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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제5장 남해 연혁연구 (第五章 南海 沿革硏究) - 三韓과 大伽倻 時代 (삼한과 대가야 시대)

내용
三韓과 大伽倻 時代 (삼한과 대가야 시대)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三韓과 大伽倻 時代 (삼한과 대가야 시대)

 

 

 

三韓時代(삼한시대) ...후한서 동이전 한조(後漢書 東夷傳 韓條)에 韓有三種 一曰 馬韓 二曰 辰韓 三曰 弁韓—(중략)—凡七十八個國—(중략)—地合四千里 東西以海限 皆左之辰國也 즉 한(韓)에 세 나라가 있었다. 그 하나는 마한이라 하였고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라 일컬었는데 (중략) 대략 78개 고을(부족사회)로 이루어졌으며 (중략) 땅의 넓이는 사천 리요 동서쪽은 바다로 막혔고 모두가 옛 진나라다라는 라는 기록이 있다.
 
북쪽에 강대국인 고구려가 패세(覇勢)를 누리고 있을 무렵 남쪽에서는 부족사회의 대집단체라 볼 수 있는 마·진·변한이 정립(鼎立)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를 삼한시대(三韓時代)라고 한다.
 
당시 마한은 54개 부족 집단사회로 구성되었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부족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우리 남해는 섬진강을 경계로 동서쪽으로 나누어졌던 변한과 진한 두 나라 중 동쪽의 변한에 속해 있었다.
 
다만 열두개 부족 중 어느 부족 사회에 예속되어 있었는지 찾아볼 수는 없으나 당시 지역적으로 보아 군미국(軍彌國) 또는 낙노국(樂奴國)에 예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군미국이 당시 현재의 경남 사천, 곤명면, 곤양면 일대를 지칭했었고 낙노국은 하동군 악양면일대를 지칭하였으니 남해는 인접지인 낙노국에 예속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제국읍(諸國邑)의 주수(主帥)는 부락집단을 통솔하고는 있었으나 오늘날 말하는 행정기구가 이루어져 있었음은 물론 아니요 그러나 다만 부락단위의 공동체조직은 공고하였으리라고 사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즉 농촌사회에 성행하던 「두레」라는 공동작업 조직체의 대명사에서 미루어 보아 더욱 그렇게 믿고 있다. 이병도(李丙燾) 박사는 이 「두레」라는 말을 원시공동체에서 전래된 유제(遺制) 유풍(遺風)으로써 위요(圍繞) 원주(圓周)의 뜻인 「두레」 「두례」로 풀이하면서 이는 고대사회의 공동체제를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흥미있는 것은 우리 남해에서 성행하던 「둘개」 또는 「둘개방」이란 유풍이다. 둘개란 부녀자들이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한데 모여 길쌈을 하는 이른바 공동작업의 뜻인 「두레」의 변형음이며 둘개방은 곧 그 작업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이 방언이 오랫동안 전래되어 왔던 것을 보아도 남해의 원시적 공동생활체와 공동작업이 상당히 뿌리 깊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大伽倻 聯合 時代 (대가야 연합 시대)
 
三韓時代를 거쳐 낙동강(洛東江)을 중심으로 현 고령(高靈) 지방에 상가야(上伽倻) 현 김해지방에 하가야(下伽倻)가 생겼다. 강을 따라 뱃편(舟楫)이 좋고 토지비옥(肥沃) 하여 농산물이 풍성해짐에 따라 이 두 지역은 실로 변한의 정치 경제 문화발상의 이대(二大) 중심지가 되었고 후에 대가야연합체를 이룬 핵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지역에 점차로 강대한 부족사회가 형성되어 다음과 같은 대가야를 이루었다.
 

    º  아라가야(阿羅伽倻) 현 함안지방 (一說 金官伽倻)

    º  고녕가야(古寧伽倻) 현 진주지방

    º  대가야(大伽倻) 현 고령지방 (一說 非火伽倻)

    º  성산가야(星山伽倻) 현 성산지방 (一說 阿羅伽倻)

    º  소가야(小伽倻) 현 고성지방 (一說 星山伽倻)

 
이 五伽倻(오가야)는 이른바 강력한 하나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이 시대를 불리 대가야연합시대라 하였다. 이 시대에 남해는 지역적으로 보아 고녕가야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最初(최초)의 郡名(군명)은 轉也山郡(전야산군)
 
 
 
 
新羅時代(신라시대)……진한 마한에서 온조(溫祚)를 시조로 한 고니왕(古尔王)이 부족집단을 통일하여 백제를 세운 것과 같이 五가야의 一족이면 신라도 점차 주위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해 나가다가 드디어 낙동강 연안의 가라제연맹국을 통합하여 대국(大國)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명실공히 신흥국으로서의 체제와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건국 556년인 제23대 지증왕조(智證王朝) 서기 510년때이다.
 
