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 사업
[ 2016 ] 용문사 중흥주 호은율사의 흔적을 찾아(지역N문화)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5.03.31
조회수324
▶ 호은율사 이야기 (박신조)
불교 제6대 해동율사를 지내신 저희 종증조부이신 호은율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안이 가난하여 할아버지께서 백부이신 호은 스님의 배려로 용문사 살림과 잡일을 하시고 살았는데 식사 후 남은 누룽지를 말려 두었다 집에 다녀갈 때 망태기에 담아 오셔서 가족은 누룽지에 물을 많이 붓고 삶아 나누어 먹기 일쑤였다 하셨습니다.
당시 사찰의 전답이 많아 저희 고향 용소의 많은 주민은 용문사 소작인으로 살았지만 호은 종증조부께선 조부께 말씀하시길 남에게 의지하거나 공짜를 바라면 안 된다.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 고 늘 말씀하셨다 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지게를 지고 할아버지와 같이 용문사에 올라가 산에 있는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지워 주시면 집으로 내려오고 할아버지는 용문사에 들어가시고 한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께선 5남 2녀를 두셨는데 첫째는 뇌성마비 환자로 고생하다 결혼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시므로 가부장적인 시대인지라 장애자인 장남을 잃고 저희 아버님이 둘째로 장자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데 저희 누님을 잉태 중에 폐결핵으로 당시에는 살릴 수 있는 약도 없어 백약이 무효라 점장이에게 물으니 딸이면 죽고 아들이면 살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고 보니 딸이어서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였고 누님은 할머니께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중에 저희 어머님이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였겠습니까 태어난 저희 누님은 항상 설사와 질병으로 아파하는 어린것을 저희 할머니께선 아버지를 죽게 만들 것이라고 점장이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더욱 어린 손녀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어머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파하였을까 생각하면 보지 못한 저도 어려웠던 집안의 사정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과 슬픔이 다가옵니다.
그러던 중 고 김선일 법무사 부친이 용소교회(성남교회) 초대 장로님으로 저희 뒷집에 사셨는데 할아버지께 절에 몸담고 계시지만 아들을 살리려면 교회를 다녀야 한다 하셔서 아들을 살리려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선 율사이신 백부가 믿었던 불교를 버리지 못하여 교회는 나가지 않으시고 아들을 살리려고 저희 아버님만 교회 가게 허락하셨습니다.
장로님의 아들 들께서 저희 아버님을 업고 교회에 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시다 밤 예배가 끝나면 저녁 늦게 업고 집에 오기를 계속하시다 살아나셔서 6년만에 저를 낳고 하나님께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을 세상에 비추라고 이름을 믿을 신(信) 비칠 조(照) “신조” 라 하셨습니다.
아버님도 용문사에서 공부를 하셨지만 살아나셔서 일체 발을 끊고 교회 전도사님과 장로님으로 교회 일을 하시고 4남 2녀의 자녀를 낳으셨습니다.
동네 어른들로부터 “저 사람은 법 없이 사는 사람이다” 는 칭찬을 받으신 그야말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사시다 13년 전에 78세의 일기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제가 어릴적에는 나무가 우리의 목숨과도 같았습니다. 땔감이나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서 화력을 사용하는데 모든 국민들이 나무를 하다 보니 국유림은 황폐하게 되어 먼 곳이지만 호구산은 용문사 소유의 산인데 아주 넓은 산인데 절에서 관리하니 나무를 하기 힘들었지만 겨울의 떨어진 가랑잎은 허락하였으나 나무는 못하게 하고 산지기라는 분이 계셔서 나무하다 들키면 낫, 도끼, 톱은 물론 지게까지 뺏아 가기 까지 하였습니다.
산을 관리 할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무를 안 할 수가 없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산으로 들로 나무하러 풀 베려 다니고 어른들은 돈 벌일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서 어린 자녀들은 나무하는 것 가축 먹이를 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 갓(절 소유 산)으로 숨어 다니며 나무를 다녔지만 종증조부가 용문사를 복원 중흥했다는 말은 물론 불교에 관련된 내용을 일절 함구하셔서 호은 종증조부의 행적비가 있다는 것도 몰랐으며 가끔 당숙들께서 너희 종증조부가 유명한 스님인데 교회를 다니는 게 말이냐 되느냐 고 야단을 치시곤 하셨습니다.
