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絿謫廬遺墟碑……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충렬사 참배길목에 들어서면 바른편 공지(空地)에 높이 약 2미터 넓이 90센치 두께 25센치에 이르는 큰 비석이 숙연이 서 있다. 이 비석이 곧 이조 중종 14년인 서기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남해로 유배되어 13년간 적거생활(謫居生活)을 한바있는 이조 4대서예가(四大書藝家) 중의 한사람이며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던 자암 김구(自菴 金絿) 선생의 유허비(遺墟碑)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선생의 적거처(謫居處)이며 서원 자리이기도 하다.
「天之涯 地之頭 一點仙島 左望雲 右錦山 巴川봉내 高山고내 山川奇秀 鍾生豪俊 人物繁盛……」
우리 남해찬가(讚歌)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화전별곡(花田別曲)을 읊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애송케 한 젊은 유학도이며 혁신정치가(革新政治家)이기도 한 자암선생이 학사(學舍)를 지어 후진들에게 문물을 가르치고 예속진작(禮俗振作)에 전념하던 유서 깊은 유지이기도 하다.
본관이 광주(光州)인 자암선생은 성종 19년 서기 1488년에 출생, 자는 대유(大柔)요, 호는 자암,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벌써 출중하여 서예에 능달(能達)하였고, 시가(詩歌)에도 뛰어난 재주로 석류시(石榴詩)를 읊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일찌기 16세 때 이미 한성시에 장원하여 생원진사(生員進士)에 오른 일재(逸材)였다.
서기 1506년 폭군 연산이 중종반정(中宗反政)으로 폐위축출되고 연산군의 비정(秕政)이 점차로 개선되어 중종의 이른바 혁신정치가 무르익어가던 중종 13년에 왕의 신임이 두터운 조광조(趙光祖)는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삼대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현량과(賢良科)의 이름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를 설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동 14년에는 김식(金湜) 안처근(安處謹) 박훈(朴薰) 등 28명에 이어 김구(金絿)를 비롯한 박상(朴祥) 한 충(韓忠)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탁용(摺用)되어 조광조일파로서 각기 요직에 올랐다.
중종 14년 서기 1519년 5월 조광조가 37세의 소장으로서 대사헌(大司憲)의 요직에 오르게 됨에 따라 김구 또한 32세로서 홍문관부제학이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혁신정치를 지향하는 그들은 먼저 미신타파(迷信打破)를 위하여 성진(星辰)에게 올리는 제사인 초제(醮祭)를 관장하는 소격서(昭格署)를 폐하는 대신 향촌(鄕村)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제정하여 8도에 시행케 하였다. 한편 민중생활에 관계되는 서적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이를 반포하는 등 이른바 조광조일파의 혁신선정은 뚜렷하였으나 그 방법과 수단이 과격하고 졸렬하여 보수파(保守派)와의 상극대립(相剋對立)은 날로 격심해져 갔다.
이윽고 대사헌 조광조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남록(濫錄)된 자가 많으니 이것을 추삭(追削)함이 가하다」고 보수파의 제거책을 상주(上奏)하자 보수파의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 등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조광조등이 붕당(崩黨)을 만들어 간사한 계략(詭略)을 일삼아 국정을 교란하고 있으니 그 죄를 다스림이 옳다」고 탄핵하고 나섰다.
때마침 중종 또한 조광조일파의 너무나도 도학적(道學的)인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터이라 보수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조광조일파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조광조는 대사헌에 오른지 6개월만에 능주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끝내 사약을 받았고 김구는 남해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이 대옥(大獄)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부른다.
