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世輔(최세보)…… 출생지는 알 수 없으나 원래 미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문맹(文盲)이었다고 한다. 성품이 호탐스럽고 무예에 능하여 고려조18대 왕 의종(毅宗)의 금군(禁軍)-侍衛隊(시위대)의 대장(殿長)으로 있었으나 1167년 유시의 변(流矢의 變)에 혐의를 받아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고장에 유배된 적객 중에서 기록에 남은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배소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4년 후인 1171년 명종 7년 즉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문무신간(文武臣間)의 알력이 정중부(鄭仲夫)의 쿠데타로 무신들이 득세하자 최세보는 방면복직되어 명종 11년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오르고 동 14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병부사상장군(判兵部事上將軍) 등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동 20년에는 판리부사(判吏部事) 동 20년에는 수대사(守大師)에까지 올랐다. 한편 정중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의종은 거제도로 유배되었고 그 태자는 진도로 귀양살이를 쫓겨갔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명종 23년에 몰(歿)했다.
周演之(주연지)……고려조의 요승(妖僧)으로 본명은 최산보(崔山甫) 전남 영광출생이다. 음양술수(陰陽術數)에 밝아 젊었을 때에는 금강사를 거점 삼아 온갖 술책으로 기만과 약탈을 일삼다가 발각되어 도피생활까지 하였다.
방방곡곡을 전전하던 그는 개명까지 하여 송경(松京)으로 숨어들어 다시 점술로 인심을 현혹시키고 부녀자들을 농락하면서 교묘하게 당대의 최고권력자인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우(瑀)에게 접근하는데 성공 온갖 악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던 중 1227년 고종 14년 상장군 노지정·김희제(上將軍 盧之正·金希磾) 등과 함께 최우를 제거하고 전왕 의종(毅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전왕은 교동(喬桐)에 유폐되고 김희제 노지정은 살해되었으며 주연지는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최우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宋君斐(송군비)…… 여조 고종 43년 해도장군(海島將軍)으로서 수군을 거느리고 당시 서·남해안 일대의 섬들에 침공한 몽군(蒙軍)을 격퇴한 공으로 1266년 원종 7년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다. 동년 시어사 김찬(侍御史 金贊)과 함께 왕명을 받고 몽고 사흑적(蒙古使 黑的) 일행과 더불어 일본으로 가던 중 불의의 대풍랑을 만나 거제도를 거쳐 되돌아왔다. 수년 후인 원종 11년 임연(林衍)이 죽자 그의 아들인 권신 유무(權臣 惟茂)가 모역죄로 참형(斬刑)됨에 따라 송군비(宋君斐)도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
白頤正(백이정)…… 호는 이재(彛齋) 본관은 남포(藍浦) 대사성 백문절(大司成 白文節)의 아들로 태어났다. 1298년 충렬왕 24년 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건너가서 10년간 주자학 성리학(朱子學 性理學)을 배워 연구하고 돌아와 수제자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과 박충좌(朴忠佐) 등에 전수한 여조 성리학의 원조이다.
충선왕 5년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고 충숙왕 4년에는 수제자인 익재 이제현 등을 원나라로 보내어 정주학(程朱學)을 연수케 하였다. 이어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벼슬을 지내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일설에는 1339년 충숙왕 8년 전왕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제거된 정승 조돈(政承 曺頔) 등의 모역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백이정은 그 학문과 높은 덕을 추앙하는 향사들에 의해 이동면 난음리 난곡사(蘭谷祠)에 모셔 내려오고 있는데 이 난곡사에는 그의 사돈격인 익재선생과 향토의 거유 이희급(李希伋) 선생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趙 貫(조 관)…… 본관이 한양인 조관는 일찍이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를 지내고 세종 12년 1430년 판내담사사(判內聸侍事)로 있을 때 종마관압사(種馬館押使)로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후 세종 30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에 올랐고 동 20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재차 명나라를 다녀오는 등 내외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1453년 단종원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하여 영의정 황보인(領議政 皇甫仁) 이조판서 조극관(吏曹判書 趙克寬) 찬성 이양(贊成 李穰) 등을 궐문안에서 추살(推殺)하고 좌의정 정분(左議政 鄭苯) 조수량(趙遂良) 등을 유배하는 등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조관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안평대군의 일당으로 몰려 1454년 남해로 이배 전후 14년의 귀양살이를 치렀다.