저희 조상들의 산소가 고향 이동면 용소, 이동면 난음 비자당, 고현면 이어리, 하동 금남면 등에 있어서 성묘를 하였지만 나이가 들어 족보를 보니 4~5대 할아버지와 산소가 곤양군 서면 가인촌 사포 하… 라고 되어 있고 산소도 여러 군데 흩어져 있어서 과연 우리의 고향이 용소가 맞는지 혹시 다른 데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용문사 부도군 앞에 있는 호은당 대선사 행적비를 찾아 보았지만 비문이 낡아 제대로 알 수 없어서 군청 문화담당 등 여러 곳을 알아보다 금석문이 있다는 문화원을 찾게 되어 문화원장님과 사무국장의 도움과 배려로 여기가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저희 종증조부 호은 율사의 행적이 있는 그대로 발췌하고 드러내어 선조께서 하신 일들을 알기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율사의 고향은 어디며 어디에서 입적하셨는지 등 행적을 알 길이 없어 인터넷에 호은스님을 검색하니 구례화엄사 부도군 앞에 호은대율사비가 있다는 기록과 사진이 있었습니다. 비문이 있다는 화엄사에 가 보았지만 비문이 낡아 내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찰에 문의하였지만 기록이 6.25 때 분실되어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난감하였습니다. 문화재는 아닐지라도 기록이 있으니 구례군청에 문의해 보자 는 생각이 떠올라 구례군청의 문화재 담당에게 문의하여 탁본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담당에게 부탁하여 탁본을 받아보게 되었습니다.
비문 말미에 “제자 숭양산인 장지연 근식” 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바로 1905년 을사조약을 맺어 나라를 일본에 판 매국노 5적을 비판하고 통곡한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올린 주필 위암 장지연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비문을 보고 율사가 예사로운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남해문화원에서도 고승 호은 율사를 조명하고 연구하여 세상에 올려 주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듣고 자손된 저도 여기에 힘을 얻고 협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까지 조명된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호은 율사의 속명은 박문성(朴文性) 법호는 범호(梵虎) 숨길… 출가하신 용문사가 虎丘山 이라 법호를 호은으로 하셨고 조부는 계복이며 통정대부(용양위절충장군)3품 당상관을 지내셨고 부친은 용옥이며 율사가 태어난 곳은 곤양군 서면 가인리(하동군, 금남면)에서 1850년 8월 24일에 태어나셨습니다.
조부 계복의 원적은 남해군인데 벼슬을 하기 위해 부모님을 모시고 남해 섬을 떠나 하동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곤양군 서면 가인촌이라 하여 하동군청에 문의 하였지만 아는 분이 없고 곤양군이니 사천시에 문의하라 사천시에 문의하면 곤양면에 문의하라 곤양에선 가인리는 남해니 남해에 알아보라 하였습니다.
묘가 하동군 금남면에 있으니 금남면에 문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여 민원실에 문의하니 오랫동안 호적을 담당했다는 팀장님이 “옛날에 가인촌이 하동화력 발전소 부근에 있었는데 하동화력에 보상을 받고 가인촌이 없어졌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은 남해였지만 하동에서 살았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10세에 돌아가셔서 할머니 해주 오씨의 손에 자라다 3년 후 할머니도 돌아가 재당숙이 살고 계시는 고향 이동면 용소로 가서 얹혀살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하다 용문사에 들어가 학문을 깨우치던 중 16세(1865년)에 금우화상에게 계를 받고 출가하여 예천 용문사의 용호해주 화상과 대연정칠 스님께 학문을 배워 불경과 경전을 깊이 해득하셨습니다.
