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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第三章 孤愁의 落島流謫地로서의 옛고장 (제3장 고수의 낙도유적지로서의 옛고장) - 적소원귀(謫所怨鬼)된 불귀객(不歸客)들

내용
적소원귀(謫所怨鬼)된 불귀객(不歸客)들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적소원귀(謫所怨鬼)된 불귀객(不歸客)들

 

 

鄭澤雷(정택뢰)……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江) 본관은 하동사람으로서 1587년 선조 20년 현감 덕열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해군 4년 진사시(進士試)에 오른 그는 동 9년 대북파의 폐모론을 정면에서 탄핵하면서 처참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되레 모친 강씨와 함께 남해로 유배되었다.

모자간의 귀양살이에 관한 사료(史料)는 없으나 그는 4, 5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배소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이루어지자 지평(持平) 벼슬이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충결(忠潔) 부여의 충렬사에 제향하고 있다.

 


 

李誠胤(이성윤)…… 이성윤은 성종의 4대손으로 자는 경실(景實) 호는 매총(梅牕) 본관은 전주이며 우리 남해에서 왕손으로서 불귀객이 된 단 한사람이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선전관이 되었다.
 
임진란 때 혼전(魂殿)을 지킨 공으로 선조 승하 후(昇遐後)에 도정(都正)에 승진 정이품(正二品)에까지 올랐다.
 
1617년 광해군 9년 대북파에 의해 폐모론이 다시 대두되자 그는 동지 18명과 함께 이이첨(李爾瞻)의 간계(奸計)를 탄핵 상소하였다가 남해에 유배되었다.
 
그는 3년간 귀양살이 끝에 배소에서 객사를 하였는데 그의 배소생활이나 분묘(墳墓)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
 
다만 그가 왕손이었던 만큼 당시 의제도상으로 보아 혹은 일정한 장소에 위리안치(圍籬安置)나 탱자가시로 배소를 둘러 싼 가극안치(加棘安置)가 아니었던가 추측이 된다.
 
 

 
 
金萬重(김만중)…… 자는 중서(重叙) 호는 서포(西浦)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예조, 공조, 대사헌의 높은 벼슬을 지낸 중신(重臣)이기도 하거니와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등의 작자로 더욱 알려져 있다.
 
1637년 익겸(益兼)의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현종 6년 서기 1665년 28세로 문과에 장원(壯元) 지평, 수찬, 교리 등을 거쳐 동 13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3남의 진정(賑政)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부승지에 올랐으나 동 15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削奪)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기용된 그는숙종 5년 예조, 공조, 대사헌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숙종 15년 서기 1689년 기사사화(己巳士禍)로 남해에 유배되었다.
 
이동면 노도(櫓島)에 안치된 그는 3년 동안의 적거생활 중에 노모를 위로하기 위해 소설 「구운몽」을 썼고 모친이 운명하였다는 비보를 듣자 배소의 슬픔 속에서 어머니의 일대기인 정경부인 해평윤씨 행장기(貞敬夫人 海平尹氏 行狀記 경오 八월 서기 一六九Ο년)를 써서 추모하였다.
 
 

 

權命賢(권명현)…… 자는 사회(士希)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진주사람으로서 인조 21년 사인(舍人) 전(塡)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현종 14년인 1673년 진사(進士)로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숙종원년 부수찬이 되고 부제학을 거쳐 동 4년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숙종 6년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인 유명현도 삭직 되었다.

그후 정세는 반전(反轉)되어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한 숙종 15년의 기사환국으로 승지에 복관한 그는 이듬해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나 숙종 20년의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정세는 뒤집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2년 후에 풀려나오기는 하였으나 장희빈의 아우인 장희재(張希載) 등과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해치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서인들의 맹렬한 탄핵으로 남해에 안치되어 2년간 유배생활 끝에 배소에서 원귀의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