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현(藍浦縣 — 지금의 충남 서천 보령 일대에서 여조(麗朝)의 대학자이며 대사정 백문절(大司正 白文節)의 아들로 태어난 백이정은 호를 이재(彛齋)라 하였다. 충렬왕 24년인 서기 1298년 원(元)에서 주정학(朱程學)이 유행하고 있음을 알고 충선왕을 따라 연경(燕京)으로 건너가 10여 년에 걸쳐 주자학 성리학(性理學)을 연찬(硏讚)하고 귀국하여 이를 수제자인 이제현(益齋 李齊賢)과 박충우(朴忠佑) 등에게 전수한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 하겠다.
물론 주자학을 제일 먼저 우리나라에 수입한것은 충렬왕조의 유신(儒臣)인 안유(安裕 후의 安珦)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재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이제현 박충우 등의 향도로 이 학문이 국내에서 성행되어 여말의 거유인 삼은(三隱) 즉, 목은 이색(牧隱 李穡) 야은 길재(冶隱 吉再),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같은 이학(理學)의 태두(泰斗)가 배출되었다는 엄연한 사실(史實)에 비추어 그로 하여금 우리나라 성리학의 원조라 하여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충선왕조에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지낸 백이정은 충숙왕 원년 一월인 서기 1314년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고 1317년 9월에는 수제자인 이제현 등을 원(元)에 파견하여 더욱 정후학을 연수케 하였다. 그리고 1321인 충숙왕 8년에 왕을 수행하여 재차 원으로 건너가 목화(綿花)와 화약(火藥)까지 수입해 오는 등 조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후에 상당군으로 봉(封) 해졌다. 일설에는 1339년 충숙왕의 후임역모사건(後任逆謀事件)에 연누(聯累)되어 시골로 은거(隱居) 하기에 이르렀다고도 하고 당시의 혼미하고 또한 굴욕적인 정치선풍(政治旋風)을 피해 스스로 우리 향토 남음(당시의 난포현)으로 이주해 왔다고도 전하여지고 있다.
당시의 고려왕조는 원에 완전예속(完全蘂屬)되어 그 존엄과 훈령(訓令)에 따라 왕위의 양위중조(讓位重祚)가 조삼모사격(朝三暮四格)으로 이루어졌으며 충렬·충선·충숙·충회 등 왕실 4대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은 그 극(極)에 달했다. 이로 말미암아 중신간의 불화와 상극(相剋) 또한 극심하여 정계(政界) 뿐만 아니라 사회기풍과 도덕률도 부패될대로 타락되었으므로 이 추잡스런 영역을 벗어나 선도(仙島)처럼 아름다운 우리 향토를 찾아 들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 되기도 한다.
그의 입남동기와 경위에 대해서도 억측만 구구할 뿐 정설(定說)이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수제자이며 사돈(査頓)간으로 알려진 이재 이제현의 양옹비설(櫟翁稗說)에도 이재에 관해서도 충선왕을 따라 중국 수도에 10년이나 머물면서 성주(程朱)의 성리학에 대한 서적을 많이 구독하여 돌아왔다는 것 외에는 일제 언급이 없다.
물론 전하여 내려온 이야기들이지만 난곡사의 창립발기문(創立發起文)에는 선생의 묘가 있었다는 것과 관대(冠帶)를 소장해 내려왔다고 나타나 있을뿐 언제 어떤 연유로 입남하였다는 풍문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 난곡사 상량문(上樑文)에도 백정승의 묘가 있었다는 것과 남해를 본관으로 하는 백씨(이재선생의 후손)가 5대까지인지 8대까지인지 살고 있었다는 통문만 전하고 있다. 그 상량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즉 선생이 남부로 이거(移居)하여 옴에 향리(鄕里) 사람으로서 그 누구하나 선생을 공경치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선생이 한번 걸음 옮기시면 그 곳 초목도 언공을 입었거늘, 그러므로 백성들은 선생의 사당인 군자정을 숭공(崇恭)하였고 또 늙은이들은 정승의 유택(墓)를 지켜 내려왔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안타깝다. 남해를 본관으로 하는 백씨의 후손이 5대까지 이어졌다고도 하고 8대까지 살았다고도 하니 이를 올바르게 밝혀야 되지 않겠는가.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일, (후략) 이라는 뜻이다.
한편 이 난곡사의 창립을 호소하는 발기문에는 선생의 높은 덕과 그의 공훈을 찬양하면서 사당을 지어 춘추향제를 올리자고 호소하고 있을 뿐 이재선생의 입남(入南)의 배경이나 동기 또는 입남후의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참고로 여기에 난곡사의 창립발기문을 수록해 둔다.
난곡사 창립발기문…삼가 아뢰옵건대 상고시대(上古時代)가 멀다하지만 만상에는 그것이 의리에 맞는것이면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고 싱싱하게 이어 내려져 가는 지라, 이재 상당군 백선생은 고려때 태어나셔서 문물을 닦아 후세에 이어 나가게하는데 큰 공이 있었다. 일찌기 이익재 박치암 같은 제현을 수제자로 이끌고 동방의 학문의 길을 열어 주셨으니 그 어른을 받들어 모심에 어찌 이 이상 더 지체할 수 있으리오.
장하도다. 후학은 이미 선생이 읊으시고 갈아 일구어 놓은 기름진 옥토앞에야. 본군은 먼 바다 가운데 있어 임진 정유병란으로 소중한 문헌이 거의 없어지기는 하였으나 조상들이 남긴 유풍미속을 지켜 아직 사리를 잃지않고 있는터이라 군자정을 비롯하여 마을 어귀의 시문(矢門)하며 군의 홍문(虹門)이 간직되고 있음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또한 동남방쪽에 두기(基)의 무덤이 있어 비록 오랜 풍상과 더불어 그 빛을 잃고는 있으나 그 하나가 상당군 백정승의 묘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의 일이거니와 이곳 남녘 섬사람들은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이 사실을 알고 전해 내려왔던 것이다. 실로 슬프고 애석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선생의 관대(冠帶)가 소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됨이 퍽 다행스럽다. 선생의 학문을 추숭(追崇)함이 이와 같으니 이를 두고 이른바 사해(四海)의 백성들이 입으로 새긴 글(口銘)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선생을 위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본군은 앞서야겠고 선생의 뜻을 따르려는 자 나 뒤를 이으려는 자는 깊이 깨달음이 있어야 할지어다. 비록 오늘의 형세는 우리의 힘이 너무 미약하거나와 현인(賢人)을 위해서 한번 시작한 일은 옛 선현(先賢)들이 그러하였듯이 깊은 생각으로 훌륭하게 성사시켜야 할 것이다.
천곡(川谷)의 정·주자(程·朱子)와도 같고 남양(南陽)의 제갈무후와도 같은 이재선생이시라 과히 우러러보고 추모할자 이땅에 적지 않을것이며 백년후에 어찌 오늘의 이 지성을 찬탄함이 없으리오. 외람스럽게도 너무나 미약한 저희들이 뜻을 내어 옛 난포(蘭浦) 고을에 선생의 사당을 지어 춘추로 향제의 예를 드리고자 하는바 모름지기 뜻을 헤아려주시와 아낌없는 협찬 있으시면 천만 행이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