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川祠廟庭碑……숙종조의 노론(老論) 4대신의 한사람인 이이명(李頤命)을 뫼시던 봉천사(鳳川祠)는 원래 봉천상류에 세워져 그의 영정(影幀)까지 모시고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어지고 그 묘정비(廟庭碑)만 남해읍 북면동 궁정(弓亭) 건너편 낮은 언덕바지에 황량(荒涼)하게 남아 있다.
이이명은 효종 9년 서기 1658년 전주에서 이경여(李敬輿)의 손으로 태어났다. 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이다. 숙종 6년 1682년 23세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해에 기사사화(己巳士禍)로 1689년에 남해노도(南海櫓島)로 유배된 구운몽(九雲夢)의 저자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의 사위가 된다. 또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와 그의 아내와는 4촌 자매임으로 숙종과는 4촌 동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관운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서인(西人)인 그는 1689년 겨우 30 안팎의 젊은 나이로 서인파의 수령인 송시열(宋時烈)의 기사환국(己巳換國)에 관련되어 처음 영해(寧海)로부터 유배되었다가 1692년 장인인 김만중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남해에 이배되어 왔다.
이어 1694년 갑무옥사(甲戊獄事)로 남인(南人)이 실각되자 사면된 이이명은 1706년 정월 비변사도(備邊司都)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방전략도인 요계관방도(遼薊關防圖)를 완성하였으며 이해 즉 숙종 32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20년 숙종이 서거하자 이이명은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건너가 그곳에서 패콜러신부들과 교우(交友)하면서 천주교 천문학 등 새로운 서양 서적들을 얻어 가지고 귀국하여 새학문 연구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경종 2년 1721년 정월 박상검(朴尙儉) 문유도(文有道) 등이 왕세자를 모해하려 하다가 복주(伏誅)된 대옥이 일어났다. 이 대옥으로 건저 4대신(建儲四大臣)이 소론(少論)들의 모함을 받아 모두 화를 입게 되었다. 당시의 건저 4대신은 이이명과 그의 종형인 이건명 김창집 조태송(李健命 金昌集 趙泰宋) 등이었다. 이때 이이명은 다시 남해로 유배되었는데 이듬해인 경종 3년 4월에 갑자기 소환되어 사약을 받고 말았다.
그것은 이이명의 배소인 남해에서 역모(逆謨)를 꾸며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론파측 목호룡(睦虎龍) 등의 터무니 없는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 2년 후 그것이 반대파의 모함임이 탄로되어 목호룡등 모함자는 장살(杖殺)을 당하였지만 이미 사약을 받고 죽은 이이명이 살아날 리 만무했다. 그해 5월에는 이이명의 뒤를 이어서 김창집이 8월에는 이건명이 사약을 받은 바 있었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실학사조(實學思潮)를 체계화한 거유 이이명이 우리 고장에 유배되어 적거하면서 학사를 짓고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길을 향사들에게 가르쳤음은 정조 경신년에 남해 유학도와 진양 향사들이 뜻을 모아 향사를 짓고 서울에서 영정을 모셔다가 봉안하였다는 사실(史實)에 비추어 명약관화한 일이라 하겠다. 이 서 원이 없어지고 묘정비 마져 봉천상류에서 현재의 지점으로 옮겨진 것은 역시 대원군의 향사 서원 철폐령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소재 선생은 사약을 받은 3년 후에 충문공(忠文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와 우리 향사(鄕士)들 간의 생전의 사제의정은 매우 두터웠던 것 같다. 그를 따르는 향사들에게 숭고한 스승으로서 대하였고 후일 소론파 측의 모함으로 사약을 받고 죽자 제자들은 마치 친 어버이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러기에 사당을 지어 모시기로 하고 서울로 뛰어가서 노량진 사충당에 모셔 놓은 영정을 가져다가 이 봉천사에 모셨던 것이다. 비문에서 「공은 도(道)로서 길을 열어 사(邪)를 물리쳐 나왔으며 군왕을 받들어 뫼심에 있어서는 몸을 내 던져 충절을 다해 왔다. 두 번째로 남해에 유배되어 온 공은 우선 허물어진 지붕을 입히고 옛집을 수리하여 다시 향사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의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악당들의 모함으로 이듬해 뜻아닌 화를 입고 말았다.
