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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제5장 남해 연혁연구 (第五章 南海 沿革硏究) - 한말(韓末) 남해군(南海郡)으로 환원(還元)

내용
한말(韓末) 남해군(南海郡)으로 환원(還元)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한말(韓末) 남해군(南海郡)으로 환원(還元)

 

 

이조시대(李朝時代)…… 이조에 이르러 딥습(踏襲)해 오던 여제(麗制)를 개혁하기 시작한 것은 건국 9년 후인 정종 2년(서기 1400년)부터이며 이듬해인 태종 원년의 제2차, 태종 5년의 제3차에 걸쳐 관제(官制)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러한 중앙관제의 개혁은 점차 지방행정기구의 개편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즉 태종조에는 전 지방 행정조직을 8도로 나누어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그 밑에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를 두었으며 말단 행정기구로 350개의 군(郡)·현(縣) 읍제를 두었다.

 

수령(守令)인 부윤(府尹)·대도호부사(使)·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은 종2품부터 6품까지에 걸쳤으나 행정상으로는 모두 병렬적(並列的)으로 관찰사의 관장 아래 있었다.

 

이어 태종 13년부터 다시 대대적인 행정개혁이 이루어졌다. 종래의 경기 좌·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풍해도(豊海道) - 전서해도(前西海道) 이외의 동북면, 서북면을 평안도와 함길도(咸吉道)로 개칭함으로써 8도를 갖추게 되었는데 태종 13년에 이루어진 지방행정제도 개혁은 유도부(留都府) - 부윤, 6대도호부, 5목, 20도호부, 74군, 73현, 154현 등 도합 334개로 구획되었다.

 

이 지방 조직은 주, 군, 현의 부분적인 승격 혹은 강등으로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그 원칙은 말엽까지 이어 나갔다.

 
이 태종 13년의 지방기구 개편에 따라 우리 남해가 하남(河南) 또는 해양(海陽) 현으로 개칭된 것처럼 전해져 있으나 이는 남해의 별명(別名)일 뿐 행정상의 현명(縣名)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 남해의 행정적 관할은 경상도 우도(右道)에 속했고 종2품(從二品)의 경주부윤(정三품의 착오), 대도호부사, 정3품의 진주목사 아래 종5품은 현령의 소관으로 되어 있었다. 의령, 진해, 고령, 산청, 사천, 웅천 등 도내 14개의 종6품 현감소관보다는 상위였고 합천, 초계, 함안, 곤양, 함양 등 6개군보다는 격이 낮았으나 그러나 현령소관은 고성과 더불어 두 군데밖에 없는 그런대로 중요한 행정대상 지역이었다.
 
이때 변동사항은 한때 부(府)였던 함양이 군으로 격하 복구되었고 안음현(安陰縣)이 안희현(安羲縣)으로, 산음현(山陰縣)이 산청현(山淸縣)으로 바꿔졌을뿐 남해현령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지방행정체제의 개편으로 행정시행에 점차 안정을 이루게 됨에 따라 세조 원년에 제1차 지방관위조직을 일신하기에 이르렀고 동 12년 서기 1466년 관제개혁(官制改革)과 더불어 지방군제(地方軍制)도 개편 되었다.
 
 
이로써 남해지방군제는 진주진관 진주목사(晉州鎭管 晉州牧使—正三品)인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밑에 남해현령이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從六品) 급위로 관장하고 있었으며 한편 수군(水軍)은 제포진관 웅천첨사 휘하(薺浦鎭管 熊川僉使 麾下)에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가 관장하고 있었다.
 
한편 현지(縣誌)에는 태종조에 하동과 병합하여 한때 하남현(河南縣)으로 되었다가 하동현이 독립됨에 따라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 하였고 금양이 진주에 병합됨에 따라 남해현으로 복귀되었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정사(正史)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이 그것 역시 기록의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한문 주석 부분)
韓也山部 景德王改爲 南海郡 顯宗戊午 置縣令官 恭愍王戊戌因倭失土 僑寓于晉州
任內 大也川部曲 本朝太宗甲午 合于河東稱河南縣 乙未復置河東縣 以晉州任內金
陽部曲 屬于南海 稱海陽縣 丁酉以金陽還屬 晉州 復爲南海縣—世宗實錄地理志所載
 
또 세종조에 곤명현과 합쳤다가 다시 환원시켜 현령(縣令)을 두고 다스리게 하였는데 연산군 4년에 남해현인들이 구례 배목인(裵目仁)과 어울려 모반(謀反)을 책동한 것이 드러나 고을 원을 현령에서 현감(縣監)으로 감등(減等)하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폭군 연산이 물러나자 중종 1년에 현령으로 복귀되었다.
 
