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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第四章 悲嘆의 謫所에 핀 流配文學 (제4장 비탄의 적소에 핀 유배문학) - 柳義養의 忠烈祠獻詩 (유의양의 충렬사헌시)

내용
柳義養의 忠烈祠獻詩 (유의양의 충렬사헌시)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柳義養의 忠烈祠獻詩 (유의양의 충렬사헌시)

 

 

남해문견록을 남긴 유의양(柳義養)은 영조 37년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기 위해 노량 나루를 건너서면서 충렬사를 찾아 참배하고 그 자리에서 이 헌시
 
(獻詩)를 읊어 그의 남해견문록에 기록하였다.
 
嚴程一千里 (엄정일천리) 訪古露梁邊 (방고노량변)
蟻首天兵礪 (의수천병려) 龜形統制船 (귀형통제선)
春秋無地讀 (춘추무지독) 忠孝有孫傳 (충효유손전)
哀客心猶壯 (애객심유장) 高吟寶劍篇 (고음보검편)
 
 
右所收 남해견문록
 
형극의 일천리길을 걸어 노량 충렬사를 찾았다.
비 머리는 천병의 창 모양이며
거북이 상의 기태는 거북선과 같도다.
춘추를 읽지 못하던 차에
충효로운 후손들이 이토록 위업을 전해주고 있으니
이 적객의 마음이 스스로 부풀어 올라
소리 높여 보검편을 외우도다.
 
 

 

趙顯命과 鄭以吾의 獻詩 (조현명과 정이오의 헌시)

 

 

비록 적객(謫客)은 아니지만 충렬사와 관음포의 이충무공, 전몰유허-구이낙사(李忠武公戰歿遺墟 舊李落祠)를 찾아 헌시(獻詩)를 읊은 시가가 있기에 함께 수록키로
하였다.
 
당시 관찰사였던 조현명은(1690년~1792년) 영조 때의 대신으로서 자는 치매(稚晦), 호는 귀록(皎鹿), 본관은 풍양이다. 171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찰사 시절에 이 시를 읊었으며, 1728년(영조 4년) 이린(李麟)의 난(亂)을 평정한 공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740년에는 우상(右相)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다.
 
 

 
 
趙顯命의 忠烈祠獻詩 (조현명의 충렬사 헌시)
 
忠烈遺祠古濤渡 (충렬유사고도도)  靑春駐節海雲深 (청춘주절해운심)
也識天生早有心 (야식천생조유심)  得如公死眞無愧 (득여공사진무괴)
逝後魚龍猶怒氣 (서후어룡유노기)  化餘猿鳥自悲吟 (화여원조자비음)
檀者欲歇多風過 (단자욕헐다풍과)  蕭寺鐘鳴月桂林 (소사종명월계림)
 
거치른 노량목을 건너 충렬사를 찾으니
고결한 넋이 머무는 곳 하늘은 높고 바다는 깊구나.
모두가 타고났던 천성일진대
나라를 위해 대위에 죽었으니 어찌 한이 남으리오.
공 가신 뒤 어룡의 노기는 아직 풀리지 않고
산야의 금수들도 슬픔 못잊어 울고 있거늘
소직 공의 품에 안겨 잠시 쉬고자 하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사의 종소리
달만 외로이 나무가지에 걸려있네. 
 
 

 
 
鄭以吾 題詠過觀音浦 (정이오 제영과관음포)
 
望雲山下望帆風 (망운산하망범풍)  東去西來昨艦通 (동거서래작함통)
莫問英雄當日事 (막문영웅당일사)  至今人喜說元功 (지금인희설원공)
 
망운산 기슭 공이 가신 바다를 바라보니
오늘도 크고 작은 배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구나
공이 어떻게 싸웠느냐고 새삼 그날 일을 물어볼게 있겠는가
이미 모든 백성들은 그 공훈을 자랑하며 숭앙하고 있거늘.
 
 

 
 
柳義養의 南海聞見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
 
 
 
 
유의양의 남해문견록은 근 1년 동안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상세히 기록한 이른바 희귀(稀貴)한 기행문체의 풍물지이다.
 
본관이 전주요 호가 후송(後松)인 유의양은 숙종 44년생, 영조 22년 상원에 올랐으며 해서현감(海西縣監)을 지내다가 동 39년 증광문과병과(增廣文科丙科)에 급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홍문관 수찬(修撰)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동기는 분명치 않으나 영조 47년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동 48년 풀려나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재등용되었거니와 이 남해문견록은 남해에 유배되어 적거생활을 하면서 쓴 것이다.
 
문견록은 노략목을 건널 때부터 시작되어 남해의 세정(世情)을 비롯한 관혼상제 등 풍습과 방언(方言)에 이르기까지 수록하고 남해의 절경인 금산 38경을 탐승하여 그 풍치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어 있다.
 
