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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章 孤愁의 落島流謫地로서의 옛고장 (제3장 고수의 낙도유적지로서의 옛고장) - 不滅의 빛을 남긴 사람들

상세내용

不滅의 빛을 남긴 사람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고장은 고려중엽부터 이조중엽에 이르는 수백년동안 왜구들의 끈질긴 침공과 약탈로 생물구망(生物俱亡)의 흉변(凶變)을 수없이 겪었다.
 
선대들은 몇번이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정 든 고향을 버리고 타관으로 혹은 깊은 산중으로 피난을 다니면서도 끝내 향토를 지켜내어 우리들에게 물려 주었던 것이다.
 
이 옛고장에 빛을 뿌려준 사람들로서는 최영 정지 이순신등 삼성장군(三聖將軍)들에 대해서는 전장(前章)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그밖의 몇 몇 사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奇孝謹(기효근)…… 一五九二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의 남해 현감이다. 자는 숙흠(叔欽) 본관은 행주(幸州) 사람. 一五四二년 중종三十七년 - 一五七九년 대유의 아들로 출생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의 벼슬에 있을때 왕의 특명을 받고 전국 주(州)군(郡)의 군비상황을 조사 점검하기도 한 신임받은 무관이었다. 임진왜란 전에 남해 현감으로 부임하고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산포 만호(平山浦 萬戶) 등을 독려 전함(戰艦) 등을 수리하고 방비를 갖추어 이충무공함대 휘하에서 전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신병으로 현감을 사임한 그는 모친을 모시고 귀향하는 길에서 왜적들과 만났다.
 
불의의 습격을 받고 역전분투하였으나 생포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모가 견딜수가 없어 강물에 몸을 던지자 기효근은 적에게 생포되어 죽느니보다는 자결을 택하여 칼을 물고 모친의 뒤를 쫓아 투신자살을 하였다.
 
一六〇四년 선조三十七년 선무공신삼등(宣武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고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됨과 동시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劉珩(유형)…… 기효근의 뒤를 이어 남해현감으로 부임한 유 형의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 一五六七년 생의 무신(武臣)이라 소년시절부터 무예(武藝)에 뛰어나서 용명을 떨쳤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못하여 의병장 김천일(義兵將 金千鎰)의 휘하에 들어가서 강화전투(江華戰鬪)에서 활약하였고 멀리 의주의 선조행재소(宣祖行在所)에까지 수행하여 선전관에 오르기도 하였다.
 
一五九四년 남해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향토방위에 앞장을 섰다. 一五九七년 이순신장군이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로 도임하게되자 그 막료(幕療)가되어 노량해전에 참전 만신창흔을 입으면서도 역전분투하여 공을 세워서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
 
부임한지 불과 二년만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그는 一六〇九년에는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뒤이어 경상, 평안 황해동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嚴 愰(엄황)…… 유 형에 이어 二대정도 후임으로 남해현감으로 있었던 엄 황은 본관이 영월(寧越)이며 자는 명보(明甫) 一五八〇년생으로 일찌기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사주부(司僕寺主簿)를 지냈다.
 
一六〇六년 선조三十九년 불과 二十六세로 남해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도총부도사(都總部都事)로 비변사랑관(備邊司郞官)을 겸하여 국방강화에 주력을 기울여 선정하였다.
 
그후 안동판관(安東判官) 함안군수등을 거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등 높은 벼슬에 올랐다.
 
이어 一六五二년 효종三년 영흥부사로 갔다가 이듬해 임지에서 죽었다.
 
 

 
 
裵守義(배수의)…… 고려 개국공신이며 경주배씨의 시조인 현경(玄慶)의 후손으로 일찌기 선대가 입남(入南) 하였음인지 본관이 남해로 되어있다.
 
음보(蔭補-祖上의 공로로 子孫이 과거급제(科擧及第) 없이 관직(官職)에 올을수 있는 특전(特典) 참봉을 지내다가 一五九二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종의(從義)와 채홍국(蔡弘國) 등과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금산싸움에 달려갔으나 그 때는 이미 고경륜(高敬崙) 등 七百의사가 전사한 뒤였다.
 
복수심에 불탄 그들은 죽음으로 원수를 갚기로 혈맹(血盟)하고 왜적을 추격하여 순천에까지 진격하였으나 그때에 명장 송응창(明將 宋應昌)이 왜적과 화의(和義)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일단 귀향하였다.
 
그로부터 五년후인 一五九七년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장등(長燈) 싸움에 출전 왜적들을 무찌르고 분전 끝에 아깝게도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그 순국정신은 만인의 귀감이라하여 가희대부(嘉喜大夫)에 추증되었으며 지금 홍덕의 창의사(昌義祠)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李 滿直(이만직)…… 이 충무공의 六대손으로 자는 사준(士俊) 본관은 덕수, 서기 1711년
 
숙종 37년 훈련대장 봉상(鳳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52년 영조 28년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병사절도사 벼슬에 올랐고 동 44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뒤이어 총계사(摠戒使) 금위대장(禁衛大將) 어영대장(御營大將) 등을 역임하여 충무공후예다운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1752년 영조 28년 노량으로 당시의 충민사(忠愍祠-현 忠烈祠)를 찾아 이충민공비(李忠愍公碑)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 인근산야와 전답을 사들여 사답(祠沓)으로 바쳤다.
 