즉 동왕 4년 국호를 신라라 정하고 왕의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순장(殉葬)의 누섭을 금하고 동 5년에 국내에 처음으로 주 군 현(州 郡 縣) 제도를 정하여 이를 실시케 하였다.
 
그리하여 법흥왕 19년에 김해지방 금관가야가 병합되고 진흥왕 23년 서기 572년에 대가야를 비롯한 제소국을 평정통합 하였으니 우리 남해는 이때 처음으로 신라치하에 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기에 따르면 우리 남해도가 행정적으로 독립군명을 받은 것은 신라 제30대 문무왕 17년에서 31대 신문왕 7년(서기 687~697년) 사이로 알려져 있는데 최초의 군명은 전야산군(轉也山郡)이었다. 전야산이란 행운과 길사(吉事)가 산야에 넘쳐 굴러다닌다는 뜻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시대의 최초의 획기적인 지방행정구획의 재편성은 문무왕조 17년부터 신문왕 7년까지에 걸쳐 완성되었었다.
 
전국을 사벌(沙伐) 연량(軟良) 청(菁) 한산(漢山) 수약(首若) 웅천(熊川) 하서(河西) 무진(武珍) 등 9주(九州) 5소경(小京)으로 편성하고 주아래 117군과 393개현 그리고 1,360개의 방(坊-洞)을 두었다.
 
주에는 현도지사격인 총관(總官 元聖王 元年에는 都督이라 改稱) 군에는 태수(太守) 현에는 영(令)을 각각 지방장관으로 두었다. 이리하여 전야산군인 우리 남해도의 최초의 행정적 관할은 청주(현 晉州)에 속했으며 군에는 태수를 지방장관으로 하여 2개현(蘭浦縣 平山縣)에는 각각 현령(縣令)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전야산군의 도성은 현 고현면에 두었던 것 같다. 고현이란 옛 고을의 도읍이 있던 곳이란 뜻에서 불리워 내려오다가 그것이 지명이 된 것 같다.
 
그후 약 70년 제35대 경덕왕 7년 서기 758년에 단행된 지방행정구획의 재개편으로 남해는 전야산군으로부터 처음으로 남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소관주(所管州)
는 청주의 개칭인 강주(康州)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지금의 창선면(昌善面)은 본래 가야국에 속해 있었는데 신라가 이를 병합하여 고자군 인선현(古自郡 一 善縣)이라 하였다.
 
그 후 경덕왕조에 이르러서부터 그 명칭이 자주 바뀌어지는데 양성지(梁誠之)의 《팔도지지(八道誌志)》에는 경덕왕(742~764년)에 상선현(尙善縣)이라 개명하여 고성군에 귀속시켰고 고려초 다시 영선현(永善縣)으로 이름을 고쳐 현종(1010~1031년) 때 하나의 속현(屬縣)으로서 진주목(晉州牧)에 내속(來屬)하였다.
 
당시 진주목의 속현으로는 악양현(岳陽縣) 살천부곡(薩川部曲) 화개부곡(花開部曲)과 영선현 등 4개가 있었다.
 
─ 永善縣 在州東南 四十八里 本新羅 一善縣 景德王 改尙善 屬固城郡 高麗初改今名 顯宗時來屬 ─ (省略)
 
이 무렵은 이미 농경이 상당히 발전되고 특산물도 흥성한 한편 문무 신문왕조, 다시 말하면 전야산군으로 불리워지기 전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에 찾아들어 보광사(普光寺)를 짓고 불교를 광포하였다는 전설도 있고 또한 686년 영주에서 부석사(浮石寺)를 세운 의상대사(義湘大師)도 전후해서 금산에 찾아들어 의상암(義湘菴)을 세우는 등 고승들의 강설(講說)과 사찰건립에 관한 전설들이 아직도 전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해군으로 개칭되던 무렵은 불교문화도 상당히 꽃피워진 태평스런 세대였던 것 같다.
 
 

 
 
山南道 南海縣으로 (산남도 남해현으로)
 
 
 
 
高麗朝時代(고려조시대) ······ 서기 928년 왕건(王建)이 고려태조에 오른 이래 과도적인 행정기구와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여 고려조의 체제를 뚜렷하게 나타낸 것은 제6대 성종(成宗)과 제8대 현종(顯宗)을 중심으로 한 시대였다.
 