이조에 들어 약백년은 그 행정체계도 점차로 확립되어 왕조의 정치 문화는 일옹단 숙기(爛熟期)에 이른듯 하였으나 제10대 연산군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색당쟁(四色黨爭)은 동4년(서기 1498년)부터 불과 50년사이에 네차례나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대옥을 치르게 하였다. 연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14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명종원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의 기묘사화에서 우리 남해는 유배되어 온 젊은 혁신 정치가이며 이조 초기의 4대 서예가의 한사람인 홍문관 부제학 자암 김구와 13년간의 인연을 맺기에 이른다.
 
이어 1592년 선조 25년 왜적의 침략으로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우리 조상들은 고려 중엽의 왜구 침공에 이어 두번째의 고통스런 대수난을 겪었으나 이 고장의 바다인 관음포에서 이 충무공의 구국제민(救國濟民)의 거룩한 순국으로 위태로웠던 나라가 건져지고 왜적에게 짓밟혔던 고향땅을 되찾게 되었다.
 
이 충무공이 순국하신 관음포에는 그 순국정신을 기리는 순국비가 서있고 이 관음포에서 유해를 옮겨 한동안 가매장했던 노량에는 제일 유서깊은 충렬사가 세워져 공의 넋을 봉안하고 있다. 관음포에서 노량에 이르는 일대는 충무공이 순국하심으로써 우리 고장과 깊이 인연이 맺어진 자랑스런 성역(聖域)이다.
 
그후 경종 2년인 1721년 세자책봉(世子冊封)을 에워싼 대옥이 일어나 숙종조 노론파 전지사대신(建儲四大臣)의 한사람인 소재 이이명(疎齋 李頤命)이 두번째로 남해에 귀양살이를 하게되어 충신효제(忠信孝悌)의 높은 학문과 도를 향사(鄕士)에게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그와의 인연이 굳어진다. 그는 터무니 없는 반대파의 모함으로 소환되어 사약(賜藥)을 받게 되지만 그를 스승으로 대하고 친 아버지처럼 모셔오던 향사들의 슬픔 속에 그의 덕과 도는 오늘에까지 이어 내려져 오고 있는 것이다.
 
임진 병자(丙子)의 국난을 치른 역대조정은 그 재정이 궁색하고 핍박해짐으로써 왕도정치가 점차 정치권력의 농단과 사리사욕에만 급급하는 척신배(戚臣輩)들의 제패정치(制覇政治)로 변질되어 감에 따라 드디어 봉건적 왕조는 쇠퇴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철종 말엽부터 일어난 민요(民擾)와 민란(民亂) 그리고 드디어는 동학란이 일어나 5백년 이조왕조도 쇠망하게 되었거니와 철종 13년 서기 1862년 탐관(貪官)의 학정을 규탄하기 위해 봉기했던 진주민란에 호응하여 동년 12월 우리 남해에서는 당시 7개면의 농민 수천명이 흰 수건을 동여매고 곤봉 등으로 무장하여 읍내로 쳐들어와 관아(官衙)와 창고등을 파파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집을 불사르는등 5·6일간 큰 항쟁이 벌어졌었다.
 
중종조 유배되어 온 자암선생이 읊은 그 유명한 화전별곡(花田別曲)에서 남해를 일컬어 일점선도(一點仙島)라 했을만큼 유순했던 우리 조상들이 드디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이처럼 봉기하였음을 상기(想起)해 볼때 이 무렵의 정치가 얼마나 부패하고 혼탁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러는 가운데 고종 32년 서기 1895년 남해현은 남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그후 고종 광무 10년 서기 1906년 당시 진주목에 속해있던 흥선현(興善縣)이 남해군 창선면으로 편입됨으로써 8개면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 編入된 昌善島의 沿革……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바 있거니와 창선도는 본래 가야국에 속해 있었는데 신라가 이를 빼앗아 임선현(一善縣)이라 이름지어 고자군(古自郡-固城郡의 옛 名稱)에 예속시켰다. 우리 남해가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으로 불리워졌던 신라 문무왕 17년에서 신문왕 7년(서기 687~697년) 사이의 일이다.
 
그 후 경덕왕 7년 서기 758년 지방행정구획 재개편으로 남해가 전야산군으로부터 남해군으로 개칭될 무렵 일선현이었던 창선은 상선현(尙善縣)으로 바뀌었다. 다시 고려조로 접어들면서 행정구획상의 변혁이 심해짐에 따라 그 현명(縣名)도 몇차례 바뀌었다.
 