이토록 이 문견록에는 이조 영조 47년대 즉 서기 1771년경의 남해의 풍물과 세정의 단면이 흥미있게 묘사되어 있어 여기에 그 현대역문(譯文)을 옮겨 두기로 하였다.
 
그런데 유의양은 남해에서 풀려나와 홍문관 부교리로 있다가 그해에 다시 아산(牙山)으로 유배되었으나 영조 51년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감훈관승지(監薰官承旨)로 있으면서 증보 문헌비고 수찬(增補文獻備考 修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노량진(露梁津) 나루에 유배(流配)의 몸 싣고 ...... 남해안 읍이 바다 가운데 섬이기 때문에 노량(露梁) 나루를 건너가는지라.
 
신묘(영조 47년, 1771년) 2월 26일 오전에 나룻가에 달하여 배 오기를 기다리니 물 너비는 한강의 서너 배나 되는 물이 그리 멀지는 아니하고 바람이 없어 물결이 잔잔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나루는 순진(順津)이라.」
하고, 또 내가 바닷배 건너기 처음이로되 구태여 무섭지는 아니하나 북으로 바라보니 운산이 첩첩하고 가국(家國)이 천리밖에 있는지라 물의 길에 올 적보다 마음이 다르더라. 배를 타고 옛사람의 글에
「평생에 충성과 신의를 가졌으니 오늘날 풍파를 당하노라.」
한탄한 문구를 외고
「배를 바삐 저으라.」
사공에게 재촉하여 띄우니 푸른 바다 물결은 넓고 편편하고 사면으로 티끌이 없어 배가 순풍으로 잘 가니 이런 때에는 뭍의 길에서 안마(鞍馬)에 피곤하게 시달려 가느니보다 낫더라.
 
이윽고 남쪽 가에 배를 대니 비로소 남해땅을 디디는지라 물가 언덕에 대나무 숲이 많이 있고 죽림 속에 누각 같은 집이 있는지라 촌인더러 물으니
「이 충무공(李忠武公) 서원이라.」
하더라. 충무공의 이름은 순신(舜臣)이요, 임진왜란 때에 통제사로서 이 노량을 지키어 도적을 막아 왜적이 오는 배들이 물에 자무질러 파한 것이 전후 무수하더니 나중에 왜적의 철환을 맞아 이 땅에서 입절하니 나라에 공이 극히 많고 절의(節義)가 이렇듯이 뛰어나 의젓하니 국인이 이제까지 불쌍하여 하는지라 조정에서 이 서원에 임금께서 이름을 지어 주시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 주시며 사적을 기록하여 큰 비를 세우시어 열성조의 절의를 숭상하셔서 상을 주고 격려하여 권장하오심이 이렇듯이 극진 하오신지라.
 
이런 곳을 보매 떳떳하게 타고난 마음이 있는 이들이 어찌 감동치 아니하리오? 그 비문은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 宋時烈)이 지으시고 동춘당(同春堂) 송 문정공(宋文正公 = 宋浚吉)이 글씨를 썼다고 하더라.
 
내 이전에 〈우암집(尤庵集)〉을 보다가 이 비문을 보고 충무공 사적을 일컬어 매양 이르되
 
「충무공이 임진 이전의 벼슬이 극히 낮아 사람들이 이런 기절과 재략이 있는 줄 몰랐더니 임진년에야 비로소 드러났는지라 옛사람이 「평시에 벼슬로 나라를 쓰이지 못한 사람들이 당난하면 충절을 많이 세운다」고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더라.」
 
내 점심할 동안에 서원에 올라 심원하고 가고자 하나 내 길이 죄명으로 바삐 가는 지라, 올 적에 전주(全州)와 남원(南原)을 지나니 전주의 건지산은 시조모(始祖母) 산소가 계시고 남원 황죽동에는 선조의 산소가 계시고 남원 황죽동에는 선조의 산소가 계셔 길가에서 두 곳이 다 그리 멀지 아니하되 바삐 가기에 들르지 못하고, 전주 함벽당에는 선세 글 지으신 현판이 많이 있으니 보는 사람들이
「유씨 사랑이나 다르지 아니하다.」
일컫는 것이요, 바로 길가이로되 내 오르지 아니하고 왔으니 이 서원이라도 오르면 어떨까 싶어 아니 다니고 점심을 재촉하여 먹고 읍내로 바삐 행하니 노량에서 읍내는 삼십리더라.
 