그리고 비각을 중심으로한 사당 뜰에 조경(造景)까지하여 오늘에 이르르게 하였다. 충무공의 五대손인 이태상(李泰祥)은 733년 영조九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때 충렬사를 찾아와 입문에 청해루(淸海樓)를 세웠다.
 
그러나 1875년 고종 8년에 대원군(大院君)의 서당 향사철폐령(書堂 鄕祠撤廢令)으로 철거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또한 충무공의 五대손인 이관상(李觀祥)은 734년 영조 10년 진주병마사(晉州兵馬使)로 있을 때에 충렬사로 찾아와 많은 사답(祠畓)을 마련해 주었으며 충무공의 五대손인 이면상(李命祥)은 742년 영조 18년 호남절도사(湖南節度使)로 있으면서 내남하여 효종 10년에 세웠던 이충민공비를 뽑아 경내에 매장하고 새 시호인 이충무공비를 세웠다.
 
6대손 한용이 사림(祠林)과 사답(祠沓)을 사들여 조림한 바로 그 해이다.
 
그리고 충무공의 11대손인 이민승(李敏承)은 광무三년 서기 1877년 통영주둔 육군참영(陸軍參領)으로 있을때 충렬사를 찾아와서 대원군의 서당 향사철폐령으로 훼손된 사당을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이항권(李恒權)…… 이 충무공의 六 대손으로 1808년 음보(蔭補)로 선전관 벼슬에 올랐다 가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별군직(別軍職)에 뽑힌 그는 대궐 숙위(宿衛)의 중임을 잘 수행하여 일약 황해도 수군절도사 전라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0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제사가 되었다.
 
그는 통제사로 재임하던 1832년 충무공의 전몰유허인 관음포에 찾아들어 당시 상막하기 이를데없는 유허지에 공의 전몰유허비와 비각을 세워 유서깊은 성웅(聖域)의 순국지로서의 면목을 일신 시켰다.
 
사실상 이 유허에 유허비각이 들어서기 전까지 즉 순국 2백 34년동안 이곳은 속칭 이낙포(李落浦-이장군이 떨어진 곳)라 불려져 왔을뿐 이성역(聖域)은 잊혀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어 부총관(副總管)으로 훈련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의 중군별장(中軍別將)을 지냈다.
 
 

 
 
慧 堪(혜감)…… 고현면 대곡리의 화방사(花芳寺)의 전신인 영장사(靈藏寺)를 세웠다는 이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스님의 호는 무의자(無衣者) 속성은 최씨요 이름은 식(寔) 자는 영을(永乙) 고려조 명종 8년 진사 완(琬)의 아들로 태어났다.
 
23세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깨달은바 있어 조계사 수선사등의 개조(開祖)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을 찾아 불문에 귀의하였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入寂)하자 왕명으로 그는 조계사의 二세가 되었고 고종(高宗) 즉위와 더불어 선사(禪師)가 되었다가 곧 대선사에 올랐다.
 
1217년 수선사에 있으면서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를 겸하고있다가 1234년 고종 21년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하였다.
 
이 회심 진각국사가 원래 망운산 남쪽기슭에 있던 연죽사(煙竹寺)를 지금의 화방사자리로 이건하여 영장사라고 개칭하였다고 전해져 있기는하나 사지(寺誌)가 없어 그 진부를 가리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회심스님이 창건한 것이 확실하다면 회심스님은 고종 21년 서기 1234년에 입적하였으니 영장사는 천二백년대에 세워졌다고 추측 할 수 있다.
 
이 영장사는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약 四〇년후에 그자리에 다시 재건하여 화방사(花芳寺)라는 이름으로 개명 오늘에 이르렀으나 그 본전(本殿)인 보광전(普光殿)이 근년에 또 불타버렸다고 하니 애석하기 한 없는 일이라 하겠다.
 
 

 
 
周 世鵬(주세붕)…… 절경인 금산을 찾아 오르면 「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자가 명필바위라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명필 주세붕의 글씨가 새겨졌다고 해서 명필바위 또는 문장암(文章岩)이라고도 한다.
 
주세붕의 이름은 이러한 설화로 더욱 널리 알려졌고 친근감을 준다. 그의 자는 경숙(景叔)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상주사람이다.
 
서기 1477년 연산군 27세때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였으나 권신 김안로(權臣 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멀리 강원도 도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여말의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안 향(安珦)의 사당 매헌사(梅軒祠)를 세웠으며 우리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을 세워 후학양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후 직제학, 도승지, 대사성 호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1551년 명종六년 황해도 관찰사가 된 주세붕은 해주에 또 수양서원을 세워 최충(崔沖)을 제향하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는 여가가 나는대로 전국의 명승지들을 탐승 그야말로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면서 많은 시가(詩歌)를 남겼다. 절승지인 남해금산에 심취(心醉)되어 필시 명시도 읊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상금 입수치 못해 유감이 아닐수 없다.
 
한편 상주 주씨 연원보(尙州周氏 淵源譜)에 따르면 남해 금산 상제암(上帝岩)에 남아있는 「由虹門上錦山」이란 이 유묵은 주세붕이 중종 33년(서기 1538) 금산 탐승길에 쓴 것을 당시의 남해포총판 김극성(金克成)이 석수를 시켜 새긴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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