세조 14년에 사면(赦免)되어 숭록대부(崇錄大夫)에 올랐으나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양주에 낙향 은거로 여생을 보냈다.
李 仁(이 인)…… 왕손으로서는 우리 남해에 첫번째로 유배된 귀인인 것 같다. 이인(李仁)은 세종 18자(子) 중의 한 사람인 영해군(寧海君) 당(璋)의 아들로서 자는 자정(子靜) 성종 5년 영춘군(永春君)에 봉해지고 사옹원제조(司甕院提調)에 올랐다. 그후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 두 사화(士禍) 중 어느 사화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들 기(祺)의 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
몇 년을 두고 어떤 적거(謫居) 생활을 어디에서 하였는지 알 길이 없으나 1506년 폭군 연산이 쫓겨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왕위에 추대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성공되자 배소에서 풀려나와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다.
金 絿(김 구)…… 자암 김구(自菴 金絿)는 안평대군 한호(韓護) 양사언(楊士彦)과 더불어 이조전기(李朝前期) 사대서예가(四大書藝家)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유배객들 중에서도 그가 남긴 화전별곡(花田別曲)으로 우리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대학자이다. 자는 대유(大柔)요 본관은 광주로서 성종 19년 예산(禮山)에서 현감 김계문(縣監 金季文)의 아들로 태어나 중종 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얼마 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중종 10년에는 부수찬(副修撰)으로 올랐다.
1519년 32세 때 혁신파인 조광조(趙光祖)가 대사헌(大司憲)에 오르자 그는 부제학(副提學)으로 발탁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사사(賜死)되면서 그는 일단 개녕(開寧)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남해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로부터 13년간 남해 노량 지금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는 자리에 적거하면서 향사(鄕士)는 물론 그를 추앙하여 모여 드는 인근 선비들에게 높은 학문을 가르치면서 그 유명한 경기체가(景幾體歌)인 화전별곡을 남겼다. 이 화전별곡은 곧 남해의 찬가(讚歌)이기도 하다.
1531년 중종 26년 일단 남해에서 임파(臨波)로 양이(量移)되었다가 1533년 사면(赦免)되어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갔으나 그 이듬해 향년 47세로 아깝게 별세하였다. 그 후 이조 선조 때 이조참판으로 추정되었다. 참고로 그가 서울 인수방(仁壽坊)에서 살았다고 하여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부르고 있으며 현재 남해 노량 충렬사(忠烈祠) 남쪽 큰길목에서 그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고 고향인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 등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金鸞祥(김난상)……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甁山)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중종 2년 1507년 좌참찬 김현(左參贊 金玄)의 손으로 출생하여 중종 23년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 벼슬에 올랐다. 대윤파(大尹派)인 그는 1547년 명종 2년 소윤파들의 조작극인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몰려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남해에서 단양(丹陽)으로 이배 되었다가 풀려난 그는 선조 초기에 응교(應敎)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대사간에까지 올랐다. 선조 3년에 몰. 영천의 오산사(梧山祠)에 모시고 있다.
李 翎(이 영)……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붕거(鵬擧)。1520년 부제학 균(均)의 손으로 태어났다. 명종 7년 문과 병과에 급제 정언 지평(正言 持平) 등 벼슬을 거쳐 동 9년에 강원도어사(江原道御使)가 되었고 동 13년에는 공조좌랑(工曺佐郞) 동 18년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 등 비교적 관운이 순조로운 출세길을 치달렸다.
그러나 바로 그해 명종의 총애를 믿고 아부하는 자로부터는 뇌물을 짜내고 반대하는 자는 이를 멀리 추방하는 등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이량(李樑)을 탄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이른바 육간(六奸)이라 하였다.