공은 후진들을 대함에 항상 스승과 같았고 그러므로 공이 사사(賜死)하자 친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그 숭앙의 정이 백 년을 두고 공이 살던 오두막집을 지켜 내려왔고 사당을 짓고 천리길을 달려가서 서울 노량진 사충당(四忠堂)에 모신 공의 영정을 얻어다가 봉안하기에 이르렀다. 반대당들이 중량한 중신들을 도살하려고 덤비자 공은 비록한 몸 멸하고 가문이 망할지언정 부정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으며 비록 오형과 칠족지환(五刑堪七族之患)을 입더라도 어찌 부끄럽고 더러움앞에 굴할소냐」하며 대의에 죽어갔다고 그의 충절과 대의에만 살아간 품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선대부 행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김난순 씀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경연의금부 춘추관 사동 성균관 오위도총부 조정철 새김
남해현은 섬안에 있는데 현의 동쪽에 죽산리가 있다. 그 마을 아래쪽으로 개천이 있어 이를 봉천이라 부른다. 이 봉천 상류에 있는 사당을 봉천사라 하고 좌의정 충문공이며 호가 소재인 이선생(이이명)의 영정(影幀)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곳이다. 그러면 이곳 선비들은 어찌하여 이 어른의 사당을 모시게 된 것일까? 공은 백강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기(才氣)가 특출하여 성장함에 따라 옛 성인들의 유훈을 잘익혀서 도의 문장으로 당세에 탁월한 군자로 알려졌다. 23세 때 문과에 급제, 29세에 중시를 거쳐 30세에 통정, 39세에 가선대부, 44세에 폐정랑, 49세에 정신승(政丞)에 올랐다. 경묘 신축년에 김충언 충익 조공 종부제와 더불어 어전에서 왕세제 문제를 상주하다가 오히려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소환되어 사약(賜藥)을 받은 후 3년 만에 복관되면서 시호를 추증받고 노량진의 사충신사당에 봉안되었다. 공은 세칭 건저(建儲) 4대 신중의 한 사람이다.
공은 뜻을 세움에 있어 도(道)를 얻어 이를 이루었고 간사함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도(道)로써 이를 분별지었다. 임금을 모실 때에는 몸을 내던져 충성을 다함이 충신의 길이요, 절의(節義)를 위해 항시 믿음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대함이 군자의 길임에 반해 소인배들은 이를 질시하며 항시 사람들을 꺼려하고 투기하는 법이라 그러므로 비록 현군을 만나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공은 이러한 신조로 자기 할 일을 해왔다.
그리하여 정유년 이후 하시라도 나라 일을 걱정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거늘 이윽고 기사사화에 말려들어 처음 영해로 5년 동안 귀양갔다가 남해로 이배(移配) 되었다. 남해에서는 조그마한 집을 지어 선비들은 물론 장사치들과 바닷가의 떠돌이 불량배들까지 모아서 올바르게 이끌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후 일단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남해로 유배되어 오자 공은 남은 옛집을 손질하여 다시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서당 이름을 습감(習坎―배우는 구멍 움집)이라 불렀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결국 화를 입고 말았던 것이다.
공이 전후 4, 5년에 걸쳐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곳 사람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의 도를 가르쳤다. 선비들은 공이 살아있을 때에는 떳떳이 스승으로 모셨고 공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마치 친어버이를 잃은 듯이 슬퍼들하였다. 백년을 두고 이 움막서당 건물이 보전되어 내려온 것만 보아도 공을 공경하고 숭앙하는 마음이 얼마나 두텁고 변함없는 것이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터이라 하겠다. 이곳 선비들은 그처럼 공의 언덕과 추념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정묘 경신년, 이곳 선비들은 진양군 선비들과 합심하여 공의 사당을 새로 짓기로 하였다. 멀고 가깝고를 고사하고 그들은 바삐 서둘렀다. 한패는 불원천리길 하고 한양으로 달려가서 노량진 사당에 모셔두었던 공의 영정을 모시고 돌아왔다. 조순에 의해 비문도 마련되어 입석까지 되었으니 이곳 선비들은 가히 군자로서의 지성을 다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신묘 임진년, 군왕의 병세가 위급하여 보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사직이 위태로와짐에 따라 왕통에 의거한 보위 승계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흉당들은 거꾸로 법통(法統) 아닌 사람을 왕으로 내세우려 획책했다.
