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는 현재 三大寺刹(삼대사찰)이 있다. 이동면 용소리의 호구산 용문사(虎丘山 龍門寺), 고현면 대곡리의 망운산 화방사(望雲山 花芳寺), 이동면 상주리의 금산보리암(錦山 菩提菴)이 그것이다.
이 사찰들에도 사지(寺誌)가 없어 상세한 사실(史實)을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三사찰 모두가 그 기원(起源)을 신라조에 두고 원효대사(元曉大師)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공통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점이다.
대체로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멀리 고구려조(高句麗朝) 제十七대 소수림왕二년 중국식의 대학(大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한 서기 三七二년으로 써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보낸 순도(順道) 스님과 불상 경문(經文)을 받아 들인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일설에는 태조(太祖) 원년에는 이미 불교가 유포되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된지 二○四년 후인 평원왕十八년(五七六年)에 승의연(僧義淵) 이 위제(魏濟) 二대 승통(僧統)을 떨치던 법상(法上)에게 가서 불교사를 알아 왔다고 알려져 있고 백제에서는 고구려보다 十二년 후인 침류왕(枕流王 元年―三八四年)에 호(胡) 나라의 스님 마라탄니(摩羅灘尼)가 동진(東晉—南中國)으로 부터 찾아들자 왕이 이를 궁성에 머물게 하며 이듬해 남한산(南漢山)에 절을 짓고 十명의 승려를 입사(入寺) 시킴으로써 불교를 융성케 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신라는 백제보다 뒤져서 고구려로부터 승 묵(僧墨)이 일선군(現 善山郡)에 들어와 불교를 포교하기 시작한 것이 그 효시라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불교는 법흥왕 이 법공(法空), 진흥왕이 법운(法雲) 등 법호(法號)를 갖게 됨으로써 급속도로 발전되어 갔다. 더우기 진흥왕五년(서기五四四年)에 흥륜사(興輪寺)가 세워졌고 그 왕비는 니(尼)가 되었으며 법흥왕으로부터 진덕왕에 이르는 모든 왕(서기五二四—六二三年)이 그 왕명을 불교에서 취해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얼마나 불교가 급진적(急進的)으로 융성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서기七세기경부터 자장(慈藏) 원측(圓測) 등 고승에 이어 신라十성(新羅十聖)의 한사람이며 특히 우리 고장에 보광사(普光寺—現龍門寺의 前身)를 짓고 최초로 포교하였다는 원효대사(元曉大師)와 금산 가사굴(袈裟窟)에 기당을지어놓고 수도하였다는 의상대사(義湘大師) 등 고승이 기라성(奇羅星)처럼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들 대사들에 의해 융성해진 신라불교는 마침내 열반(涅槃) 법성(法性) 계율(戒律) 화엄(華嚴) 법상(法相) 등 오교(五敎)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이중에서 우리 남해와 인연이 깊다는 원효대사는 법성종으로서 경주 분황사(芬皇寺)를 근본도장으로 하여 이 종지(宗旨)를 홍포(弘布)하였고 의상대사는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도장으로 하여 종지를 홍포하였다.
이 밖에도 남해에는 금산에 있었던 의상암자를 비롯하여 고현면의 관음사 선원사(仙源寺) 빈대절이 서면의 둥구나무절 빈대절 이동면의 아가리절 남면의 운암사(雲岩寺) 삼동면의 난화방절(蘭花芳寺) 학사나무절 두름박골절 고은사(古隱寺) 창선면의 큰골절 큰절 성명암 등 많은 절이 있어 예로부터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지금은 그 절들은 모두 없어지고 절터들만 황량하게 남아있다.