자암 김구선생의 적거중의 동정에 대한 사료는 거의 없다. 다만 그 유허비에 13년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집에 서원을 세워 인근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후학을 가르쳤던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지금 그 서원이나 거사(居舍)가 형태조차 없어진 것은 추측컨대 고종원년에 내려진 전국서원과 향사철폐령(鄕祠撤廢令)에 기인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러한 명현이 우리고장에서 10년간이나 적거하면서 높은 학문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심어주었다는것은 큰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자암은 오랜 귀양살이 끝에 중종 28년 서기 1533년에 사면되어 방환(放還) 길에 올랐다. 이듬해 잠시 복관(復官) 되었으나 아깝게도 47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로부터 30년후인 선조원년 서기 1568년 4월에 조광조에게는 영의정(領議政)이 추정되었고 자암 김구에게는 1591년 선조 24년 이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 유허비는 선생이 가신 190년후인 숭정기후(崇禎紀後) 79년 서기 1766년에 그의 6대손인 통정대부행 남해현령 김만화(通政大夫行 南海縣令 金萬和)가 글을 짓고 통정대부전행사헌부장령 김만조(通政大夫 前司憲府掌令 金萬曺)가 이를 건립한 것이다.
유조선국 증가선대부 이조판서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 자암 김선생 적로유허 추모비
아 슬프도다. 여기가 곧 선조 자암 김선생이 귀양살이하며 사시던 곳이다. 소자 선생의 6대손으로서 이고을 현감으로 부임즉시 선생의 유허를 찾았다. 여택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어 돌이켜 옛일들을 생각할수록 공경하는 마음과 한스럽고 슬픈 마음을 금할길 없다.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예로부터 현인 군자가 지나거나 사시던 곳에는 필히 문채를 세워 길이 이를 남기는 법이려니와 항차 불초 이곳에 머물러 있는 자손인 몸으로 어찌 선생의 유적을 길이 전하도록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인파의 적소나 예산 향리에는 모두 서원이 있고 입석까지 하여 기록되어 있거니와 선생의 휘는 구요 자는 대유로 광주 김씨이다. 어릴 때부터 재질이 특출하여 여섯 살 때 읊은 석류시의 뜻이 기특하고 훌륭하다 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탄케 하였다. 16세에 한성시에 장원을 하고 약관 20세에 장원으로 문과에 뽑혔는데 그때 글은 한퇴지(韓退之)의 것이요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것이어서 시험관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후문도 있다.
26세에 석갈유괴원에 올랐다가 홍문관 정자 저작박사 사관원등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겸 동부승지 동부제학에 올랐다. 어느 달밝은 밤 지옥당에서 소리내어 책을 읽고 있을 때 마침 완월하려 뜰에 나와있던 임금이 그 낭낭한 목소리에 매혹(魅惑)되어 주연을 함께 베풀었다. 선생은 즉석에서 임금께 노래 두 수를 바치고 고금에 유례없이 돈피로 만든 갓옷을 하사받는 은총을 입기도 하였다.
선생은 조정암 김중암 등과 깊이 새기면서 협심 개혁으로 이른바 요순의 군민처럼 새세상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시운이 불행하여 기묘사화로 멀리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모두 신변을 두려워하고 떨었으나 선생은 화복에는 개의치 않고 대밭에 조그만한 초막을 짓고 거기에서 시가와 술로 태연자약하였다. 즉 13년간 남해에서의 귀양살이를 끝나고 임파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계사년에 풀려나와 갑오년에 복관되었다. 귀양살이 중에 양친상을 당하였으므로 그 슬픔 비길데 없을만큼 컸다. 양친 묘앞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시묘(侍墓)하면서 눈물이 끊어지지 않았고 그 눈물방울이 떨어진 곳마다 초목이 말라 죽었다. 선생은 47세를 일기로 무신년에 사거하였다. 만력 신묘년 이조판판을 추증받았다.
자손들이 선생의 모함이 지우고 그 공로를 밝히면 것이당. 이 거룩한 선생의 높은 덕과 문장은 서지로나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거니와 그 글과 명성으로 보아 그 모두가 국가에 도움 될 것이라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제 기묘사화 후 199년만에 여기에 비를 세우니 어찌 소자 혼자만의 감개이며 희포일 것이오 장차 먼후예와 선비들이 우러러 감회 깊게 받들어 모실것으로 믿으며 선생의 적로유허가 이곳임을 길이 새겨 잊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