즉 신라조 경덕왕(景德王) 때의 상선현은 고려조 현종 9년(서기 1018년) 때 진주목(晉州牧)에 예속되면서 영선현(永善縣)으로 바뀌었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진주목 영선현조(永善縣條)에 따르면 그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하였다가 충선왕(서기 1309)이 매우 그 이름을 싫어하여 흥선현(興善縣)으로 고쳐졌다.
 
(한문 주석 부분)
  • 本新本新羅一善縣景德王改尙善 頤固城郡 高麗初改今名 (永善)
  • 一 新增東國輿地勝覽晉州牧條所載
  • 即興善島 本麗有疾部曲 後改爲彰善縣 來屬忠宣王改今名(興善) 因倭 寇人物皆亡
  • 今爲直村 元宗十年 聞日本將寇遜縣 移于珍島 所藏國史
  • 一 同興善廢縣條所載
사기(史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창선도 옛날 남해현이 겪은 바와 같이 왜구 침공으로 초토화 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질환(疾患)이 창궐하여 호된 수난을 겪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영선현 당시 二백五 , 60호에 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林)·임(任)·양(陽)씨 세개성이 씨족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예로부터 외적방어의 요새지로 지정되어 시위군(侍衛軍) 174명, 경진군(警鎭軍) 188명의 지상군(地上軍)과 975명에 이르는 선군(船軍)이 배속되어 있었다.
 
지금의 적량이 옛날 흥선현의 도움으로 적량진성(赤梁鎭城)이 있었는데 그 주위가 천2백척이다. 이 적량진에는 예로부터 한명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배속되어 수비를 통괄하고 있었으나 숙종(肅宗) 14년에 첨사(僉使)로 승격되어 수군동첨절제사 겸 좌조창영운차사(水軍同僉節制使 左漕倉領運差使)가 방위를 맡아 왔었다.
 
적량 남쪽에 있는 포대(砲臺)터는 적량첨사가 대포를 장치했던 곳이며 장포 서쪽의 남방봉(南防峰) 산등에는 망대(望臺)와 봉화대(烽火臺)가 있다.
 
 

 
 
蘭浦 · 平山廢縣…… 한편 신라초기에 독립된 현으로 제정되었던 난포 · 평산등 옛 고을의 연혁을 약기(略起)하면 지금의 二 · 三동면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난포현(蘭浦縣)은 멀리 신라 신문왕조 전야산군(轉也山郡) 때의 내포현(內浦縣)이었으나 경덕왕이 이를 난포라 고쳐 남해군에 편입시켰다.
 
이 난포의 명칭은 고려조에 들어서도 계속 사용되어 왔으나 여말 왜구 침공으로 폐현(廢縣)이 되고 말았다.
 
둘째 지금의 남면 일대를 중심으로 한 평산현(平山縣)은 역시 난포현과 함께 전야산군때 평서산(平西山) 또는 평서현(平西縣)으로 불리워져 왔으나 경덕왕 때 평산현으로 이름을 고쳐 남해군의 영현(領縣)으로 살아오다가 고려말 왜구의 침공으로 완전 초토화됨에 따라 폐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의 고현면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고현(古縣)이 행정구획상 독립현으로 존립(存立)했던 것처럼 일부에는 알려져 왔으나 행정제도상 고현이 존립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남해를 일컬어 부르는 대명사(大名詞)적인 성격의 것으로 그 뜻은 옛고을이라는 것이다. 즉 전야산군이 있었던 옛고을 이라는 뜻에서 이를 한문자로 표시한것이 곧 고현(古縣)이다.
 
남해현지에 보면 이조 태조조(太祖朝) 때 당시 도관찰출척사 최유경(都觀察黜陟使 崔有慶)이 남해성(南海城) 구축의 화급성을 알리는 상소문에 따라 남해성을 짓게 된 경위에 언급한 정이오(鄭以吾)의 글에 인근 · 5개군민을 동원하여 고현절도(古縣絶島) 한가운데에 돌로 성을 쌓았다 는 한귀절에서 볼 수 있다.
 
朝以隣境河泗溟固鎭五郡之人 城諸 古縣絶島之中 累石爲固
              晉州鎭管 南海縣誌 所載
 
그러므로 전야산군이 있었던 남해의 옛고을이란 뜻의 대명사가 고유명사로 화한것은 일응 옛날 전야산군의 도읍이 고현면일대의 어딘가에 있었던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갖게하는 흥미로운 사실(史實)이라 하겠다. 이에 대한 후학들의 연구를 희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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