읍내 가까이 바닷가에 큰 바위를 새겨 비석을 하였으니 촌인들이
「마애비(磨崖碑)라.」
일컫더라. 그 터는 임진왜란 때에 대명 황제가 나라를 위하여 사마(司馬) 형공(刑公 = 刑玠)과 도독(都督) 진공(陳公 = 陳璘)에게 군사를 많이 거느려 보내어 이 바다에 와서 왜적과의 싸움에서 많이 이기어 파한 곳이라고 승전한 사적을 기록한 것인지라 글씨 대명적 고적이 완연하니 아동 사람이 대명 은혜를 어느때 잊으리오. 내 글 한 수를 지으니 시에 가로되
 
「엄한 길 일천 리에 (嚴程一千里)
고적을 노량가에 찾아 보는지라 (訪古鷺梁邊)
이무기의 머리는 하늘 군사의 숙전비요 (蟻首天兵礪)
거북의 형상은 통제사의 전선이라 (龜形統制船)」
춘추를 읽을 땅이 없었으니 (春秋無地讀)
충효는 자손이 있어 전하였도다 (忠孝有孫傳)
귀양가는 손의 마음이 오히려 장하니 (哀客心猶壯)
보검편을 높이 읊는도다 (高吟寶劍篇)
 
읍내에 들어오니 작은 성이 있는지라 북문으로 들어가 관문을 지나 성 남문으로 나가니 관가의 하인하나가 와서 주인을 붙잡으며 가자 하고 가르치거늘 말을 몰아 바삐 가니 주인의 자식 아이놈이 마주 나와 폭려(暴戾)한 소리를 하고 집을 막기를 심히 하니 해도(海島) 인심이 극악한 줄 들었던 것이어니와 소견에 극히 이상스러워 놀랍고 우겨서 들어가려 하면 괴이한 행동거지가 있을 듯싶기에 그 아이를 꾸짖지도 아니하고 내 종을 단단히 일러 경계하여
 
「아이의 말을 들은 체 말라.」
하고 말머리를 돌리어 남문 밖으로 도로 와 가게에 앉아 관가 하인을 불러 이르되
「내 귀양으로 이리 왔으니 보수(保授) 주인을 관가에서 정하여 맡기는 것이 원칙이니 주인을 정하여 달라.」
하고 남문 밖 백성 김 시위의 집으로 정하여 주거늘 그리 가니 김 시위는 잡소리를 아니하고 좋이 대접하더라.
 
가게에 앉았을 정참판(鄭參判) 광충(光忠)이 급히 와 보고 이전에 못 본 사연을 말하고 궐야(厥爺)는 관리로서 지위에 있는 일이 다하여 왔거니와 새로 오는 이는 무슨 연고고 묻고 궐야 머물기는 북문밖이니 날더러 북문 밖으로 옮겨 와 이웃하여 지내자 하거늘 내 대답하되
 
「내 수찬(修撰)을 하여 한번 나라에 상소도 못하고 즉시 나오지 못할 까닭이 있어 있었더니 관리로서 지위에 있는 일이다 해서 이 땅으로 귀양보내는 왕명이 있어 이리 왔노라.」
하고
 
「머무는 곳은 관가에서 이미 정하여 주었으니 어찌 친구와 상종하기를 위하여 고치리.」
하니 정참판이 대답하되
 
「성남 성복이 심히 멀지 아니하니 서로 상종이나 자주 하자.」
하고 가더라.
 
원이 나와 보고 저녁밥을 하여 보내었거늘 사양치 못하여 먹고 관가에서
「토인과 사령과 식모를 보내려 하노라.」
하고
 
「이전의 다른 적객들도 이 하인들을 빌어 부리더니라.」
하거늘 내 생각하니 예전의 선배 어른들이 적소에서 이런 하인을 부린 일이 있으니 나도 못할 일이 아니로되 내 종놈 일명이 있으니 족히 심부름은 할 것이요, 밥은 주인이 할 것이요, 또 이전에 들으니 우리 계구(季員) 한공(韓公 = 韓德增)이 옥당으로 안주(安州) 귀양 가실 제 관하인을 빌어 부리지 아니했다 하던 것이매 나도 사양하고 부리지 아니하니, 혹 답답한 적도 있더라.
 
내 서울에 길 떠나올 때 급하기에 약간 노자를 가지고 오나 행로 구간(苟艱)이 특심한지라 여러 고을을 지나고 아는 수령이 혹 있어도 구걸하는 혐의가 있어 한 곳도 전갈하여 오라는 말을 알리지 아니하고 어스름 새벽길이 있어도 횃군도 받지를 아니하였더니 현직 관찰사인 전라감사가 지난다는 말을 듣고 술막으로 나와서 보고 신행을 착실히 하기를 바란다고 하고, 남원에 드니 원은 공고(公故)로 나가고 관가에 있던 손님이 이전 원의 아내의 사촌인 줄로 알고 술막으로 나와 보고 남해까지 갈 양식과 노자를 차려주니 받아 오나 사촌 누이를 생각하니 이전 서흥(瑞興)과 원주(原州)에서 놀던 일이 어제 같건만은 인사가 변하였으니 마음에 측은하게 생각되더라.
 
남해에 들어온 후는 영백(嶺伯)이 보낸 것으로 지내니라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