1893년 해인사에 계실 때 대흥사 범해각안 율사에게 보살계와 구족계를 받고 제6대 해동율사로 1908년(1902년) 해인사 상선원에 금강계단을 창건하고 전계사로 행사하였으며 1912년 구례화엄사에 금강계단을 세우고 1913년 정월 스무 이레에 화엄사를 필두로 전국의 본사마다 금강계단을 세우고 전계사를 세워 구족계와 보살계를 행하셨습니다. 이때 율사께선 화엄사 전계사로 190여 명에게 전계를 하였다 합니다.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고 승려가 되기 위해서 금강계단에서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양산 통도사에서만 있어서 여러 가지 불편함이 많아 친히 해인사에 금강계단을 세우므로 전국의 불교 본사마다(당시는 30개) 금강계단을 세우게 되어 비구계와 보살계를 통하여 많은 승려와 불교를 세우게 한 율사의 업적은 대단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 즉 유교는 숭배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시대라 신라시대 양산 통도사의 자장율사가 중국에 가서 계율을 받아 양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우고 초대 율사로 이어져 오다가 조선 중엽부터 율맥이 끊어져 내려오다 1700년 말에 칠불사(칠불암)에서 스승인 금담보명과 그의 상좌인 대은낭오 스님이 계를 받기위해 기도하던중 제자인 대은 스님의 이마에 불이 내려 계를 받고 스승인 금담보명 스님이 2대 율사로 초의의순 - 범해각안 - 제산 - 호은문성 - 금해관영 - 만암 - 묵담성우 - 혜은법홍 - 지금은 11대로 담양 용화사의 수진율사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율맥에 대한 찬반은 있으나 오히려 맥이 끊어진 율맥을 다시 일으킨 건 인정 안 할 수 없다 합니다. 1900년에 용문사 사찰을 복원 중흥하여 용문사에선 호은 율사를 대 공덕주로 섬기고 있다 합니다.
한국불교 선종의 중흥조라 하는 경허스님이 서룡화상 행장을 지으셨는데 글에 의하면 광무 4년(1900년)에 화전 용문사에 들렀다가 호은 장로가 “서룡 화상의 도행이 탁월하니 행장을 지어서 후세에 전하기를 부탁하여 행장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불교계(종교계)의 존경받는 어른을 장로라 합니다.
3.1절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중 2명의 스님이 계신데 그 중 한분인 백용성 스님이 1부에는 불교를 변론하고 2부에는 불교의 원리를 작성하여 불교의 교과서와 같은 “귀원정종”을 1910년에 지으셨는데, 1910년 칠불사에 있을 때 호은 장로가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교를 배척한 자는 정자와 주자에 지난 자가 없고 현재에 더욱 심하게 배척하는 자는 예수교라 우리가 먼저 남을 배척할 것은 없지만 한번 변론할 필요가 있으니 원컨대 선사는 변론하는 서책을 하나 저술하여 종교의 깊고 얕은 것을 알게 하라” 하니 그때에 응해 장로도 권청하시고 대중도 이구동성으로 청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1938년에 이은상 시인이 “지라산 탐험기” 칠불사 편에 해동율맥을 말하면서 제6대 율사로 호은 스님을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사께서 54년간 20개 사찰, 동래 범어사, 순천 송광사, 곡성 태안사, 통영 안정사, 남해 용문사, 화방사, 사천 다솔사, 하동 쌍계사, 칠불암, 합천 해인사, 경남 고성 옥천사, 산청 대원사, 오봉암, 함양 벽송사, 금강산 유점사, 금강산 간성 건봉사,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 서울 원흥사, 진주 청곡사, 호국사, 구례 화엄사 등에 계셨습니다.
정축년(1877년)에 대덕법계에 오르시고 동년 4월 하안거 시작일(結夏) 용문사 백운선원에서 수행인을 교화하는 주실이었고 다음해 봄 합동일(4월경)에 국사암 만일화상에게서 화엄경설법 강의를 요청받아 설법했다.
전법을 위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거사의 전법을 듣기 위해 모였고 설법을 잘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여기에 올라 널리 알려졌지만 얻은 이름이 없어 보문이라 불렸다.
융희 2년(*1908년) 7월 15일부터 해인사 상선원 금강계단을 열고 13년 대회에 이르러 제6대 해동율사로 율사의 맥을 이었고 불 밝히고자 여러 사찰에 많은 족적을 남기시고 태황 16년(1879년) 4월 8일부터 용문사에서 수륙대회를 열었으며 수 천 명에게 율법을 전하였다.
통영시지의 기록에 의하면 1913년에 호은 율사가 통제영(임진왜란. 수군통제사)의 영리청 건물을 매입하여 쌍계사 선원(포교당)을 세워서 많은 제자와 군민들에게 설법으로 불교를 전하셨다 합니다.