虎丘山 龍門寺(호구산 용문사) ...... 이동면 용소리 호구산에 자리잡은 용문사는 남해 최대 최고(最古)의 사찰이기도 하다. 그 유래(由來)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원효대사가 영암(靈岩)으로 알려진 금산을 찾아오며 세웠다는 보광사(普光寺)의 후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원효대사는 신문왕六년 서기 六九六년에 입적하였으니 이 보광사는 千三百년전에 세워진 셈이며 그때 남해에는 이미 불교가 포교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연대 미상이나 고려중엽에 지금의 용문사 자리에 처음 담성선사(曇星禪師) 이 세워지고 신운(信雲) 스님에 의해서 대웅전(大雄殿) 이 세워졌으며 상운스님이 지족당(知足堂)을 세우게 되자 사세(寺勢)가 날로 융성해졌다.
백월당(白月堂)은 이 자리가 보광사 자리보다 명당자리라 하여 보광사를 이 자리에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찰입구의 용연(龍淵)위에 위치한다 하여 용문사라고 개칭(改稱)하는 동시에 대웅전(大雄殿)과 봉서루(鳳棲樓) 등을 이건하여 명실공히 웅대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의 사찰이 겪었던 임진·정유란의 수난을 용문사 역시 피하지 못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팔도十六종 도총섭당상로(八道十六宗 都總攝堂上路)가 되어 전국 사찰에서
의승군(義僧軍)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휴정 서산대사(休靜 西山大師)와 그 뒤를 이어 팔도의 승군을 총지휘한 유정 사명당(惟政 四溟堂)의 뜻을 쫓아 용문사 승려들도 총궐기하여 용감하게 싸웠다는 전설은 현재 이 사찰에서 보관중인 삼혈포(三穴砲)에서 더욱 실감을 느끼게 한다.
일설에는 노량해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해상 도주를 하다가 명나라 군사들의 추격을 받고 산중으로 숨어든 일부 왜패잔병을 맞아 용문사 승병들은 명나라 군사와 합
동으로 소탕전을 벌여 왜적을 모조리 섬멸하였다는 무훈담도 남아있다. 이때 용문사가 불탔다는 설도 수긍(首肯)이 간다.
임진왜란이 끝난 약三十年後에 용문사는 재건되었는데 이조 숙종조에 이르러(서기 一六七五-一七二○年) 수국사(守國寺)로 지정되었다. 이때 왕실에서 경내에 축원당(祝願堂)을 건립하고 위패(位牌)를 비롯하여 연옥등(蓮玉燈二個) 촉대(燭臺一個) 번(幡) 등을 하사(下賜)하고 왕실의 직접적인 희덕을 입어 내려왔다. 일제초기에 연옥등과 촉대등은 왜인들에게 빼앗기고 지금은 민속자료급(民俗資料級)인 번과 익릉관(翌陵官)이 발급한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만 겨우 보존되어 왕년의 융성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용문사의 자랑은 석불보살좌상석불(石佛菩薩坐像石佛)이다. 이 석불은 용문사를 재건할때 경내에서 발굴된 고려시대의 출토품으로 남해문화재 중에서 단 하나 보물급 동산 문화재이다.
三穴砲(삼혈포)...... 임진왜란때 우리군사들이 사용한 무기(武器)는 총동(銃筒) 완구(碗口) 화전(火箭) 등 이었는데 이 삼혈포가 과연 임진왜란때 사용된 것인지 여부는 상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 삼혈포는 一八六六年 병인년(丙寅年) 불란서 함대를 맞아 싸울때 우리 수비군이 사용하던 한국제 저장총(底裝銃)과 비슷한 것이나 단일총신이 아닌 세개의 총신으로 삼발총임이 특징이다. 이 삼혈포는 앞으로 우리나라 총포연구사에 하나의 도움이 될 이색적인 유품이다.
弓(궁)...... 숙종조의 하사품으로 경내 숙빈당에 걸어 두었던 궁수(宮繡)와 궁중매듭으로 된 희귀한 유품이다. 즉 칠보우문단 연화문(七寶雲文緞 蓮花文) 길이 一四七센치 폭三二·五센치의 궁중매듭으로 장식된 비단천에 남무대성인로오보살(南無大聖引路五菩薩)이란 글자가 놓여졌고 그 둘레를 희귀한 궁중매듭으로 장식되어 있어 민속 자료로써 자랑할만한 유품이다.
