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 사업
[ 2023 ] 조도 호도를 담다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5.01.08
조회수215
◈ 조도 호도를 담다 ◈
1부 - 조도마을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조도마을이다. 조도마을은 조도와 호도, 두 개 섬으로 나뉘는데 조도는 다시 큰섬과 작은섬으로 나뉜다. 그렇지만 큰섬과 작은섬은 연결되어 있다.
무인도는 고도(외섬), 박도(납도), 목과도, 작은목과도, 노루섬, 미도, 죽암도가 조도마을 소유이다. 바닷물이 만조 때는 안 보이고 간조 때는 보이는 여(서)는 큰 여, 작은 여, 시불 여는 조도마을, 가물 여는 호도마을의 관리 지역이다.
2부 - 마을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남해군과 삼동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한다.
조도마을이 속한 미조면은 애초에는 삼동면에 속해있었다. 삼동면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사료는 『진주진관지』이다. 세종 이후 정조 이전에 있었던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삼동면이 설치되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당시 삼동면에는 6개 리가 있었는데 그중 미조면은 미륵향리로 기록되어 있다. 미륵항리는 순조 32년(1832) 이후에 미조항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도마을은 미조항리에 속해 있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 왜구의 연안 침입으로 약 70년간 남해안 도서지역의 주민들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켜 섬을 비우는 공도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인해서인데 환경이 비슷한 남해와 거제도 등이 강제 이주로 섬을 비우게 된다. 이에 따라 남해도는 법으로 사람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 되었고 조도, 호도 또한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하자 공민왕 7년(1358)에는 주민들을 육지로 임시 이주시키고 남해현을 없앴다.
이는 조선이 들어선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남해도의 내륙은 토지를 개간하면서 사람이 거주하도록 했지만 해안지역은 왜구의 노략질을 염려하여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했다. 문종 2년(1452)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곤남군 조에 의하면 남해현의 호구가 61호에 171명(남:71명, 여:100명)인 것을 감안했을 때 조선 초기까지 남해도 내륙에는 주민이 거주를 하였지만 해안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남해도의 해안지역은 조선 초기까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해산물이 생산되는 곳이라, 남해도를 계속해서 방치할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성종 17년(1486)에 미조 진성을 설치하고 성종 21년(1490)에 평산포성을 쌓는 등 왜구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남해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취락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정조 10년(1786)에 완성된 진주진관 남해현지에 남해현의 호구가 4,904호 25,971명(남:12,326명, 여:13,654명)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조도, 호도마을 역사와 관련해 작은섬 이성민 씨는 옛날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정확한 역사는 모르지만 미조보다 여기가 사람이 먼저 들어 왔다"고 말했다.
조도, 호도 주민들 또한 공통되게 선대에 들은 이야기를 전제로 비춰보면 마을 역사가 400년은 됐을 것이라고 구술하고 있다.
작은섬 이재만 씨도 "조도 작은섬 뒷산 장군단에 장수 이 씨의 입도 할아버지 묘가 있다. 이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으니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이 400여 년은 되었다. 큰섬에는 주로 진양 강 씨들이 많이 살았다. 호도에는 200여 년 전, 양 씨들이 가장 먼저 입도하여 살았다. 그 후 백 씨, 배 씨, 천 씨, 이 씨들도 섬으로 건너와 살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런 주장은 마을에서 전해오는 구전이거나 이재만 씨가 조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의 목숨이 땅에 달려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지의 전답은 대부분 양반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섬은 양반이나 주류 층의 손길이 덜 닿았을 것이라 개간이 가능한 무주 공한지가 많았을 것이고 개간만 하면 수월하게 자기 농토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한지인 섬의 지형 대부분이 경사진 산비탈 등이라 오로지 한 뼘, 한 뼘 괭이질로 개간하고 돌로 언덕을 쌓아야만 농토로 쓸 수 있었다. 그러니 자기 소유 농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조도, 호도로 들어와 척박한 대지를 일구어 삶의 터전을 가꾸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