입적하신 날짜와 사리가 나와 6일 밤 동안 방광을 발했다 는 기록은 있으나 행적비, 율사비, 뿐 만 아니라 어느 곳에도 사리탑에 대한 기록이 없어 어디서 입적하셨는지 몰라 애 태우다 조선불교총보 제8호 휘보에 율사께서 1918년 정월 초사흘에 양산 통도사에서 입적하셨다 하는 기록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박호은 대선사의 입적 경남 양산군 통도사에 지주하던 박호은 대선사는 지난 2월 13일 돌연 입적하였는데 화상은 원래 저명한 율사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경 3장을 다 통달하시고 일생 평생 율법을 지키시고 예의를 지키고 깨끗하였고영원히 불교계에서 경앙하던 바이지만 화연이 기진하여 자취기적 할 때 임종계를 말하고 ‘如何是 佛法的大義오 自性淸淨圓滿空績이로다’ 良久云 是甚慶오 又口誦無上大涅槃이 圓明常寂照로다. (어쨌건 이 부처님이 세상의 큰 뜻이요. 스스로 깨달음이 깨끗하고 원만한 공적이로다. 좋은 거은 영원하리라 이 또한 깊은 경사로다. 또 스스로 읊기를 조용하게 대열반에 드는 것이 늘 부처님의 자비로다) 又答曰無去無來(또 답하기를 오는 것이 없음은 가는 것도 없노라)라 하고 수연 就寂하였는데 그날 밤 일도서광(한줄기 상서로운 빛이)이 서방으로 나타나 연 6일 밤을 발하였고 다비 쇄골시에는 수편의 사리가 옥과 거울 같이 저마익롱(杵磨益瓏, 원래 뜻은 절구가 다 닳은 듯 좋은 소리를 더 한다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정성을 다한 아름다운 소리가 크고 라는 의미))하고 정횡진성(淨鑅振聲, 맑은 종소리가 떨며 내는 소리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말고 아름답게 내는 소리라는 의미) 하여 보는 이들 모두에게 드문 일이고 기적이라고 찬탄하였더라라, 고 휘보에 있습니다.
생전에 통도사에는 계신 적이 없으나 제자 박성월이 통도사 조실로, 박진해 선사, 금어 완호스님 등의 제자들이 통도사에 주석하면서 말년에 통도사에 모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매일신보에 1914년 3월 20일자 내용에 의하면 통영 선종포교당에 야학을 개설하여 국어, 수신, 산술, 불경 등을 가르쳤다. 1919년 8월 2일에 용문사 행적비, 구례화엄사에 호은대율사비를 세웠는데 율사비를 당대의 3대 강백이며 화엄사 주지인 진응 선사가 설치하였고, 주도는 진해 선사, 비문은 제자인 숭양산인 장지연이 쓰셨습니다.
비문의 명단에 17개 사찰(쌍계사, 천은사, 영원사, 선원사, 다솔사, 태안사, 선국사, 화엄사, 대원사, 대복사, 실상사, 관음사, 용화사, 안정사, 송광사, 옥천사, 와룡사) 138명의 스님과 군민 44명(전남 곡성, 통영, 고성) 그리고 26명의 제자 기타 5명 도합 213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 있는 스님들의 속명과 법호가 달라 모두 파악하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하신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 동국대학을 일으켜 세웠던 교육가이자 학장인 김포광(김영수) 스님 등이 있습니다.
특이하게 제자 중에 불교의 3대 불모라 하는 금어 양완호 스님이 있습니다. 1914년에 율사가 세웠던 통영의 쌍계사 선원(포교당)에 완호 화승이 그린 3점의 완호 필 불화가 문화재로 있으며 통도사, 범어사 등 전국의 여러 사찰에 있는 불화가 문화재로 되어 있고 부산 영도의 복천사를 일으키고 복천사의 많은 탱화와 불상이 부산시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율사의 제자이자 양완호 스님의 제자 공시찬은 밀양의 동명중학교를 세우고 친히 한문교사로 학생을 가르친 교육가이자 화승입니다.
남해 용문사 호은당대선사 행적비의 내용은 호은대율사비에 비하면 많이 못 미치지만1919년 8월 2일에 산산인 김영두가 짓고 세웠는데 행적비를 받치고 있는 큰 바위에 새겨진 내용을 판독하지 못했지만 비를 세운지 7~8년이 지난 후에 새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수 문(?)호, 남해군수 이소영(1924년~1927년), 이동면장 정종묵(1926년~1931년), 그리고 서무과장을 비롯한 약 30여명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구해야 될 일이지만 유추해 본다면 호은 문성 율사의 도행과 지역사회에 끼친 공로가 대단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율맥을 이어 율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많은 승려와 불자들에게 전계하셨습니다. 합천 해인사 금강계단 호계첩 문에 의하면 자장 율사의 맥을 잇고 1376년 인도의 지공화상이 통도사에서 수계할 때 해인사 주지였던 元無대사가 수계 법회 때 참여하여 수계한 후 해인사 금강계단의 단주가 되어 전계하였고 1902년에는 上禪院에 금강계단을 개설하고 호은 율사께서 전계사로 추대되어 수계한 후 제산정원, 용성진종 등에게 전하였다 합니다.