守國寺禁牌(수국사금패)...... 용문사가 수국사로 지정되면서 경내에 축원당을 새로 짓고 위패를 모시게 됨에 따라 경릉관 익릉관(敬陵官 翼陵官) 이름으로 발급된 이른바 수국사 표시패이다. 직경十四·五센치 부피一·五에서 二센치에 이르는 원형의 나무패이다.
石造菩薩坐像石佛(석조보살좌상석불)...... 약 三백년 전 용문사 재건때 경내 마당에서 출토되었다는 이 석불은 보관(寶冠)에 영낙(瓔珞) 비천(臂釧)을 착장(着裝)한 고려초 내지 중엽의 작품이다. 자희롭고 온아유화(溫雅柔和)한 용상은 그 존엄성을 더 한층 높여주는 보물급 석불이다. 좌고(坐高) 八一센치 어깨너비 三八센치 무릎 폭 六六센치
望雲山 花芳寺(망운산 화방사)...... 망운산 화방사는 고현면 대곡리에 있다. 신라 신문왕조 그러니까 금산에 보광사가 건립된 서기 七○○년경에 망운산 남쪽 기슭에 있던 연죽사(煙竹寺)를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이 현 화방사 근처로 옮겨세워 이름도 영장사(靈藏寺)라 고쳐 불렀다. 그후 임진왜란때 왜병의 야만방화로 절이 불타버리자 약四○년 뒤인 인조十五년(서기 一六三七년)에 계원 영철(戒元 靈哲)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이건중수(移建重修)하여 이름도 화방사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망운산 남쪽기슭의 연죽사를 이건한 진각국사는 고려 고종때의 조계산 제이세 국사(曺溪山 第二世國師)로서 속성은 최씨며 호는 무의자(無衣子) 탑호(塔號)는 원조(圓照) 법명은 혜심으로 당대 저명한 고승(高僧) 이었다. 고종二十一年 서기 一二三四에 입적하였으므로 화방사의 전신(前身)인 영장사는 최소한 七백四○년전에 이건된 고찰이라 하겠다. 그것이 임진왜란때 소실(燒失) 된것만도 애석하거니와 그 후에 재건되었던 보광전(普光殿)이 금년에 다시 불타버렸다고하니 애통한 마음 금할길 없다. 이것은 불타버렸다는 보광전은 그 규모는 용문사 대웅전과 같이 정향(正向) 三간 측(側) 三간 높이 九미터로 크지는 않으나 그 내부구조의 섬세함과 조각의 정교(精巧)함이 삼남에서 으뜸가는 것으로 손꼽혀 왔었다.
이 절에는 동산문화재인 옥종자(玉宗子)와 금구(金口) 이천자목판 이충무공 비문목판등이 보존되고 있었는데 이 모두가 소진(燒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옥종자는 유종자(油鐘子)라고도 한다. 이 옥종자는 옥돌을 다듬어 사발모양으로 만든 등잔으로 원래 사찰이 새로 건립되어 불상을 봉안함과 동시에 기름을 부어 심지에 점화하여 경내를 밝히는 것으로 그 이유가 여하간에 불이 한번 꺼지면 두번다시 켤수없는 금기(禁忌)가 그 특색으로 되어있다. 화방사에서 보존중이던 옥종자는 영장사 창건때 켜두었던 심지 불이 임진왜란때에 보광전이 불타면서 꺼져버렸기 때문에 다시 심지불을 켜지 못한채 빈등잔으로 보존되어 왔었다. 연면(連綿) 三백六여년 동안 영장사의 경내를 밝혀왔던 성화(聖火)였던 것이다. 이 옥종자는 직경二十四센치 높이 十二센치 깊이 十一센치 두께 二센치 무게三·九킬로 용량 三리터의 사발형 옥돌 등잔 이었다.