성종은 2년 2월 서기 993년에 중앙관서개조(中央官署改組)와 더불어 지방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광주(廣州) · 양주(揚州) · 충주(忠州) · 청주(淸州) · 공주(公州) · 진주(晉州) · 승주(昇州) · 황주(黃州) · 해주(海州) 등 12목제(牧制)를 단행하고 상무관(常住官)인 목사(牧使)를 각기 소관 주 · 군 · 현에 파견하여 제향직(諸鄕職)을 감독케 하였다.
 
이어 성종 14년에 이르러 전국을 4도호부(四都護府 - 安東 지금의  金海 安南 安北 安邊)로 나누고 도(道)를 관내(關內) · 중원(中原) · 하남(河南) · 강남(江南) · 해양(海陽) · 영남(嶺南) · 영동(嶺東) · 산남(山南) · 삭방(朔方) · 저서(沮西)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12목을 12주절도사(州節度使)로 변경하였는데 이때 10도소관제의 주 · 현진(州 · 縣鎭)는 모든 580여에 달하여 지방제도가 확고하게 갖추어졌다고 한다.
 
이번 개혁의 특징의 하나는 지방군제(郡制)가 폐지된 일로 우리 남해도 서기 995년인 이때 남해현으로 개칭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남해현지 등에는 8대 현종조 서기 1018년 행정개혁 때 남해현으로 개칭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 14년 개편 때 이미 군제가 폐지되고 10도 4도호부 128주 449현 7진(鎭)으로 체계화되었음이 분명한 이상 당시의 남해호칭은 산남도(山南道) 남해현이었던 것이다.
 
이어 1018년 현종 9년 2월 또한 대대적으로 행정구획 대개편이 단행되었다. 즉 각도의 안무사(安撫使)를 폐하고 전국에 4대도호부 8목-광주 · 충주 · 청주 · 진주 · 상주 · 나주 · 황주 · 전주-56지 주 군사(事) 28진장(鎭將) 20현령을 두었다." 따라서 도제(道制)는 없어지고 성종 14년 개편된 128주 449현 7진도로 재개편되었으며 현령수는 겨우 20에 불과하였다. 이때의 남해 명칭은 남해현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현령을 두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백년 뒤인 충숙왕조 10년간에 걸쳐 원나라에서 주자학 성리학(朱子學 性理學)을 연구하고 돌아온 거유 백이정이 첨의평리(僉議評理)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로 활약하면서 전성을 이룬 때이며 후에 남해로 이거해 온 것은 복위(復位) 충숙왕 8년이 아니면 충의왕조 초(1339~40년) 경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제 백이정이 남해로 이거하였다고 추측되는 때로부터 약 10년 후인 서기 1350년경부터 내우외환으로 고려 조야는 이미 흔들려 쇠퇴 내지 붕괴기로 접어 들었으며 왜구들의 약탈로 우리 남해는 점차 형언할 수 없는 수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즉 충정왕 2년 서기 1350년 대거 거제, 고성 등지에 침공한 왜구들은 이듬해 11월 남해에 침공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왜구들의 도량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제31대 공민왕조에는 조삼모사(朝三暮四) 격인 행정구역 개편만 네 번이나 이루어졌다.
 
왜구에 의해 초토화된 남해현은 그 행정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서기 1352~3년경 진주 관내 대야천(大也川—晴川) 부곡으로 임시 예속시켜 행정을 보게 했다. 그러나 이 조처는 결코 남해현을 폐했거나 병합시킨 것은 아니다.
 
왜구의 약탈과 방화 살육 등 온갖 만행으로 관아(官衙)는 소실되고 주민들은 남부여대 난을 피해 타지로 일시 떠나버려 현지(縣誌)의 표현 그대로 남해는 생물구망(生物俱亡)한 초토가 되고 말았으니 이렇게 임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는 몇백년동안 폐군되었느니 내버려졌느니 하는 과장된 추측은 버려져야 한다.
 
이로부터 약 30년 후인 1383년 5월 당시의 해도원수 정지장군(海道元帥 鄭地將軍)이 최후로 왜구들을 관음포 앞바다에서 섬멸하였을 때 이고을 주민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못해 손수 돌을 쪼아 정지장군승첩탑(勝捷塔)까지 세워놓지 않았던가 왜구들의 집요하고 간악한 침공으로 우리 남해는 몇번이고 생지옥같은 고역을 치뤄야 하였지만 우리 조상들은 끝내 고향을 버리지않고 지켜 주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으로 초토화된것은 옛 창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왜구들 때문에 현에 인물이 모두 없어졌다. 원종 10년(1269년) 왜구들이 우리 변경(邊境)을 침공해오려 한다는것을 듣고 여기에 간직하였던 국사(國史)를 모두 진도(珍島)에 옮겼다는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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