이량은 그 죄상이 천하에 드러나 찬배(竄配) 되었다가 후에 사사되고 그 일당이 유배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이령을 출세길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이량이었던지라 이령도 그 일파로 몰려 남해에 유배된 것이다.
鄭 湛(정 탁)…… 호는 뢰암(襰菴) 본관은 동래인이다. 1527년 중종 23년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로 태어나 명종 21년 별시문과에 급제 검열 벼슬에 올랐으며 그 후 선조 4년 호조좌랑(戶曹佐郞)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학자이기도 하다.
이어 전라도도사(都事) 우부승지(右副承旨)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158년 선조 16년 북면에 니탕개(尼湯介)가 침공하자 도순찰사를 겸하여 이순신(李舜臣) 신립(申砬)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무관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는 대전공을 세웠다.
이어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변을 방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58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동인(東人) 정여립 역모사견(鄭汝立逆謨事件)이 일어나자 서인(西人) 정철(鄭澈) 등으로부터 맹렬한 탄핵을 받고 그 일파로 몰려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그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려는 양강(梁講)의 재상소로 대역죄로 다시 몰려 사사의 하교(下敎)까지 내렸으나 요행하게도 집행되기 직전에 감형을 받아 갑산(甲山)으로 이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선조 24년 적사(謫死)하였다. 남해에서의 귀양살이는 1년 정도였다.
成俊耉(성준구)…… 자는 덕보(德甫) 호는 장곡(藏谷) 본관은 창녕 사람으로서 선조 7년 부제학 이문(以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32년 별시문과 을파로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 부응교(副應敎) 등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이 즉위하게 됨에 따라 임해군 진(臨海君 珒)이 유배되고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파직 사사되는 등 소용돌이 속에서 성준고는 당시 동인이던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고 남해로 유배되었다.
남해에서 몇 년을 귀양살이 하였는지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그 후 양산등지로 배소(配所)를 전전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16년 만에 풀려나와 황해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안동부사(黃海道觀察使, 同知中樞府使, 安東府使) 등을 역임타가 인조 10년에 사거하였다. 그러니 남해에서는 최소한 7·8년 이상 유배생활을 보낸 것 같다.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정되었다.
金德誠(김덕함)…… 상주(尙州) 인으로 자는 경화 호는 성옹(醒翁)으로 명종 17년 1562년 출생했다. 선조 2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광해군조에 군기사정(軍器寺正)에 올랐다.
광해군 9년 1617년 다시 대두된 폐모론(廢母論)에 이항복(李恒福) 등과 함께 반대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다. 후에 명천 은성 사천 등지로 전전 이배를 당하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참의(參議)를 거쳐 부제학 대사성까지 올랐다. 인조 14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 된 그는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그해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은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 등에서 제향하고 있다.
趙 稷(조 직)…… 자는 북원(北源) 호는 지재(止齋) 풍양 사람으로 한풍군 수이(漢豊君 守彛)의 아들로 1592년 선조 25년에 출생하였다. 그간의 경력은 미상이나 1617년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올라있던 그는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친국(親鞫)까지 당한 끝에 남해로 유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6년 동안의 귀양살이 끝에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난 그는 호조좌랑에 재등용되었고 이어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관직은 평범하였으나 특히 산수화(山水畵)에 능했다.
인조 23년 몰. 대사헌에 추증되고 한천군(漢川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南 九萬(남구만)……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본관은 의령(宜寧) 사람으로 인조 7년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효종 2년 1651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효종 7년 별시문과에 급제 이조정랑 응교 대사간 승지를 거쳐 안변부사(安邊府事) 전라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로 변경수비에 임하는 등 관운이 좋은 사람이기도 하였다.
숙종조에서도 대사성(大司成) 형조판서 등을 거쳐 동 5년에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의 벼슬에 올랐으나 남인인 윤휴(尹鑴) 허견(許堅)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를 당했다.