어찌 백성들의 원성이 없을소냐. 그러나 흉도들은 그 도도한 권세를 앞세워 그 흉악한 계책은 극에 달했다. 드디어는 충량한 충신들을 말살하려 들었으며 심지어 법통과 오륜까지 묵살하려 하였다. 다름아닌 자기 파당의 일시적인 공리를 위함이니 아 슬프지고. 공은 다른 삼대신과 더불어 비록 이몸 죽는다 한들 슬플 것 없고 가문이 망한다 한들 두려울 것 없다 하여 오직 나라와 종묘사직의 안위만을 위한 그 밖의 일들은 일체 돌보려하지 않았다.
나라와 종묘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만이 그의 뜻이요 즐거움이었다. 옛적에는 국가 사직을 태안케 하게 하는자 몸도 편할뿐더러 부(富)를 누리고서도 아무런 재액(災厄)도 없이 편안하게 지낸 일도 있었지만 지금 그 길에는 무서운 오형(注―一死刑 二有絞, 三流刑, 四杖刑, 五笞刑)과 칠족(父之姓, 姑之性, 姑妹之子, 女之子, 母之性, 從子, 妻之母)이 멸하는 처절한 보복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국가 사직을 위해서라면 공은 어찌 기꺼이 그것을 받지 아니하랴. 공은 한번 결심하고 하고자 하는 일은 비록 몸과 가문이 망할지라도 이를 굽히지 아니하며 그 신념을 더럽힐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은 것이다. 흉당들은 온갖 계교(計巧)로 공을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지 아니할 수 없도록 꾸몄다. 비록 임금께 무고하여 벼슬이 유지되지 못할지라도 공은 그들을 원망하여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공은 그것을 알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은 의리의 판별이 바르고 마음이 밝을 뿐이다. 사필귀정으로 흉당은 패하고 백성들이 추앙하는 가운데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국가의 안태가 반석처럼 든든하고 백성들의 민복이 지켜져 나온 것은 어찌 다른 세 대신과 더불어 공이 지켜나온 충성스러운 공덕이라 아니할 수 있으리오. 공을 해(害)치기 위해 흉당들은 입을 모아 노래처럼 공을 모해(謀害) 하였지만 하늘이 믿는 공인지라 끝내 모함으로 성사치 못했다.
옛날 맹자는 자기는 제일 맛있는 웅장(熊掌-곰 발바닥)보다도 으뜸가는 이 세상에서 제일 보배로운 의(義)를 택하겠노라 하였고 공자는 한몸 죽여 이루는 인(仁)이 곧참된 인이라 하였거늘 공은 군자로서 의와 인을 다 이루었으니 공에게는 무슨 여한이 있을리 있으리오. 옛날 구래공은 특출한 공덕으로 뇌(雷)나라를 평정시켜 놓고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 섬에서 공의 제사를 모시고 있음은 마치 또 한 사람의 구래공을 섬기듯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사건저대신 모두 귀양을 가고 사약을 받은 것은 사전에 조정에서 조사를 완전하게 못했던 탓이다. 하루는 임금이 노신(老臣)들을 거느리고 어전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홀연히 이런 말씀을 하였다. 「공은 지금 어디 있을까. 제공들 보다 주장도 강했고 머리도 제일 허옇었지」 흉도들은 목을 움추린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공이 흉도들과 대하지 못했던 오랜 사이에 흉도들은 각기 자기들이 죽은 뒤에 성스러운 시효까지 내려지도록 꾸며 놓고 있었다. 그러나 흉도들에게 이 거짓 광영이 무슨 소용이랴. 천년후에도 자기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이 무리들의 이름을 두고 봐아하다니 아 슬픈일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