불교계의 "이완용" 이라 하는 이회광 일파가 세운 원종에 맞서 박한영 스님, 김종래 스님, 한용운스님(만해), 오성월 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하여 대응하였던 당대의 3대 강백 진응혜찬 스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세속화 된 불교를 정화하기 위해 힘썼고 6.25 동란으로 불탄 사찰을 복원 불사하고 평생을 송광사를 위해 살았던 취봉 스님, 호은 율사께 해인사에서 구족계와 법명을 받고 7대 율사로 백양사를 대표하는 금해관영, 1908년 4월15일 합천 해인사에서 호은 율사께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1939년 대종사 법계를 수지하였으며 신구 학문을 두루 갖추고 후학을 양성하신 광주 정광학원 이사장을 지낸 백양사 봉하장조 스님. 경주사람으로 합천 해인사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192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친일승인 강대련 명고축출 사건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1932년 고성 옥천사에서 정진 득도하였으며 진주 호국사에서 호은 율사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백세를 누렸던 동고문성스님, 등 이 호은 율사로부터 수계하신 스님들입니다.
담양용화사 묵담박물관에는 율사께서 친필로 쓰신 화엄사기, 인약사기를 후임 7대 해동율사인 금해 율사에게 전달한 유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율사께선 신해년(1911년) 경남 9사 사찰연합회의 추대로 해인사 포교당의 스승인 감독을 오래 동안 역임하셨고 사찰을 복원 중흥하고 산에 나무를 심고 중국 상해에서 남북장경 2부를 구하여 통달하였고 계율의 정맥을 이었으며 대중에게 설법으로 재능을 펼쳤고 자비로 사람을 대했으며 돈으로 가난한 자나 병자들을 거두고 하심으로 수선구도를 하셨습니다. 1800년 말에 산에 나무를 심었다는 건 특정 종교의 율사를 뛰어 넘어 선지식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나무를 베어서 사용할 줄만 알았지 나무를 심는 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각과 백성을 위해 먼 장래를 내다보고 몸소 실천하셨던 분임이 확실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올려져 있는 언론인이며 계몽가로서 많은 책과 글을 남기신 숭양산인 장지연의 프로필에 율사의 제자로서 율사가 입적하자 율사의 비문을 찬하였다는 기록을 첨부하도록 하여 수정 받았으며 대불모인 양완호 화승과 화승이자 교육가인 공시찬을 율사의 제자로 첨부 수정하도록 하여 수정하였습니다.
아직 행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정확하게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으나 여의치 못하니 남해문화원 향토사위원들의 협조를 통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호은 율사께선 용문사에 출가하셨고 사찰을 복원 중흥하셨고 수륙대회 등 많은 일과 또한 오랫동안 주석하셨습니다. 많은 자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용문사의 기초자료를 기준삼아 다른 사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 용문사의 협조를 받지 못하여 기본적인 것도 아직 제대로 파악을 못하였습니다. 특히 경남문화재 자료 제351호인 용문사 소장 문헌집을 열람할 수 있도록 남해군 관계 공무원과 용문사의 관계자들께서 많은 협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율사께서 합천 해인사에 계실 때 금강계단을 세우시고 전계사로 많은 승려를 세웠고 불교계에서 중요한 여러 일들을 하셨으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일들을 조명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교회의 장로로서 이 사실을 조명한다는 건 아이러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불교의 유명하신 선조가 계셨는데 왜 같은 종교를 갖지 않느냐고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왜 저의 아버님이 교회를 다니셨겠습니까!
저는 나의 선조이신 율사의 지금까지 행적을 찾고 찾으며 많이 슬퍼했고 울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1885년 4월 부활절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율사께선 1850년에 태어나 16세 되던 1865년에 출가했으니 기독교가 30년만 일찍 들어 왔어도…
구도자의 길을 걸으셨던 율사이신 저희 종증조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옵니다.