錦山 菩提庵(금산 보리암)...... 보리암 또한 금산을 찾아들어 보광사를 세웠다는 원효대사가 그 사윤이 융성해짐에 따라 금산 상상봉 바로 밑 천길단애(千仞斷崖)의 명당을 잡아 보리암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보리암은 쌍홍문(雙虹門) 사선대(四仙臺) 천구봉(天狗峰) 八선대(八仙臺) 등 신기의 극(神技의 極)을 다해서 다듬어 낸 기암절벽과 망망한 대해를 한눈아래 굽어볼 수 있는 선경에 자리잡고 있다. 전국의 유서깊은 사찰들이 거의 심오(深奧)하고 울창한 심산유곡(深山幽谷) 속에 세워져 있음에도 보리암은 유독 신선(神仙)들만이 내려 쉬었을 것으로 느껴지는 이 높은 영봉(靈峰) 위에 자리잡고 있음이 이 사찰의 자랑이기도 하다. 경내에 비록 특기할만한 동산문화재는 없으나 그 옛날 인도 월지국(印度月之國)에서 김수로왕비 허태비(金首露王妃 許太妃)가 가져온 것을 원효대사가 이 절에 가져다 세웠다는 전설이 간직된 신라 三층석탑이 보존되고 있어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흐뭇하게 해주고 있다.
新羅三層塔(신라삼층석탑)...... 인도 월지국에서 김수로왕비가 가져온 것을 원효대사가 이 자리에 옮겨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한 유서깊은 신라 三층석탑은 금산 보리암이 있는 탑대(塔臺) 위에 서있다. 창공을 뚫고 저마다 기태(奇態)와 오묘(奧妙)한 자태를 자랑이나 하려는 듯 우뚝 우뚝 솟아있는 금산의 기암괴석(奇岩怪石)들을 좌우전후로 한눈아래 굽어보며 천길만장의 탑대위에 서있는 三층탑의 자태는 한층 우아(優雅)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그것이 인도에서 들어온 것이건 아니건 원효대사가 이건하였건 말았건 아뭏든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고 신선한 영봉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 탑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화강석재(花崗石材)로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높이는 一六五센치에 지나지 않지만 탑신에는 각층마다 우석(隅石—撑柱)이 새겨져 있다. 미석(屋石) 받침은 두줄로 되어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의 복발(覆鉢)이 없이 보주(寶珠)만 놓여있다. 탑신의 첫층 높이는 五五센치 二층 높이는 三五센치 三층높이는 二七센치로서 이 탑은 신라시대의 석탑과 같은 뉴앙스를 풍겨주고는 있으나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감정되고 있다.
南海古塔(남해고탑)...... 삼동면 봉화리에 있는 이 남해고탑(南海古塔)은 높이 二미터에 지나지않는 석조 三층탑으로 남해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라하여 남해고탑이라 부르고 있다. 그 건립년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설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보광사를 세울 때 그 경내에 세워졌던 이 탑이 보광사가 용문사 자리로 옮아감에 따라 봉화리의 함정사로 이건되었는데 그후 함정사가 없어짐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옮겨 두었다는 것이다.
원효대사의 보광사 창건여부조차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현재로써는 이 전설을 믿을만한 다른 근거도 없거니와 그러나 오랫동안 슬기롭게 지켜내려온 문화재인 만큼 더욱 잘 보존토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茶川塔(다천탑)...... 이동면 다천 산기슭 밭 한가운데 서있는 이 다천탑(茶川塔)은 높이 약 三미터에 이르는 비교적 육중하고 우아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나 三층탑신과 개석(蓋石)이 없어지고 기단(基壇)이 매몰되어 그 가치를 상실하고 있음이 유감이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에 다천사(茶川寺)가 창건되었다가 용문사로 합사(合寺)한 뒤에 이 탑만 남은 것이라 하며 지금도 밭을 파면 절터의 초석들이 출토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실된 부분도 근방 밭속에 파묻혀 있으려니만큼 이를 속히 발굴하여 탑을 복원한 뒤에 합사했다는 용문사로 이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