이듬해인 숙종 6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윤 등 일파가 축출 사사되는 등 남인이 실각하자 남구만은 1년 만의 귀양살이 끝에 남해에서 풀려나와 도승지 부제학(都承旨 副提學) 대제학(大提學) 대사간(大司練) 등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뒤이어 숙종 10년에는 우의정 동 13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숙종 15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실각하였던 남인들이 다시 득세하게 되자 남구만은 다시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갑무옥사로 풀려나와 다시 영의정에 오르는 등 파란많은 여생을 겪었다. 숙종 37년 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숙종묘정(肅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 무산향사(茂山鄕祠)에서 모시고 있다.
우리 남해에서도 망운산에 올라서 읊은 제영등망운산(題詠登望雲山)과 금산의 절경에 심취해서 읊은 제금산(題錦山)의 2편의 영시(詠詩)를 남겨 애송되고 있다. 그리고 남구만의 5대손인 영로(永魯)는 고전소설 「옥루몽」과 「옥연몽」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沈 權(심 권)…… 자는 성가(聖可) 본관은 청송(靑松) 사람. 인조 21년 홍문관교리 희세(弘文館校理 熙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숙종 원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동 8년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언 지평 등 벼슬을 지내다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이휘명(李徽明) 등과 함께 남해로 귀양갔다.
6년간의 유배생활을 남해에서 보낸 심권은 숙종 20년의 갑무옥사로 풀려나와 수찬(修撰)으로 재등용되었고 후에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올랐다. 동 24년 전라도관찰사로 활약하다가 그 해에 서거하였다.
李徽明(이휘명)…… 자는 백상(伯祥) 본관은 전의(全義)로서 인조 26년 황해도 관찰사 이만웅(李萬雄)의 아들로 태어나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현종 13년 성균관에 입학 숙종 10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와 병조좌랑 등 삼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 12년 부교리로 있으면서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어머니가 궁중에 무단 출입하면서 거만을 부리는 행동을 탄핵하였다가 되려 파직되었다. 그 뒤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심권과 함께 남해로 유배되어 6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뒤 숙종15년 기사환국으로 심권과 함께 남해로 유배되어 육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후 갑무옥사로 풀려나와 이조좌랑으로 재기용(再起用)되고 그 후에 이조참의 우승지 등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대사판 평안도관찰관 등을 역임 끝에 숙종 25년에 몰했다.
徐浩修(서호수)…… 본관은 달성이며 자는 양직(養直)인 서호수(徐浩修)는 영조 12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명용(命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영조 4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지평이 되었으나 왕의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이 불씨가 되어 남해로 정배(定配)되었다.
2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동 43년에 풀려나와 부교리로 재등용되고 이어서 교리에 올라 동 46년에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들과 함께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였다. 영조 52년인 177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정조 15년에 규장각 직제학(奎章閣 直提學)과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를 거쳐 동 20년에 홍제전서속편(弘齋典書屬編)을 편찬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그 해에 사거하였다. 시호는 문민(文敏).
權大運(권대운)…… 인조 효종조의 상신(相臣)으로서 자는 시회(詩會) 호는 석담이다. 인조 때에 등제(登第)한 후 남인으로서 크게 활약하여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갑무옥사로 서인이-득세하자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숙종 15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 송시렬 영의정 김수항등이 사사되고 김익훈(金益勳)이 장살(杖殺)되는 등 서인이 붕괴되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동년 5월 민비의 폐비(廢妃)로 다시 남인들이 실각하게 되자 운세는 급전직하(急轉直下) 서인들의 맹렬한 탄핵으로 두번째로 영의정에서 쫓겨나 남해로 유배되었다. 얼마동안 귀양살이를 남해에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에 흥미있는 것은 남해의 적객들 중에서 남인인 권대운과 서인인 심권 이휘명 남구만 등의 운세가 반전부침(反轉浮沈) 되었다는 점이다.
