(1350)부터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백성들은 사로잡히거나 혹은 흩어져 떠나가니, 현(縣)에 속한 평산(平山)과 난포(蘭浦)는 쓸쓸히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8년이 지나 정유년(丁酉年, 1357)에 이르러,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와 진양(晉陽)의 선천(鐥川, 현 하동군 북천면)에 머물며 들에 거처하였다. 토지를 지켜 조세를 바치지 못하였고, 호적에 기록된 자와 재물이 나오는 땅은 모두 초야와 사슴이 노니는 벌판에 버려졌다.
그리하여 왜구의 근거지가 된 지 46년(태종 3년, 1403)이 되었다. 모사(謀士)하는 신하와 지혜로운 장수들이 계책을 세움에 빠뜨림이 없어서, 전함(戰艦)을 수리하여 수전(水戰)을 대비하고, 성곽을 세워 육지의 방비를 엄중히 하니, 적의 기세는 떨치지 못하고 날로 쇠하였다. 임금이 즉위한 지 4년째(태종 4년, 1404)에 우수(雨岫) 임덕수(任德秀)를 천거하여 구라량(仇羅梁, 현 삼천포) 만호로 임명하고, 아울러 남해현도 겸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현령이 부임하자, 계획을 세워 은혜를 베풀고, 이익을 증진하며 폐단을 제거하였다. 군무가 이미 정비되자, 민정 또한 바로잡혔다. 그러나 땅이 좁고 험하여, 사람들은 옛 고향(故鄕)을 그리워하였다.
현령(縣令)이 이를 듣고 여러 사람과 협의하여,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 최유경(崔有慶, 1343~1413년)에게 청하여, 모든 사정을 조정(朝廷)에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인접한 하동·사천·거제·고성·진해 다섯 고을의 백성을 동원하여, 고현(古縣)의 외딴섬 가운데 성을 쌓고, 돌을 여러 겹으로 쌓아 견고하게 하며, 해자(塹)를 이용하여 못(池)을 만들었다. 공사(工事)는 2월에 시작하였고, 그리고 3월의 길일에 모든 일을 마쳐 보고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모두 돌아와, 밭은 밭대로, 집은 집대로 정비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겁고 화목하게 살았다.
- 官職: 縣令 武從五品, 座首一人, 別監二人, 軍官三十人, 人吏四十四人, 知印二十人, 使令二十五名, 官奴三十三名, 官婢四十九名.
* 관원은 읍지와 시대에 따라 다름
平山浦鎭城(평산포진성) ……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왜구들의 침공에 대비해서 고려초엽 또는 중엽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 정확한 축조연대: 남해군 남면 평산리에 위치한 이 성(城)은 축조연대가 문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244
권, 성종 21년(1490) 9월 30일자 기록에는 “이달에 경상도 평산포성을 쌓았는데, 높이는 9척이고 둘레는 1,558척이었다(是月 築慶尙道平山浦城 高九尺 周一千五百五十八尺).”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평산포성이 1490년에 축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彌助鎭城(미조진성) …… 우리 남해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진성(鎭城)의 하나이다. 성종五년 서기 一四七四년에 왜구들에 의해 한때 실함(失陷) 되었다가 동十七년에 중수(重修) 되었다고하니 이 성도 고려조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미조항진(彌助項鎭)은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 17)에 처음 설치 되었으나 왜구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이후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 17)에 다시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曲浦堡城(곡포보성)
이동면 화계리 현 성남국민학교 자리에 있었던 곡포보성은 중종十六년 서기 一五二一년에 축조된 주위 九백六〇척의 적은 성으로 처음에는 평산포만호 관할아래에 들어있었으나 을미년 서기 一五九五년 八월 당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이 충무공이 작전상 이 곡포를 평산포에 병합시킴으로써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수군만호 一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 동국여지승람 외 읍지:
曲浦堡: 治東二十里, 中宗十七年, 移牛峴堡于此, 置權管, 石城 周九百六十尺, 高十一尺, 英宗二十七年革.
* 중종 17년은 서기로 1522년, 영조 27년(1751)에 폐지되었다.
鎭洞鎭城(진동진성) …… 창선면 진동리에 있었던 진성으로 본래는 적량진성(赤梁鎭城)이라는 홍성현의 진성이었다. 정확한 축조의 유래나 연대는 알수 없으나
- 조선왕조실록: 赤梁鎭城(적량진성) …… 창선면 진동리 적량마을에 있었던 진성으로 본래는 적량진성(赤梁鎭城)이라는 흥선현(興善縣)의 진성이었다. 정확한 축조연대는 『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21년 윤9월 29일(1490)』,의 기록 「“戊申/是月築慶尙道 赤梁城, 周一千一百八十二尺(무신/시월축 경상도적량성, 주일천일백팔십이척)”」
壬辰城(임진성) …… 일명 잔땡이성이라 불러워지고 있는 이성은 남면 상가리에 있다. 현재 거의 원형에 가까울 만큼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 성곽(城郭)은 타원형으로 내성의 서남부 일부는 붕괴되어 있으나 외성은 구축하였던 성벽 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높이는 본래 六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무너져서 五미터 정도로 남아 있으며 예전에는 이 위에 섭돌(女堞)을 놓아 총구(銃口)를 내고 다시 그 위로 二미터정도 쌓아 올렸었다고 한다.성내도처에 집터가 있고 자기(磁器)와 무늬(紋樣) 있는 기와파편이 산재하고 있으며 화전(火箭)과 패총(貝塚)도 발견되었으며 당시 성안에는 성루(城樓) 감시대(監視台) 탑대(塔台) 등과 서원(書院)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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