권대운은 배소인 남해에서 걸해 관직사퇴(乞骸 官職辭退)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李 頤命(이이명)…… 이 이명은 숙종조 노론파 4대신 중 한 사람으로 우리 남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이정 김구에 이어 인연이 깊은 적객이다. 1658년 효종 9년 영의정 경여(敬輿)의 손으로 태어난 그는 자가 양숙(養叔) 초자는 지인(智仁) 호는 소재(疏齋)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숙종 6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그는 홍문관(弘文館) 정자 박사(正字 博士)를 지내고 동 12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1692년 남해로 이배되었다.
2년간에 걸쳐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는 서당을 열어 향사는 물론 인근 고을 선비들에게까지 학문을 가르쳤다. 숙종 20년 갑무옥사로 풀려나온 이이명은 호조참의로 재등용되었다. 이어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거쳐 동 24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형사명(師命)의 죄를 변호하다가 이번에는 공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면된 그는 형조 예조참판를 거쳐 대사헌부 판의금부사(判議禁府事) 등 벼슬을 역임하고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부고사(附告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북경에 머무는 동안 독일 신부(神父)피글리와 프르튜갈 신부 사우레스 등과 교우하여 천주교 천문학 역산법(曆算法)에 관한 서적을 구해 귀국하여 이를 전수하였다.
그러나 이 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세제 영조(世弟 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청하여 그 실현을 보았으나 소론(小論) 측의 석정(崔錫鼎) 조태억(趙泰億) 등의 반대 탄핵으로 그 결정은 철회되고 관직을 박탈당해 남해로 두번째 유배되었다. 그는 다시 구름같이 모여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여념이 없었으나 소론파 목호룡(睦虎龍)의 「이이명이 이천기(李天紀)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모함으로 즉시 소환되어 어처구니없게도 사약(賜藥)을 받았다.
이것이 모함으로 밝혀져 목호룡은 장살되었으나 이이명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이명을 비롯한 이건명(李健命) 김창집(金昌集) 조태억(趙泰億) 등 노론 4대신의 사사 등 이 피화(被禍) 사건을 임인옥사(壬寅獄事 景宗 三年)이라고 부른다.
우리 남해에서는 이이명이 사거한지 78년만인 정조 경신년에 남해읍 봉천(鳳川) 상류에 봉천사(鳳川祠)를 짓고 유허효정비(遺墟廟庭碑)를 세워 그 덕을 추앙해 왔으나 지금 그 사우는 없어지고 묘정비만 북평동 궁전 건너편 발기슭에 쓸쓸하게 남아 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 시호는 충문(忠文)。 그리고 이이명은 숙종 15년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남해 노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구운몽(九雲夢) 정경부인 해평윤씨 행장기(貞敬夫人海平尹氏行狀記)를 저술한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의 사위이다.
柳義養(유의양)……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이라는 당시로 봐서는 매우 희귀한 기행문책자를 남긴 사람이다. 자는 계방 호는 후송(後松) 본관은 전주. 숙종 44년 승지 대명(泰明)의 손으로 태어났다.
영조 32년 생원이 되고 해서현감(海西縣監)을 지냈으며 동-39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 사간원정언(司練院正言)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부수찬 등 벼슬을 역임하다가 1771년 영조 47년 삭탈관직(削奪官職) 당하고 서인(庶人)이 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 동기는 명확치 않으나 1년 남짓한 남해 귀양살이를 하면서 보고 들은 남해의 풍물을 기행문체로 쓴 것이 「남해문견록」이다. 이듬해 48년에 풀려나와 홍문관 부교리로 재등용되었으나 다시 아산으로 정배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풀려나온 그는 다시 홍문관 부교리로 재기용되었으나 또 종성(鍾城)으로 귀양가는 등 파란많은 관운을 겪었다.
그러나 영조 51년 재등용되어 영남어사 성천부사(成川府使) 예조참판 도승지(都承旨) 등 벼슬을 거치면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수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정조 8년에는 공조판서로서 춘방지(春坊志)를 저술하였고 동 12년에는 오례의통편(五禮儀通編)과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